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에 이어 우리는 실제 투우사들의 크레딧과 함께 투우장에서 투우를 보는 미국에서 온 주인공 조니 일행들을 소개받는다. 그런데 조니 일행이 앉아있는 곳은 가장 높은 층이다. 높은 곳에 앉은 그들은 투우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데, 이 투우하는 곳과 관객석 간의 공간적 거리감은 조니 일행이 멕시코 투우계에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입문을 시작한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 관찰이라는 행위가관객이 앞으로 경험할 영화적 스펙타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니가 식당에서 마놀로 일행을 만나는 부분도 그런 거리감이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마놀로가 조니 일행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감은 여기서 식탁과 식탁 사이의 거리감으로 축소되어 그들이 인식을 할 수 있는 정도로 된다. 그렇게 조니와 마놀로가 서로를 알게 되고 조니는 투우를 가르쳐달라고 마놀로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마놀로가 투우를 가르쳐주는 대신 내건 조건이라는게 ‘사격’ 훈련이라는게 인상 깊다. 멀리서 대상을 쓰러트리는 사격과 달리 근거리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투우하고는 정 반대의 운동인 것이다. 마놀로가 은퇴 이후 사격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여러모로 사격이라는 운동이 마놀로의 세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조니는 마놀로를 통해 원거리의 세계에서 근거리의 세계, ‘결투의 예의’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윽고 조니가 투우사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카메라는 서서히 그 위치를 바꿔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보티커는 조니가 견습 투우사로 활동할때부터 ‘소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그전까지 투우가 멀찍한 거리를 두고 찍혀졌다면, 조니가 투우사에 입문한 이후 보티커는 카메라를 운동장으로 끌어내리고 투우를 연습하는 투우사들과 소들을 맴돌며 종종 조니를 향해 오는 소의 시선을 1인칭 카메라로 재현해 찍는다. 어느 정도 세미 다큐멘터리를 의식한 연출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연출엔 양식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소와 투우사의 실제 시선에 밀착하고자 하는 보티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조니가 어느 정도 투우사 세계에 익숙해졌을 무렵, 보티커는 왜 조니가 ‘투우’에 매료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투우사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왜 사람들이 투우에 빠지는 건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존재는 분명 보티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캐릭터다. 투우사에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보티커와 각본가들은 ‘왜’ 조니와 마놀로, 그리고 투우사 동료들이 투우라는 행위에 매료되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해도 거기에 매달리는지 궁금해한다.
다시 시점의 문제로 돌아가야 되겠다. 보티커는 그것이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결투의 예의’에 대한 문제라고 보고 있다. 투우는 뒤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정정당당히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소와 대결한다. (이때 보티커는 언급했듯이 카메라를 1인칭 시점에 위치시켜 앞으로 돌진시키면서 투우사는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자신이 알고 있는 법칙으로 대응한다. 이것이 투우의 법칙이고, 보티커가 생각하는 결투의 법칙인 것이다. 이는 매사를 대처하는 문제로도 발전하는데 마놀로가 손을 다치고도 ‘관중석’에서 모욕을 가하는 관객의 도발에 응해 경기장에서 한 손으로 투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마놀로의 부인인 첼로가 관객에게 장면에서는 어떤 멋이 있다. 영화에서 그것을 ‘품위’라고 부르고 나는 조지훈 선생의 말을 빌어 ‘지조’라고 부르고 싶다.
이 ‘품위’ 혹은 ‘지조’야말로 보티커가 이후 만든 서부극에서 은연중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어떤 정신 상태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 품위나 지조가 가장 우선시 되며 비겁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해로 안토니오의 품위를 실수로 깎아내린 조니는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오해를 한 것에 대해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것, 그런 예절 정신이 보티커 영화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투우사와 숙녀]는 그 지조있는 예절 정신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영화다.
다시 조니로 돌아가면, 초반에 그는 소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실수하기 일쑤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조니는 멕시코인 소년이 말하듯이, 실제 소는 인간처럼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는걸 깨닫고 두려워하지 말고 품위있게 대처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영화 중후반부에 이르면 조니는 그 법칙에 대해 어느정도 체화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식으로 투우사로 데뷔하는 날,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해 투우사의 법칙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조니의 실수는 결국 참담한 실패로 이어지고, 끝내 마놀로를 죽게 한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조니는 묵묵히 있다가 다시 그 소에게 도전을 하겠다고 한다. 이때 조니를 좋아하게 된 아니타는 그냥 멕시코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애청한다. 하지만 조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놀로가 물려준 투우사, 나아가 결투의 법칙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참한 죽음과 그럼에도 투우에 몰입하는 투우사들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조니는 이제 자신을 노리고 있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투우사가 경기장에 나가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지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진지하고 치열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목숨을 건 대결에서 조니는 살아남는다. 그런 자신에게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승리는 내 것이 아니라 마놀로 에스트라다의 것이다. ’ 그리고 조니는 은퇴한다. 조니는 왜 자신의 승리를 마놀로에게 돌리고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영화가 큰 서사와 무관하게 멕시코인의 문화와 감수성을 소개하는 컷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 중 하나에서 아니타는 조니에게 ‘우리 멕시코인들은 그것을 품위라고 부르죠’라고 한다. 이 장면을 통해 보티커는 ‘결투의 품위’가 조니의 미국 문화에서 온 게 아닌, 마놀로와 아니타의 멕시코 문화에서 왔다는 걸 분명하게 한다.
그렇기에 조니는 자신의 몸에 강력하게 머물러있으며 영광으로 이끈 그 ‘결투의 법칙’이 자신이 아닌 죽은 마놀로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그 공을 가로챈다면 마놀로 부부와 다른 투우사 동료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기 대신 마놀로를 기억하고자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경기장 밖으로 나온 조니 앞엔 아니타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투우사 석상을 보여주며 끝난다. 보티커는 이 결말을 통해 타자의 문화에 공을 돌리는 조니가 마침내 자신만의 투우사의 정신을 완성시켰다는 걸 보여준다.
‘결투의 법칙’이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낳았다는 점에서 [투우사와 숙녀]는 상당히 인상적인 문화상대주의를 영화 내에서 실천하고 있다. 또 이 문화상대주의는 당시 헐리우드 영화가 추구했던 강력한 허구적인 디제시스의 틀마저 뛰어넘는 절실한 감정적인 파괴력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특히 마놀로가 죽어 누워있고 조니가 그를 애도하는 장면이라던가 결말 부분의 조니의 선언은 울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런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힘은 보티커 감독의 사적인 경험과 거기서 비롯된 경외감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싶다. 정말로 투우사가 되고 싶어했고 훗날 친했던 투우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바쳤던 보티커는 자신이 정말로 무언가에 매료되었던 정신과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타자와 타자의 문화를 [투우사와 숙녀]를 통해 살려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투우사와 숙녀]는 보티커 서부극의 총화인 [외로이 달리다]와 함께 버드 보티커의 대표작으로 손꼽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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