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Fly/비문학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

giantroot2014. 6. 17. 22:42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발터 벤야민 선집 6)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길(도) | 2008-06-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벤야민의 초기 사상을 주도한 언어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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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는 예술자의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왜 벤야민은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할까? 이에 벤야민은 예술이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벤야민은 예술이 인간의 주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보면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시에서 본질적은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라는 시에 대한 벤야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듯이 벤야민은 예술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라고 보고, 이런 생각은 곧 지금 예술을 번역하는 일이 비본질적인 것만을 전달한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이 보기에 번역은 일종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작으로 돌아가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하나는 그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수 있는가와 작품은 그 본질에 따라 볼 때 번역을 허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그 번역이 요구하기도 하는지라는 물음이다. 이에 벤야민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에 표출되며 단순한 의미의 번역이 아닌, 원작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다. 이 미지의 가능성을 ‘신의 기억’이라고 벤야민은 정의하는데, 이는 후에 서술한 번역이 종교적인 열망과 닮아있다는 점하고 일맥상한다. 비록 언어적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이 불가능하다 해도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분리하는 가운데 특정 언어적 형상물들에 대한 번역’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벤야민은 긍정하면서 원작들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번역 가능성으로 표출되며, 그것이야말로 작품의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사유에서의 특정한 상관 개념은 인간에게만 관련되지 않으면 최상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여기서 벤야민이 가지고 있는 예술관과 번역관에 대한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즉슨 벤야민이 생각하는 사유와 그것의 특정한 상관 관계는 인간과 관련이 있지 않을 때야 그 진가가 온전히 드러나며 그것들을 번역을 한다고 해도 굳이 인간과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동요하는 본성인 영혼의 통치나동물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역사적인 것으로 삶의 영역을 규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규정이야말로 더 철학이 모든 자연적 삶을 역사의 보다 더 포괄적인 삶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역사가 그 혈통을 원천으로부터 알고 형상화를 예술가의 시대에서, 영원한 사후의 삶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삶의 영역을 규정하는 삶의 언표라는게 살아있는 자에게 무언가 의미하는게 없어도 살아있는 자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왔다고 정리하면서 “당대에 발굴되지 못한 가능성”이 후대에 발굴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개는 독특하고 고귀한 삶의 전개로서 어떤 독특하고 고귀한 합목적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과 합목적성은 겉보기엔 다를지 몰라도 보다 상위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곳에서만 해명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 상위의 영역이란 삶을 위해 합목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의 표현, 그 삶의 의미의 재현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다. 삶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재현’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에서 ‘재현’에 방점을 찍으며, 삶과는 다른 유니크한 특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번역은 이렇게 숨겨진 관계를 드러낼수 없지만 재현은 할 수 있으며 그 관계를 맹아로서 또는 집약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재현을 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사유한 언어들 사이에 있는 독특한 수렴 관계, 즉 근친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벤야민은 번역들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며 전통적 번역 이론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벤야민은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와 인식비판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 인식 비판에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모사에 대해 부정하며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추구한다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 과정을 겪는데, 그 과정을 무시하고 후대의 주관성으로 보는 것은 사유의 무능함이 낳은 소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이 표출된다면 어떻게 표출되는 것인가? 벤야민은 모사와 원작 사이의 모호한 동일성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이런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들 가운데 어떤 개별 언어가 아니라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단어가 서로에게 각각 상이하게 다가오며 대체될 수 있는게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볼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그렇다. 다시 말해 개별 언어에서 의도된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번역들은 변화하고 있는 언어들의 이질성을 해결하려는 임시적인 방편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이질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벤야민은 이런 과정을 종교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왜 종교적인 문제나면 번역은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이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이 종교의 방향과 같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번역은 실제의 언어를 뒤덮으며 강압적이고 낯선 채로 머물고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벤야민은 번역이 하나의 고유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다른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란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러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데 있다. 그러면서 문학작품의 의도가 언어의 총체성이 아닌,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번역은 그 문학 작품의 외부에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과는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파생적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며 번역을 문학과 가르침 사이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을 가는 것은 매우 험난하다. “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심는다”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인 노동이 필요하며 ‘의미의 재현’이라는 기존 번역의 기준을 폐기한다면 새로운 번역 기준과 그 방법론에선 그것들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의도하는 것이 의도된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그렇기에 형식이 재현에서 충실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직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벤야민은 이 직역이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번역이 의미의 재현을 그만둔다면 어떤 것을 노려야 할까? 벤야민은 번역의 자유는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의 언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린 고로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가의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마지막으로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의미의 번역이 아닌 형식의 번역 가능성을 살리는 쪽으로 번역이 나아가야 하며 의미를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번역이 나올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점에서 [번역자의 과제]는 단순히 번역 이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