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이 장면이 재미있는게, 벤과 빌리 사이엔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의 긴장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빌리는 마치 벤을 기다리고 있는것처럼 숨어있고 반대로 벤은 빌리가 거기에 있을것이라고 예상한 것처럼 행동한다. 왜냐하면 빌리는 벤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순순히 끌려가는것처럼 보이던 빌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자신의 형인 프랭크 (후일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유명해지는 리 반 클리프가 이 역을 맡았다.) 에게 도움을 요청해 영화 전체의 서스펜스를 작동시킨다.
[외로이 달리다]는 그 점에서 공간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대립이 중요한 [선다운의 결전]이나 공간의 높낮이와 거리감이 중요한 시점의 차이로 작용했던 [투우사와 숙녀]와 달리, 공간과 공간 사이를 향하는 운동의 방향성이 중요한 영화다. 그리고 그 운동의 뱡향성 때문에 이 영화는 서부극이 안겨주는 풍경의 쾌감을 맛볼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황폐해진 풀들과 선인장 사이로 난 샛길, 사구 사이에 흔적만 남은 집터, 무성한 숲과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섬뜩한 나무 등. 이 모든 풍경들은 2.35:1 이라는 넓찍한 화면에 새겨진다.
이 사이를 헤쳐 지나가는 벤과 빌리의 여정은 도덕에 관한 여정이다. 영화 중반에 캐리는 나이가 어린 빌리를 왜 산타크루즈로 데려가 사형하려고 하는지를 벤에게 물어본다. 벤은 ‘어리지만 사람을 쏴 죽였기 때문에’ 그를 처벌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벤의 말보다 더 깊은 내적 논리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도덕의 여정이긴 하지만 그 도덕의 논리가 단순한 선악의 논리가 아닌, 복잡한 무언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왜 벤이 빌리를 미끼로 프랭크 일당을 유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벤이 프랭크 일당을 유인하는 이유는, 프랭크 일당이 벤의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단죄다. 그런데 프랭크 일당이 저지른 살인이 비겁한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걸 지적해야 되겠다. 프랭크 일당을 벤의 아내는 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습한 프랭크 일당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온다. 또한 영화 초반부에 빌리가 순순히 끌려가는 척하다가 프랭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 컷에서 우리는 이 일당들이 게임의 법칙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벤과는 대치되는 부도덕한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징벌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그려진다.
보티커는 벤과 빌리 사이에 샘 분과 위트, 캐리를 놓는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은 샘 분과 위트인데, 벤과 빌리는 이들을 회유 또는 유혹하는 형식으로 영화의 도덕추를 가지고 게임을 벌인다. 먼저 정착에 대한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 벤과 달리 이들은 정착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이지만 범죄를 저질렀기에 쉽사리 정착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들은 필요하다면 벤의 뒤통수를 치고 빌리를 데리고 도망갈 선택을 할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빌리는 샘과 위트에게 자신을 도망가게 해준다면, 이득을 얻게 해줄수 있게 하겠다고 이들을 유혹한다. 물론 그 유혹은 번번히 벤의 등장으로 좌절되지만 미국 원주민과의 대결이나 도주 과정 같은 인물들이 하나로 단결된 상황 사이에서도 틈틈히 등장해 긴장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인물들을 몰고 가게 한다.
그 와중에 캐리는 관찰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벤과 묘한 동질감을 형성한다. 캐리가 벤과 죽은 남편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캐리가 은연중에 자신의 남편을 겹쳐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캐리는 자신에게 매료되어 접근하는 샘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 이는 캐리의 이성적인 관심이 성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도덕이나 태도의 문제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더 넓게 보자면 벤의 '결투의 예절'이 개척자의 정신하고 맥이 닿아있지 않나, 라는 추론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다운의 결전]이 그랬던것처럼 [외로이 달리다]에서도 랜돌프 스콧의 캐릭터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자신의 법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 법칙을 고수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접근하는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편린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벤과 빌리로 대표되는 품위와 불의 사이에서 인물들이 갈등하는 동안, 보티커는 인물들을 말라붙어버린 나무로 인도한다. 이 말라붙은 나무의 존재감은 굉장한데, 훗날 구로사와 기요시의 [카리스마]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정서적인 에너지를 영화 속에 부여하고 있다. 벤이 왜 이 나무로 프랭크 일당들을 끌여들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그의 아내는 벤이 없는 사이에 프랭크 일당에게 잡혀 나무에 목이 매달렸다.) 밝혀지고, 벤은 프랭크 일당이 보는 앞에서 프랭크의 죄를 밝힌 후 빌리를 나무에 목을 매단다. 벤의 이런 행동은 선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에 대한 가차없는 징벌과 그 징벌이 프랭크 일당과 달리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선언. 이런 벤의 한결같은 ‘결투의 예의’는 [외로이 달리다]를 관통하고 있는 미학이기도 하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샘이 벤을 도와주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물론 그의 선택이 실리적인 이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가 샘을 도와준 뒤 하는 대사들을 보면 샘이 벤의 가치관에 대해 완전히 반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의 성질로 보자면 캐리가 벤에게 품는 감정하고 샘이 벤에게 품는 감정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착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방랑자지만 자신의 법칙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사람에게 매료된다는 [외로이 달리다]의 캐릭터의 발전상은 흥미로운데 결국 묵묵히 예절을 추구하는 자에 대한 매료가 주인공 벤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티커는 모든 것이 끝난 뒤 또 동선을 엇갈리게 배치한다. 벤은 산타 크루즈로 가지 않는다. 산타크루즈로 가는 일행들을 떠나보낸 후, 벤은 혼자서 문제의 나무를 불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행위는 분명 과거의 청산이라는 점과 무법자가 가지고 있는 ‘결투의 예절’이 사회엔 적용되기 힘들다는걸 씁쓸하게 반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다운의 결전]을 떠오르게 하지만 [선다운의 결전]은 죽은 자의 유언를 귀기울이고 적대자의 정정당당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공동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외로이 달리다]는 좀 더 단순한 행동인 '소멸'로 과거를 청산하고 공동체가 영화 속 피안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점에서 [외로이 달리다]는 매력적인 풍경 이미지와 단순한(듯 보여도 미묘한 구조를 띄고 있는) 선악이라는 점에서 [선다운의 결전]보다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쾌감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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