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Fly/비문학

김수영 전집 2: 산문 (2003)

giantroot2014. 4. 10. 22:40


김수영 전집 2(산문)

저자
김수영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3-06-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초판 출간 이후에 발굴된 작품들을 다수 수록하였다. 이글들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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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세상에 불온한 사랑의 장도리를 던져라


[김수영 전집] 2권은 그가 그동안 써왔던 산문을 하나로 묶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산문들은 '거대한 뿌리'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풀' 같은 시들 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그의 사상이 제대로 드러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전집이라는 타이틀 답게 이 책은 시론, 문화 비평부터 시작해 소소한 일상들을 다룬 수필까지 제법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우선 이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지금까지 한국 문학계에서 김수영을 읽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강신주 정도를 제외하면 김수영은 저항시, 참여시의 대부로 여겨져 왔다. 물론 그런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김수영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수영에 대한 논의 대부분이 이 '저항' 자체에 맞춰져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김수영의 '참여'라는 것은 차라리 근본적인 미적인 태도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옮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식민지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비트 세대에 도달한 경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비트 세대를 설명하자면 195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유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미국 중산층의 허식을 비웃으며 그 뒤에 감춰진 "지저분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것"들을 복원하려는 문학적인 시도였다. (직접적인 선조로는 월트 휘트먼을 자주 든다.) 당시엔 금기시된 묘사와 비속어 사용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앨런 긴즈버그의 장시 '울부짖음'과 여행기의 형태를 빌어 끝없는 방탕 속에서 젊음을 구가하는 사람들과 길의 생명력을 발견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s'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로 손꼽힌다.

산문 전집에 실린 김수영의 '멋'을 읽어보면 김수영은 비트 문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자꾸 높아지는 고층 건물 아래를 지나다니는 신사숙녀의 자태가 현미경적으로 작아지는 어제오늘, 설사 여봐라는 듯이 공을 들여 몸단장을 하고 멋을 내보았대야 그것은 나병균처럼 없다. 이런, 없는 나병균을 나병균이라고 의식하면서 쾌감이 아닌 혐오감을 자아내게 하기 위해서 꺼먼 눈언저리의 도랑이나 핏기 없는 하얀 볼의 화장을 했다면 조금은 멋이 있다. 비트의 미학. (…) 비트의 미학은 나병균의 미학일 뿐만 아니라 현미경에 거역하는 미학이며, 개성을 말살한 미학이며, 획일주의에 항거하는 미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획일주의에 항거하고 있는 나병균의 미학이야말로 김수영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이어령과의 논쟁을 비롯해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 ―시인과 현실", "대중의 시와 국민가요", "시의 뉴 프런티어" 같은 글에서 그는 "유치하고 단순해질" 자유를 원하면서 왜 한국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해방 직후의 혼돈이 가장 자유로웠다"가 말하는 김수영에게 자유는 단순한 현 체제에 대한 저항 뿐만이 아니라 더욱더 깊숙한 정신적이고 생활에 대한 것을 노리고 있다. 이는 굳어있는 정신에 대한 저항이며, 지금까지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저항이다. 그는 비트에서 시작해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정치적 저항주의를 거쳐 자신만의 '자유론'을 완성하고자 한다.

보통 작가의 생애를 작품이나 비평에 결부시키는 것은 비판받기 십상이지만 김수영의 사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몇가지 개인사를 알아야 적어야 할 것 같다. 먼저 그의 삶에서 6.25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인민군으로 징집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아비규환을 겪어야 했고 (인민군 군복을 찾기 위해 산을 하루종일 뒤졌다던가,  사형 당하기 직전 시체 더미에서 숨었다가 살아남았다던가, 포로 수용실 화장실에 갔더니 토막난 시체를 발견했다던가, 이를 스스로 뽑았던가) 간신히 살아남았을때 아내는 다른 남자랑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물론 김수영의 생사가 불명이였기에 아내도 어쩔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였다는건 김수영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혼하고자 찾아온 아내를 강제로 이끌어 같이 살았다는게 무척이나 의외의 선택이였다. 어찌보면 김수영 입장에서는 아내의 배반은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재결합이 순탄하게는 가지 않았다. 김수영은 술에 취할때마다 아내와 가족들을 폭행하고 구박했으며 술과 생활고에 쩔어 신경질적인 태도로 보였다.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 김수영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일부라 생각했다.

김수영의 위대함은 그런 파괴되고 일그러진 자아와 개인사를 그대로 글 속에 치열하게 투영시키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사랑'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김수영이 써내린 일그러짐 속에서 우리 자신의 편린들을 찾아낼수 있으며 그의 단점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 깨우치게 되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점에서 김수영의 글 쓰는 방식은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자신이 겪었던 무절제하고 난잡한 섹스와 일탈, 방랑, 인간적인 단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병균처럼, 흉하고 더러운 언어와 사건들이 그의 글에서는 어떤 가식도 치장도 없이 쓰여져 있었고 그 문장들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빛나고 있다.

어찌보면 김수영은 비트 제네레이션을 스스로 뛰어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트 제네레이션는 그렇게 자신이 반발하는 사회에 대한 혁명은 이루지 못하고 몇몇은 동양 신비주의에 겉핧기로 빠졌거나 주화입마에 빠져 의미없는 무절제 그 자체에 스스로 빠져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고 살아남은 대부분은 히피 운동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히피 세대 대부분은 끝내 유토피아의 상상에 갇혀 끝났다. 김수영은 6.25 전쟁과 4.19 혁명을 보면서 부조리한 세상과 그것을 바꾸자 하는 혁명이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유토피아적인 상상이 허무한 것을 간파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비트의 병균적인 사랑 미학이 단순히 개인의 방종에 끝나지 않고 부조리한 사회 자체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가 이어령과 박인환을 비판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흉하고 더러운 언어를 예단하고 포장하려는 술수를 부렸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가 비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비트의 흉내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런데 대부분의 비트의 아류들은, 화장의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화장의 태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힙스터적인 글쓰기를 견지했던 박인환은 가루가 되도록 까일수 밖에 없었고,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논지를 전개해나간 이어령은 글을 오독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해버린다. 그의 몸 속에 스며든 비트의 미학은 단순히 정치로만 한정되지 않는 어떤 사랑에 대한 믿음과 선비적인 지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부분에서 당대의 인식에 갖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국어보다 일본어와 영어에 익숙한 언어적 정체성, 자신을 유교적인 가치관에 못 벗어난 인간이라는 걸 자조하는 부분이라던가,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를 진정한 혁명의 이상으로 칭찬했다는 점 (당연히 카스트로의 쿠바는 김수영의 이상과 달리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중이다.)등 꼽으라면 무수히 나올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한계를 숨기려 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글 내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그렇기에 김수영의 글은 김수영 인간 자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된다. 오장환의 '병든 서울'에서 잠시 느껴졌던 그런 해방감과 희열감이 그가 담뱃갑에 써내려갔던 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편]은 지금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수영이 꿈꿨던 사랑의 이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의 이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