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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2012)

giantroot2013. 9. 21. 21:47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저자
이명준 지음
출판사
바오출판사 | 2012-07-0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주사파의 조직문화와 행동양태를 낱낱이 파헤치다!한 NL 운동가의...
가격비교

시대의 컴플렉스를 넘어서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는 영광의 1980년대 학생운동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2000년대 학생운동 사이에 낀 1990년대 학생운동 세대의 회고록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세대는 운동권 후일담으로 많이 다뤄진 바가 있고 2000년대는 더 이상 학생운동 시대가 아니기에 이 책에서 회고하는 1990년대 학생운동은 그들이 어떻게 몰락해갔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공백기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는 '시스템이 완성된 후'의 학생운동의 모습과 그 사상, 구체적인 행태를 적고 있는 회고록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학파는 NL이고 따라서 PD계열은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책은 신입생이 어떻게 운동권과 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동아리나 학과 미팅으로 신입생들과 접촉을 시작한 선배 운동권들은 곧 그들을 여러 시위와 농활들을 데려가면서 '의식화' 과정을 시킨다. 이 의식화는 NL의 경우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묵묵하게 '운동'이란 대의에 헌신해야 진정한 가치를 이룰 수 있다는게 골자다.

의식화 과정이 끝나면 인간관계가 운동권에 맞게 재구축이 되며 총학과 여러 학내 행사와 투쟁을 통해 하나의 운동권 학생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신입생들과 접촉한다. 이 과정이 제법 상세하고 냉철하게 다뤄져 있기 때문에 의외로 인류학적인 시선이 강한 책이기도 하다. 더불어 왜 비운동권 학생회가 파행으로 운영되는지, 신입생이 NL이라던지 PD을 선택하는 이유도 흥미롭다. 

이 책의 다른 축은 바로 NL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주체 사상이 무엇인가이다. 주체 사상은 한마디로 완전한 주체를 따라 혁명과업을 달성하자는 이야기다. 송두율 교수가 주창한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완성된 주체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상이다. 민족민중해방 투쟁과 자주국가 설립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곧 이들이 "미제 꼭두각시에 불과한" 한국 사회, 나아가 미국에 대한 투쟁의 불길을 높일수 있는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접근은 곧 다른 분야로도 뻗어나가는데, 특히 NL이 문화를 바라보는 시점이 인상깊었다. 사실 루카치 죄르지의 사회주의 사실주의과 극단적인 카프-민족주의 문화론을 교조적으로 답습해 웃겼다는게 정확하겠지만.

물론 이런 과정에서 의문이나 비판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운동권 시스템은 용납치 않는다. 나오는건 오로지 혹독한 비판과 공허하고 소름끼치는 침묵 뿐이다. 이런 시스템의 탄압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운동을 그만두거나 지지부진해지거나 혹은 더 악랄해진다. PD 이야기는 피상적으로 언급되지만 저자는 PD 또한 조금 나을 뿐이지 그 내부체계의 혹독함은 그닥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 괴물과 싸우다가 마침내 괴물이 되버린 것이다.

NL의 문제는 한마디로, 이상은 있으되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한국 민주주의가 문제가 많다는 것도 사실지만, NL의 비판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흑백론에 갇혀 있다. 그 사상을 고치려는 시도는 '불경하거나 혹은 반동'으로 낙인찍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차단된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2012년 통진당 부정경선 역시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서 나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진당은 대학 운동권 문제가 고스란히 사회에 진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책에선 다루지 않고 있지만 요새 시끄러운 이석기 사태도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것이다. 적어도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한마디로 비판이 부재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 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파시즘과 나치를 떠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 역시 운동권 단결 대회를 다루는 부분에서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고결한 이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서글펐다. 세상이 엿같다는건 모두가 공감하고 이들은 그 엿같은 세상을 좀 더 낫게 하기 위해 온갖 발악을 했지만 불행히도 그 발악은 모두 헛발질에 민폐만을 끼칠 뿐이였다. 그리고 엿같은 체제는 그런 발악을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킬킬킬 비웃으며 짓밟을 뿐이고 세상은 나날이 엿같아진다. 저자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며 어떤 이념이나 새로운 새로운 진보가 한국에 도래하길 바라면서 끝내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은 1990년대 민주화 이후론 이념은 더 이상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게 됬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한국 역시 세계적으로 도래한 테러리즘 시대로 들어왔다는 그런 느낌도 있다. 다만 북한 역시 동시에 테러리즘의 아이콘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아직도 머리 위에 북한을 두고 있는) 우리 눈엔 여전히 이념처럼 보이도록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터넷에서 연재됬던 것을 연재종료 직후 조금 다듬어 부랴부랴 낸 수준이라, 냉정하게 따지면 책 자체의 가치는 '보존' 이상의 가치는 없다. 한 장 정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또 저자도 인정했지만 PD 계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시피하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상당한 수작이며 한국 운동권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좋은 길잡이가 되줄만하다.

P.S.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굉장히 흥미로운 소스라 생각한다. 이걸 가지고 영화화한다면 90년대 쏟아져 나왔던 운동권 후일담과 다른 그런 물건이 하나 나올 것 같다. 실제로 저자도 이것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일종의 해설서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