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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giantroot2014. 4. 2. 10:32



노예 12년 (2014)

12 Years a Slave 
8.1
감독
스티브 맥퀸
출연
치에텔 에지오포, 마이클 패스벤더, 베네딕트 컴버배치, 브래드 피트, 루피타 니용고
정보
드라마 | 미국 | 134 분 |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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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의 시작은 18세기 미국 남부 흑인 노예가 겪었어야 했던 삶의 일부를 몽타주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에는 중심 인물이 등장하지만 캐릭터 설명이 부재하기에 우리는 이 인물이 영화의 주인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그 노예가 편지를 쓰다가 구겨버렸을때 [노예 12년]은 타이틀을 띄운다. 당시 흑인 노예들이 문맹이였던걸 생각해봤을때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그 점이 빈번하게 다뤄진다.) 이 캐릭터가 편지를 쓰다가 구겨버리는 행위가 단순한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 캐릭터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는 것 알 수 있다.


그에 답하듯이 영화는 타이틀이 지나간 이후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 솔로몬 노섭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솔로몬 노섭은 노섭을 모르는 관객의 기대(?)와 달리 중산층인 캐릭터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앞에서 몽타쥬로 보여줬던 노예들의 삶을 어떤 관찰자의 시각으로 보겠노라고 선언하는듯 하다. (실제로 노예 12년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회고적인 성격이 강할수 밖에 없다.) [노예 12년]은 그렇게 몇가지 과정을 거쳐 인문학자가 타자 (원주민)의 영토에 들어서는 것처럼 솔로몬을 남부 노예의 세계로 보낸다.


솔로몬이 겪는 첫번째 관례는 육체적인 것이다. 그는 지식인답게 노예주에게 말로 자신의 상황을 해명하지만 그는 채찍을 들어 팬다. 여기서 솔로몬은 자신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육체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통감하게 된다. 그리고 솔로몬에게는 새로운 옷 ("노예에게 어울리는 옷"이라고 말한다.)과 새 이름 플랫이 주어진다. 이 통과의례를 통해 맥퀸은 솔로몬의 육체에 가해지는 노예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이 점은 [망념의 잠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이름과 정체성, 권력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물론 제대로 따지면 이 쪽이 먼저지만. 


[노예 12년]을 지배하는 미국 남부의 세계는 육체적인 공간이며 솔로몬 캐릭터의 변화도 육체와 매우 밀접하게 진행이 된다. 그 중에서 맥퀸이 가장 공들여서 묘사한 장면이라면 백인 감독을 혼냈다가 교수형에 당할뻔하다가 감독관이 '재산관리'라는 명목하에 그들을 쫓아낸 뒤, 교수형 자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게 되는 시퀀스일것이다. 여기서 맥퀸은 일부러 시간 흐름을 늦추며 풀 샷으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솔로몬=플랫이 펼치는 액션과 무심히 자기 할일만 하는 노예들과 백인들을 뒷 배경에 배치시킨다. 잔인할정도로 고통받지만 어느 누구도 죽이지도 관심을 주지도 않는 제물이라는 점에서 맥퀸이 아감벤이 주창한 호모 사케르 개념을 육체의 고통과 결부해서 만든 장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호모 사케르적인 사건을 경험한 솔로몬은 노예의 생존전략을 체득하고 더욱더 영민하게 굴기 시작한다.


플랫이 에드윈으로 넘어왔을때 도입부를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는 점도 흥미롭다. 포드에게 속해있을때 솔로몬=플랫은 솔로몬으로써 정체성을 강하게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예전에 속해있었던 지식인적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급했던 교수형 시퀀스 이후론 솔로몬은 자신이 플랫으로써 부여받은 노예의 숙명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후로 플랫은 솔로몬으로써 가치를 포기하고 숨죽이며 육체 위주의 생존전략을 다시 짠다. 그가 에드윈에게 "무식한 깜둥이가 어떻게 글을 쓰냐"고 항변하는 장면은 그런 플랫으로써 생존전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도입부가 다시 등장했을때 관객은 플랫으로 대표되는 육체의 언어로 살아남아야 하지만 지식의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솔로몬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플랫이 채찍에 맞아 갈라진 등짝을 드러낼때 우리는 숨죽여 그에게 폭력을 가한 노예제의 잔학함을 목도할 수 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인물을 판단하는 가치도 어느 정도 육체적인 것에 맞춰져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솔로몬의 두 주인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먼저 솔로몬의 첫번째 주인인 포드는 그다지 육체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는 지식인이며 노예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이 포드를 재평가의 가치조차 없는 위선자로 묘사한다. 영화는 포드가 노예들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디제시스 안팎으로 음향을 삽입해 (노예들의 노랫소리, 혹은 울음) 기도를 방해한다. 그 악의적인 묘사의 절정은 여자 노예가 울면서 기도를 방해하자 포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 노예를 팔아버리는 장면이다.


반대로 두번째 주인인 에드윈 엡스는 맨날 폭력을 휘두르며 여성 노예를 강간하는 잔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는 엡스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에드윈은 한치의 여지도 없는 잔혹한 노예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기에 푹 빠진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그들을 못살게 군다. 술 마시고 노예들을 깨워 자기 흥을 돋구게 하는 부분이라던가 엡스 부인이 빚 때문에 팔려오다시피 결혼해 부부 생활에 별로 애정이 없다는 점, 팻시 말고도 에드윈의 노예 첩이 한가득 있었다는 점에서 에드윈은 엡스 부인으로 대표되는 백인 중심의 경제 관계에 염증을 내며 노예의 육체성에 매료된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에드윈을 욕하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어둠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영화의 두번째 폭력은 이 에드윈과 솔로몬, 팻시 간에 일어나는건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폭력은 영화의 또다른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먼저 이 폭력의 시작이 팻시가 몸을 씻지 못해서 비누를 얻어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게 의미심장하다. 강간당할때조차 반항하지 못하던 순종적인 팻시가 에드윈이 화를 내자 되려 폭발해 이유를 설명하며 화를 내는건 확실히 평소의 상궤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팻시가 청결을 의미하는 비누를 요구한다는 점은 분명 최소한의 문명적인 대접을 누리고자 하는 당연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에드윈은 그 점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폭력을 휘두른다. 


에드윈은 왜 팻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가? 단순히 버르장머리 없는 팻시를 벌을 주려고? 물론 중요한 이유이긴 하다. 하지만 이 폭력은 노예들에 대한 잔혹한 장난에 가까웠던 이전 학대 장면들과 달리, 자제심을 잃은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먼저 그 폭력을 옆에서 부추기는게 엡스 부인이라는걸 지적하고 싶다. 에드윈이 아무리 헌신짝처럼 대한다고 하더라도 아내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건 자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내 앞에서 미국 남부의 가부장의 경제적인 지위를 확고하게 해야 하며 나아가 자신이 매력을 느꼈던 노예의 육체를 관리통제할줄 아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장면이 무섭다면 망가진 정신이 욕망하는 육체를 파괴하는 그런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게 한다는 점인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플랫이 솔로몬의 정체성을 회복해 돌아갔을때 팻시의 울부짖음은 처절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로몬이야 원래 있던 세계에서 돌아갈 수 있는 출구가 있지만, 팻시는 그 끔찍한 체제 속에서 망가져가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솔로몬에게도 12년이라는 잃어버린 세월은 쉽게 되돌릴수 없다. 그 점에서 [노예 12년]은 인간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을 통해 인간의 육체를 경제적 가치와 도구로 삼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육체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무게와 그것이 어떤 사회적인 맥락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P.S. 그렇다고 해도 브래드 피트의 배스는 기계 장치의 신이여서 깼다. 실화라 해도 피트는 스타의 아우라가 강한 편인데, 조절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