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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giantroot2014. 5. 3. 13:4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The Grand Budapest Hotel 
8.1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토니 레볼로리, 시얼샤 로넌, 애드리언 브로디
정보
미스터리, 어드벤처 | 미국, 독일 | 100 분 | 2014-03-20

웨스 앤더슨이 인공적인 세계의 미학에 집착했다는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이르러서는 셀룰로이드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주에 다다른것 같다. 물론 제임스 카메론과 달리 그의 인공적인 우주는 철저히 과거지향적이다. 색감은 일부러 원색을 쓰고 있으며, 화면비는 심지어 카메라를 움직일때조차 그는 그 시대에 나왔던 영화들처럼 평면성을 깨트리는 카메라 움직임을 배격한다. 기본적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선은 정육면체 상자 속에 면 하나를 제거하고 인물들을 관찰하는 느낌이다.

이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에 대한 집착은 구스타프라는 캐릭터를 다루는데 매우 적합한 도구가 된다. 사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미학적 강박증은 구스타프 그 자체나 다름없다. 항상 젠체하며 시를 읇고 감옥에 있을때도 호텔 직원들에게 '예절'을 지키라는 편지를 보내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데, 이는 우리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강박적인 미장센을 보며 느끼는 감정하고 연결된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존재할것 같지 않는 완벽함이 유치한 강박증적인 고집을 통해 나오기에 우리는 완벽함에압도되지 않고 유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를 보며 어처구니 없어하는 초반부의 제로 무스타파는 곧 관객이 영화와 구스타프를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우스꽝스러움이 씁쓸함을 품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원래 웨스 앤더슨이 우스꽝스러움에 인간사의 어두컴컴한 감정과 행동들을 집어넣긴 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는 전작들과 달리 그 유치함이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변화의 지점이 감지된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 인물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정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지만 현재에서 행복감을 찾아냈으며, [문라이즈 킹덤]의 1960년대는 단절되지 않고 현재로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좌절과 비참한 감정을 겪지만 끝내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궁극적으로 영화적 현실에서 살아남은 자는 도입부와 끝에 잠깐 등장하는 '독자' 뿐이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도,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제로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구스타프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 잔인한 액자 구조야말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세계가 결국엔 셀룰로이드의 현실에서만 가능한 곳이 되었다는걸 상기시켜준다.

애거서 크리스티와 찰스 디킨슨, 코난 도일, 앨프래드 히치콕, 루니 툰즈 등의 영향을 받은 구스타프의 잔혹엉뚱한 모험담 역시 차라리 한 시대의 찬란함이 저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구스타프는 그 모험담 속에서 자신의 위신과 체통, 예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은 코미디로 흐르기도 하지만 때론 찡한 구석마저 보여준다. 사소한 예절 문제로 제로에 대한 비방을 가한 뒤 제로의 사정을 알고 사과하는 구스타프는 비록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하고는 어긋나긴 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동시에 서글픈 감정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구스타프 반대쪽에 있는 드미트리와 조플링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은 그 종말을 프레임에서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 종말의 순간 직전 흑백으로 색깔을 빼앗아버린다. 단순한 효과지만 예상외로 효과적인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세계가 원색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세계기 때문이다. 게다가 웨스 앤더슨은 구스타프 시절의 유치하고 강박적이지만 위엄을 잃지 않았던 호텔과, 낡고 쇠락해가는 1960년대 호텔을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구스타프는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는걸 암시한다. 그렇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래로 향했던 다른 웨스 앤더슨의 주인공들과 달리 그 시간에 박제된 채 끝난다. 남아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황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낡은 눈물 짓는 늙은 제로를 보며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에 빠질수 밖에 없다. 구스타프는 어찌되었든 험한 세상을 예절로 살아남고자 했던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주 과정에서도 죽은 집사를 위해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한병철의 언어를 잠깐 빌리자면) '머무름'이 조금이나마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대와 문화에 대한 애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