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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운의 결전 [Decision At Sundown] (1957)

giantroot2014. 4. 19. 00:23


선다운의 결전

Decision at Sun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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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버드 베티커
출연
랜돌프 스콧, 존 캐롤, 카렌 스틸, 밸러리 프렌치, 노아 비어리 주니어
정보
드라마, 서부 | 미국 | 77 분 | -

(이 리뷰는 2014년 4월 15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버드 보티커 특별전을 감상하고 쓴 리뷰입니다.)

[선다운의 결전]은 마부에게 선다운 쪽으로 가도록 협박하는 랜돌프 스콧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랜돌프 스콧가 맡은 버트는 바로 선다운에서 가지 않고 샘을 만나기 위해 갈림길에 내린다. 이 단순한 동선의 이탈은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내용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선다운의 결전]에서 인물들은 목적지로 바로 가지 못하고 그 길의 갈림길에서 번뇌하고 충돌하고 종종 엉뚱한 길로 빠지기 때문이다.

버트와 샘의 목적은 선다운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권력자 테이트 킴브로에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버드 보티커와 각본가 찰스 랭은 테이트를 향한 이 두 콤비의 저항을 경제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먼저 버트는 이발소에 들어와 돈을 내고 수염을 깎지 않는다. 이발사는 버트에게 '영업 시간이 끝났다'며 거부한다. 즉슨 버트와 샘은 '영업 시간'이라는 주민의 시간대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거부당한 버트는 스스로 수염을 깎으며 테이트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다.
이런 버트와 샘의 저항은 마을 술집에서 술을 사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권유를 버트와 샘이 거부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재천명된다. 버트는 테이트의 법칙을 지키라고 말하는 보안관에게 '내 돈은 내가 쓴다'라고 말하는데 테이트가 자신을 사랑하는 루비 대신 루시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버트와 샘의 거부 제스쳐은 마을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버트의 경제적인 저항은 테이트(북부 스타일의 자본가-권력자)와 버트 (텍사스 출신의 무법자) 각각의 캐릭터하고 맞물려 돌아간다. 이렇게 [선다운의 결전]은 과거를 뒤로 하고 루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인 부를 쟁취하려는 테이트와 과거를 상기시키려는 버트 간의 갈등 구조를 형성시킨다.

그런데 버트가 저항을 시작하는 방식은 상당히 특이하다. 보티커는 결혼식이 이뤄지는 교회에서 이 저항을 발생시키면서 버트와 테이트를 공간 양 끝에 배치시키면서 서부극의 전통적인 대결 구도를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누가 총을 꺼내들어 쏴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에서 보티커는 그러나, 총을 쏘지 않는다. 오히려 버트는 자신이 왜 선다운에 왔는지를 마을 사람들과 테이트에게 설명하게 하고 도망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샘처럼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뒤에서 쏘질 않았는데?"

이 질문이야말로 [선다운의 결전]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라이트모티브가 된다. 버드 보티커의 영화에서는 '왜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혹은 그렇게 하는가?'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선다운의 결전]에서는 '왜 버트는 테이트를 곧바로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는다. 버트와 샘이 테이트를 죽이지 못하고 마굿간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잠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동안 선다운의 주민들은 버트가 던진 '결투에 대한 예의'가 파장을 일으키는 걸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장은 원래 선다운에 살던 인물들이 가려고 했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쪽으로 탈선하거나 관계 자체를 뒤집어 엎는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루시와 루비의 심경 변화다. 영화가 시작했을때 우리는 루비가 테이트를 사랑하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루시는 테이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결혼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버트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루시는 결혼식에 참여한 루비와 테이트의 비밀에 실망하게 된다. 그렇기에 루시는 직접 버트를 찾아가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되려 버트가 들려주는 테이트에 대한 진실에 마음이 흔들리며 테이트를 떠나게 된다. 반대로 루비는 극이 진행될수록 사그라들었던 테이트에 대한 감정이 불타오르면서 마지막엔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둘의 이름이 돌림자로 되어 있다는 건 여러모로 각본가 찰스 랭이 노린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트의 정정당당한 저항의 선언은 루시와 루비만 바꿔놓는게 아니다. 영화는 버트와 테이트 사이에 의사인 존을 놓고 관찰자의 시선을 부여한다. 존은 버트의 '정정당당한 선전포고'에 감명을 받고 테이트에게서 벗어나 버트의 편을 들게 된다. 그리고 존은 테이트의 권력에 취해있던 마을 사람들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으며 변혁을 일으키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의사라는 직업에서 유추해보면 존은 어찌보면 불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품고 있었지만, 행동 의지가 없었던 지식인이 영웅에게 감화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개개인이 변하면서 동시에 선다운이라는 공동체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현실주의자인 오티스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이제 테이트의 권력 기관에 (지주 찰스와 보안관 스웨이드) 대해 조롱과 비판을 퍼부으며 테이트의 기반을 파괴하며 버트를 돕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테이트의 권력 기관를 담당하고 있는 캐릭터들을 묘사할땐 이들을 찌질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지주인 찰스는 겁많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난 아무것도 못하겠다'라고 선언해버리고, 스웨이드는 "너 원래 목장 일꾼이였는데 권력 얻더니 나댄다"라는 주민의 폭로로 서사 속에서 권위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선다운의 결전]은 이런 공동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도 탁월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테이트와 버트의 관계는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권력에 취한 속물적이고 조금 부도덕한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테이트는 관객 입장에서 그렇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외려 신사적이고 깔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버트가 주장하는 테이트의 "악업"도 객관적으로 보면 도덕적으로는 비판받을수는 있어도 엄청난 하자가 있는 잘못은 아니다. (어째 이 '회색 영역에 걸쳐진 개인의 잘못'라는 부분은 아시가르 파라하디의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를 연상케 한다.)

이 때문에 버트의 '결투에 대한 예의'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버트는 분명 결투의 정정당당함을 추구하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동시에 아집과 과거의 상처에 대한 분노로 사로잡혀있는 캐릭터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버트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이 복잡함이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부분이라면 샘이 농성 도중 마굿간을 나왔다가 죽는 부분일 것이다. 이 죽음을 통해 버트의 복수심은 극에 치닫게 되고 나아가 테이트가 결투에 나서게 되는 간접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샘의 죽음이 식욕를 참지 못했다가 발생했다는게 의미심장하다. 일견 샘의 죽음은 코믹 릴리프적인 캐릭터가 엉뚱한 이유로 허망하게 죽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샘은 영화 내내 역설적으로 버트의 어두운 일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샘은 버트의 과거를 알고 있으며 왜 그렇게 복수에 집착하는지를 간파하고 있다. 영화 중반부터 샘은 버트를 진상을 알리며 복수를 포기하게 만드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한다. '농성장'이라는 안의 공간에서, 버트의 자기 논리는 확고하고 안전도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버트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인채 복수도 하지 못한채 고착되어 있다. 샘은 이 상황에 대해 짜증을 낸다. 제때 복수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데에서 뭐하는거냐며.

결국 샘은 스스로 '농성장'이라는 안의 공간에서 '거리'라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밖의 공간으로 나오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테이트가 지배하는 '거리'의 법칙 (불의와 비겁함이 지배하는)은 무방비 상태인 샘을 잡아먹어버린다. 이때 주목할만한 장면이 있다. 샘이 뒤에서 총을 맞고 바퀴살에 손을 낀 채 쓰러져 죽는 장면이 있다. 바퀴가 가지고 있는 순환하는, 원형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희생이 무절제한 증오와 복수가 끊을 단초가 된다는 암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이 샘이라는 캐릭터는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 등장했던 약장수 윌리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의 어두운 성향을 저지함과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제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샘의 죽음은 동시에 마을 주민들이 테이트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주민들은 스웨이드를 방해한 뒤 테이트에게 당신의 권력은 종말을 맞이했으며 이제부터는 우리가 마을의 질서를 찾겠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보티커는 테이트를 찌질스럽게 망가트리지 않는다. 오히려 테이트는 당당하게 마을 주민들에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권력을 되찾을 것이다, 너희들은 다시 내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초반에 복수를 선언한 버트를 무시하고 결혼식에 집중하려고 했던 테이트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극이 진행될수록 테이트 캐릭터가 품위 있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저 대사를 버트가 제안한 '결투의 윤리'을 받아들이겠다는 테이트의 선언으로 봐도 될까?라는 의문이 들 쯤, 보티커는 테이트가 결투 복장을 입는 장면으로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다. 눈치가 빠른 관객들이라면 이 장면이 버트의 행동하고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결투를 받아들이고 준비한다는 것. [투우사와 숙녀]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보티커는 이런 행위에 대해 매료되어 있으며, 그것이 남자를 품위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결투장에 나올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된 자만이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법칙을 무시하고 '뒤에서 총을 쏘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비겁한 짓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버드 보티커의 서부극은 총알이 함부로 나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 전의 준비 단계가 선행되고 나서야 총이 등장한다. 그 논리에는 성차도 존재하지 않기에 총의 논리에서 배제당해왔던 여성이 총을 들고 쏘는 경우도 등장한다. 페미니즘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티커 서부극에서 여성은 남성만큼이나 강인하고 행동력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선다운의 결전] 클라이맥스에서 결투가 벌어지기 직전 총을 쏘는 사람은 남성 주인공들이 아닌, 연인이 죽는걸 원하지 않는 루비다.

테이트에게 결투에 나서지 말라고 간청하며 총을 쏘는 루비의 논리는 진상을 알려 버트를 설득하려고 핶던 샘과 존의 논리하고도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죽음으로 단죄하기 보다는, 진상을 깨닫고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라고 있다. 보티커는 버트의 복수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지적한 뒤, 폭력을 중지한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누군가가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서부극의 논리에서 설득과 품위의 미덕을 설파한다는 점에서 이 클라이맥스는 분명 인상적이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복잡한 감정으로 차 있다. 테이트는 루비와 함께 선다운을 떠났지만 버트는 행복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테이트를 몰아낸 영웅이라 칭송하며 술을 권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제때 말렸다면 샘은 죽지 않았을것이다'라고 쏘아붙이고 마을을 떠난다. 이 결말에서 우리는 보티커의 무법자들이 공동체를 떠나는 이유를 발견 할 수 있다. [투우사와 숙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티커가 보기엔 '결투의 윤리'이란 공동체에서 양립하기 어렵다. 정확히는 집단 심리가 '결투의 윤리'(와 설득의 미학)을 방해하는 '비겁한 행동'을 용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선다운이라는 공동체가 정경유착을 비롯한 무능한 보안관의 횡포를 몰아내고 버트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놨다는 점에서, 감독과 작가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힘도 어느정도 긍정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시간이 다니면 언제 다시 '비겁한 행동'을 용인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보티커의 무법자들은 공동체의 문제점을 지적할수는 있어도 그 공동체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런 공동체에 대한 인식은 행복한 공동체에 폭력에 물든 자신이 머물 곳이 없다는걸 발견하고 떠나는 존 포드의 [수색자]나 공동체 자체가 부재하거나 (텅 빈 마을) 부정되고 파괴되어가는 과정 (닥 토빈의 갱단)을 다룬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독자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비슷하게 '불의에 저항하는 개인을 외면하는 공동체'라면 존 포드의 다른 걸작 [역마차] 같은 예도 있지만 이 영화도 궁극적으로 '결투의 윤리'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그렇기에 [선다운의 결전]은 보티커 특유의 '결투의 윤리'을 통해 공동체의 집단 심리와 윤리를 파헤치고 나아가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서부극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