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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

giantroot2014. 11. 24. 15:05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9.5
감독
존 포드
출연
헨리 폰다, 린다 다넬, 빅터 매추어, 캐시 다운스, 월터 브레넌
정보
서부, 드라마 | 미국 | 97 분 | -


[황야의 결투]는 [역마차]와 [수색자],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와 더불어 존 포드 서부극을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실제로도 [황야의 결투]는 [역마차]로 열어젖힌 황금기 서부극 영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수색자]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만가에 가깝다면 [황야의 결투]는 아직 만가에 이르기 전 나름 성숙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물론 [황야의 결투]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의 편견에 대해 재고할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볼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서부사를 다룰때 반드시 등장하곤 하는 실존 인물 와이어트 어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황야의 결투]는 와이어트와 형제들이 소를 팔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초반부 와이어트와 세 형제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동체로 그려진다. 미래를 꿈꾸는 아직 연약하고 어린 동생 제임스를 보호하며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에서 존 포드는 인간의 한 구석에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그림을 초반부에 집어넣는다. 어찌보면 이 도입부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등장하는 말없이 나열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존 포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를 죽이고 소가 도난당하는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이상적인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형제들은 복수를 위해툼스톤에 들러 보안관이 되고 그들은 그 범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처럼 서부극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은 지속되지 못하는 존재로 나타나는데, 이미 붕괴되어 있거나 아니면 붕괴되어야 극이 진행된다. 와이어트가 죽어버린 동생 무덤에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너희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슬픔을 남긴다. 약자들이 희생되거나 위험에 처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재건하거나 지키기 위해서 다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존 포드의 시선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 알 수 있다.

[황야의 결투]는 미리 그 범인을 설정해놓고 어떻게 형제들이 툼스톤이라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천천히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툼스톤이라는 마을에 끼어든 와이어트는 세 명의 사람과 얽히게 된다. 하나는 존 할러데이라고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온 의사, 클레멘타인이라고 존을 사랑하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여자, 치와와라고 존의 애인을 자처하지만 댄서로 천대받는 멕시코 여인. 재미있게도 이 셋 모두 인간 관계에 실패했거나 (존과 클레멘타인) 사회에서 낙오된 존재 (존과 치와와)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존은 동부에서 쫓겨나듯이 서부에서 술과 도박으로 자신의 생을 망치고 있고, 치와와는 처음부터 손가락질 받고 존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클레멘타인은 동부로 대표되는 법과 질서를 대표되지만 존과 치와와에게 냉담한 반응을 받고 쓸쓸하게 호텔 근방을 배회한다.

재미있는 시퀀스가 하나 있다. 와이어트가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으로 나가는 툼스톤 사람들을 지켜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의 미장센은 간결하면서도 멋있게 구성되어 있다. 존 포드는 와이어트를 호텔 바깥 대기장소에 배치시키는데 이때 프레임은 호텔 건물 대기장소와 도로를 분리시켜놓는다. 와이어트는 그늘이 진 프레임 안쪽에서 빛이 비추는 바깥쪽의 사람들의 흐름을 관망한다. 이 구도야말로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가 극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가 결국엔 이 툼스톤에 섞이진 못할것을 분명하게 한다. 그가 클레멘타인에게 끌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클레멘타인은 외부인이며 툼스톤의 일원인 존과 치와와에게 냉담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클레멘타인은 교사라는 직업으로 동부의 문명을 대변한다. 마을 무도회장을 방문한 와이어트가 어색하게 구경하다가 클레멘타인과 얽혀 춤을 추는 장면에서 우리는 외부인 둘이 잠시나마 공동체에 속해 안정을 누리는걸 발견한다.

그렇기에 치와와가 죽어갈때 등장하는 와이어트의 컷 하나는 매우 인상적이다. 작중에서 치와와는 존과 와이어트와 악연으로 얽혀있는 클랜튼 가족 손에 죽는다. 정확히는 클랜튼 가족이 존에게 쏘려고 했던게 치와와가 총을 맞는다고 할까. 밑바닥을 전전하면서도 존에 대한 애정을 갈구했던 치와와는 클레멘타인의 도움을 받아 존이 집도를 하지만 결국 과다출혈으로 죽는다. 이때 이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지켜보는 와이어트의 표정은 어두운 조명과 어둠으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 표현주의의 영감을 받은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공동체의 평화를 해치는 클랜튼 가족에 대한 분노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자의 쓸쓸한 심정이 담겨있다. 존 포드는 이 단순해보이는 연출을 영화의 흐름에 안배되게 만들어서 잊을 수 없는 정념을 만들어낸다. 사실 [황야의 결투]는 생각보다 '자연' 풍경이 많이 등장하진 않는 서부극이다. (물론 가끔 등장할때마다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포드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던 방법을 실내로 옮겨와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낸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굵직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심상은 후일 아오야마 신지의 기타큐슈와 페드로 코스타의 리스본 빈민가의 정경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치와와-존-클레멘타인로 이어지는 이 사랑의 삼각관계와 가들이 치와와의 죽음 앞에서 하나로 봉합될때 우리는 영화의 끝이 존의 퇴장으로 끝날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클레멘타인이 동부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곳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남긴 상흔이 사람들은 실패한 채 방황하고 있는 동부의 지식인이였던 존은 서부의 생명력으로 대표되는 치와와가 죽으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어디 있는지 확신하게 되고 클레멘타인은 교사가 되어 툼스톤에 동화되어간다. 이때도 와이어트는 그들을 지켜보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어찌보면 존 포드는 이 구도를 통해 [황야의 무법자]에서 공동체가 단순히 고리타분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무언가라고 역설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와이어트는 형제 하나를 또 클랜튼 가족에게 잃고 [황야의 결투]를 감싸고 있는 숙명적인 분위기가 '결투'로 이어지게 한다. 이 결투 구도 자체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또다른 존 포드 서부극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와 같지만, 대결 구도에 약간 변칙이 가해진 [리버티 벨런스]랑 달리 [황야의 결투]는 온전히 무법자와 악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혼돈스러운 다수 대 다수라는 난파전으로 이어진다. 존 포드는 여기서 인물들의 동선을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진행시킨다. 흙먼지는 무법자와 악인을 감싸고 사람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총을 쏘면서 인물들의 시야를 가린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는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저지른 클랜튼 가의 가장과 대치했을때, 와이어트는 마침내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포드와 와이어트는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황야의 결투]의 결투 끝에는 피로함이 남는다. 흙먼지 속 싸운 사람들은 당연한 가치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지만 많은 것을 잃은 뒤다.


결국 결투는 또다시 상실로 끝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리를 하고 공동체를 떠나거나 남는다. 그리고 결말은 우리가 서부극을 떠올릴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다. 클레멘타인은 툼스톤에 남아 살아남은 와이어트 형제를 떠나보내는 이 장면은 서부극의 정경을 이야기할때 항상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실은 존 포드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제작자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사실 존 포드 자신은 절대로 작가라 생각하지 않고 시스템 하에 일하는 장인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작가라는 말을 매우 혐오했고 자신을 소처럼 일하는 장인이라 불러주길 원했다.) 제작자의 아이디어 정도는 쉽게 받아들였을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태그 갤러거 평론가가 지적했던대로 누군가가 개입한게 아닌, 처음부터 존 포드의 아이디어였던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페드로 코스타가 존 포드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을 인용해볼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광활한 대지, 웅장한 산맥의 풍경처럼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 거기에 있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 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에는 그런 단순한 것들의 가치가 담겨 있다.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다." 어찌보면 존 포드의 방식은 그런 제작자의 아이디어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를 녹일 줄 알았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타인의 아이디어마저도 존중되면서 존 포드의 인장이 확고하게 남는다. 그 점에서 [황야의 결투]는 다른 정파 서부극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편견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을 재고하는 영화다. 물론 무엇보다도 존 포드가 주창했던 것처럼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