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Fly/비문학

사진, 영화, 그리고 도시의 여성 산보자: [사진의 작은 역사], [구경꾼의 탄생],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giantroot2014. 3. 23. 14:3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 2014-02-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철학, 미...
가격비교



구경꾼의 탄생 - 세기말 파리, 시각문화의 폭발

저자
바네사 R. 슈와르츠 지음
출판사
마티 | 2006-01-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마릴린 먼로도, 노 대통령도, 욘사마도…, 정말로 똑같다고? 최...
가격비교



시네마.테크노문화의푸른꽃

저자
김소영 지음
출판사
열화당 | 1996-09-0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상태 상급관련서 조니 뎁(일본어번역서) 고어영화 영화기호론(로트...
가격비교


(이 글은 [사진의 작은 역사], [구경꾼의 탄생],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세 책을 읽고 제출한 독후감을 약간 수정해서 내놓은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는 사진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흔들리게 된 지금, 사진의 산업화와 역사, 미학적 변화를 통해 사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저작이다. 그는 일단 지금까지 사진 예술의 미학을 논의할 때 적용되던 기존의 속물적인 예술 개념에 대해 ‘아둔한데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사진이 가지고 있는 본질, 즉 기술에 대해 재인식을 요구한다.

벤야민은 이 와중에 초기 사진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말기 초상 회화에서 등장했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복제기술인 메조 틴트 기법을 주목하면서 초기 사진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분위기(후술하겠지만 이것은 아우라다)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 (1930년대) 사진들은 그런 분위기가 붕괴하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논의를 할 수 있게 됬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술과 예술, 아우라에 대한 논의는 후속작인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이어져 확장한다. 그는 이 글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글의 서문을 열고 있는데 이는 벤야민의 매체미학이 단순히 미학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역사적 경제적인 발전 양태와 관계있어왔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있었던 생산 조건의 변화들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게 됬는지 지금에서야 파악이 가능해졌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런 생산 조건의 변화를 파악하는 방식을 현재의 생산 조건에서의 예술의 발전 경향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고른 것은 ‘현재’의 예술의 발전 경향은 바로 예술의 기술적 복제다. 벤야민은 이를 파악해 예술의 발전 경향과 사회적 변화, 나아가 어떤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던지고 있다.

벤야민은 일단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이 기술적 복제가 역사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그러나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면서 관철됬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쇄 기술을 예로 들면서 석판 인쇄부터 이 인쇄 기술이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이 석판 인쇄의 간편함은 곧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으며 영상의 복제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사진 매체가 등장해 완전히 근본부터 뒤집어 엎는 혁명을 일으켰다. 벤야민은 이 혁명을 ‘손에서 눈으로 예술적인 임무가 옮겨졌다’, ‘그것은 예술의 작업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표현하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어 벤야민은 가장 완벽한 복제에도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 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가 빠져있다고 적고 있다. 이 현존재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복제품에는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간단히 위조품으로 낙인 찍을수 있는 기존 복제와 달리 기술적 복제는 그렇게 쉽사리 낙인을 찍을 수 없는데 벤야민은 그 이유로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

이렇게 기술적 복제로 복제된 예술작품은 예술 작품 존속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예술 작품의 진품성이라는 핵심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야민은 이를 아우라라 불렀는데 그는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라고 보고 있었다.

이 아우라라는 개념이야말로 벤야민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으로 아까 언급한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먼저 주창한 개념이지만 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한층 확장되어 예술 전반까지 아우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이 아우라를 특수한 형식의 지각으로, 기술과 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적으로 규정되며 이런 아우라가 일종의 제의적인 숭배 태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량복제 기술이 예술에 적용되면서 이 일회적인 가치를 가진 아우라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우라가 새로운 수용 맥락을 요구하게 됬다.

재미있게도 벤야민은 이 아우라의 붕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닌, 예술이 제의적인 기능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고 보며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아우라는 사실 자료를 파시즘적으로 재가공할 위험이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벤야민의 주장은 그가 몸담고 있던 사회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즉 벤야민은 기술복제라는 새로운 상황이, 예술의 아우라라는 부르주아적인 현상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정치적인 실천을 실현시킬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벤야민은 동시에 이런 실천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가 못을 박아두었다. 그는 당시에도 있었던 스타 숭배를 사이비 아우라라 비판하면서 이를 해체하고 다른 이상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고찰했다.

벤야민의 이런 기술 복제에 대한 관점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다소 순진하고 미흡한 부분도 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 죽었기 때문에 전후에 있었던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TV 방송 같은걸 예측하지 못했고 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따른 개인이 영상을 대량복제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 (유튜브로 촉발된 UCC) 돌발적으로 등장한 시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후자의 질문은 후대 학자들이 풀어야만 하는 문제로 남겨졌다. 또 스타 아우라를 역으로 이용해 정치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한 장 뤽 고다르의 [만사형통] 같은 시도들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우라가 파시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라는 지적에서 그는 무척이나 193-40년대에 등장한 레니 리펜슈탈이라던지 선전 영화의 위험성부터 시작해 1980년대의 MTV 문화로 인한 감각적인 영상, 1990년대 걸프 전쟁을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게릴라 전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버린 CNN, 2000년대 UCC 문화 같은 것들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이는 전후 세계의 모든 영화 감독들의 ‘아우라와 스펙타클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점만으로도 벤야민의 철학은 기술의 발전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체 철학의 대부로 자리 잡을수 있었다.

벤야민이 이런 고찰을 하게 된 계기는 19세기 파리의 시각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파사주 프로젝트와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벤야민의 도시 문화에 대한 연구는 비록 벤야민의 때이른 죽음으로 이 연구는 완성되지 못하고 메모 덩어리로 끝이 났지만 그래도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바네사 R.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은 벤야민이 봤던 19세기 파리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은 19세기 파리에 있었던 스펙타클 몇 가지를 골라서 설명해주는 책이다. 정기간행물, 시체를 감상하는 산보자, 밀랍인형 박물관, 디오리마, 뉴스 영화가 나온다.

파리가 이런 식으로 스펙타클의 전시장이 된 이유를 저자는 오스망화로 보고 있다. 오스망화는 185-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된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상승과 관련된 심대한 경제적 문화적 변동의 약어로 이런 재설계로 인해 파리는 가장 먼저 모더니티의 전시장이 됬고 곧 파리는 현대 도시의 프로토타입같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먼저 나오는 것은 대로와 정기간행물이다. 이 대로는 건설되는 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곧 현대적 파리의 상징이 되어 카페, 극장, 신문 같은 유행하는 호사품들과 볼거리들을 제공되기 시작했다. 카페와 극장은 파리라는 도시의 스펙타클을 관람하기 위한 하나의 좌석이 되었으며 신문은 항시 도시에서 일어나는 스펙타클을 기사로 보도하거나 대중소설나 일러스트 같은 자체적인 스펙타클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파리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스펙타클을 하나 만들어낸다. 바로 시체를 관람하는 것이다. 이 파트에서 저자는 파리 모르그에 전시된 아이의 시체를 보러 파리 시민들이 몰려든 걸 묘사한다. 저자는 이 모르그를 실증주의 성지로 묘사하면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평범함과 일상이 묻어나고 삶이나 죽음마저도 구경거리가 된 파리와 어울렸다’고 보고 있다. 이는 죽음이나 병적인 것들과 동떨어져 있었고 오히려 쿨한 볼 거리에 가까웠다.

이 시체를 관람하는 행위는 곧 밀랍인형 박물관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밀랍인형 박물관은 시체전시라는 내용에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결합해 절묘한 방식을 만들어냈으며 상기한 모르그의 시체 관람이 전해주던 구경거리화된 현실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당대 파리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다.

이 밀랍 박물관은 단순히 인물을 배치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레벵 박물관의 디오라마 같은 경우 하나의 시간과 사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서사를 3차원으로 재현했으며 여러 위치에 전시물을 부여해 관객의 관심을 유도했으며 나아가 장면의 서사를 전개시키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런 밀랍 인형 박물관의 전시 형태는 곧 관람객이 박물관 전시에 동작을 이입할 권력을 주었다. 즉 박물관 안의 산보를 통해 서사를 진행시키거나 그 서사를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접근법을 밀랍 박물관은 만든 것이다.

밀랍 박물관의 이런 식의 스펙타클의 형상화는 파노라마로도 이어진다. 우선 파노라마는 전체 풍경이라는 그리스어를 의미하고 있으며 그 말대로 전체 풍경을 보여주는 상영 체계였다. 이 파노라마의 장치 원리는 거대한 원형그림을 세워놓고 천장 틈새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을 그림에 비추어 자연의 환영을 보여주는 형식이였으며 관람객들은 어두운 통로로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 있는 플랫폼 위에 선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그림으로 둘러쌓여서 그림이 전해주는 스펙타클을 맛보았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시각적 착시가 가져오는 것으로 스펙타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파노라마는 원래는 풍경 묘사로 시작했지만 세기말이 되면서 밀랍 박물관처럼 신문을 각색해 현실의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변모는 밀랍인형관의 전시 체계나 디오리마하고 많은 연관 관계가 있었다.

이 파노라마가 성공한 이유는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재현이 만들어내는 환영을 보고 있는 관객을 현실이라 믿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영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설득력은 파노라마에서 싹트게 되다가 마침내 영화에서 활짝 꽃피우게 되고 파노라마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 [구경꾼의 탄생]의 마지막 역시 영화의 등장이다. 저자는 영화와 영화적 경험을 연속이자 동시에 단절을 표시하는 매체라 말하며 대중 수용자인 관객과 현실을 구경거리로 전환시키려는 기술적 시도를 결합시켰다고 보고 있다.

이런 지난한 변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파리라는 도시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스펙타클을 만들었으며 시체 관람과 거기서 영향을 받은 밀랍박물관, 디오리마, 파노라마를 거쳐 영화로 넘어가는 도시 스펙타클의 역사를 조감하고 있다.

[구경꾼의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시체 감상 부분이였다. 벤야민의 저작들을 보면 [구경꾼의 역사]가 소재로 삼고 있던 19세기 파리에서 살면서 시를 쓴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인용이 많은데, 이 [악의 꽃]에는 시체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비록 이 시체의 이미지는 파리 구경꾼들과 보들레르가 전유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보들레르에서는 [구경꾼의 역사]에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탐미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래도 시체 이미지가 당대 문화사적 맥락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논문에 담긴 논지들은 이런 지난하고도 변화무쌍한 19세기 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걸 확인할수 있었던 점도 인상 깊었다.

이어지는 김소영의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의 두 글은 이 발전상과 벤야민의 기술 복제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을 종합하고 있다. 먼저 ‘도시를 걷는 그녀, 플라네즈’에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글쓴이는 이 소설에서 도시 문화 속에서 여성의 존재, 나아가 역사적 주체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고 있다. 글쓴이는 영화를 통해 이 주체성을 회복시키려고 하면서 서구의 텍스트들을 살펴 보고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 글쓴이는 플라톤의 동굴 이론과 현대 영화 이론의 공간적 수사학, 프로이트의 건축물을 들며 이것들이 어떻게 영화 평론 내에서 작동하는지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내 이런 수사학들은 ‘고고학적 작업’으로 전락했다고 보면서 이를 대체할만한 동적인 관객을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글쓴이가 드는 동적의 관객은 바로 [구경꾼의 역사]에서 들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입에 있었던 도시인들이다. 이들은 도시에 매혹되어 있었으며 그 매혹과 영화는 역시 산업화된 대도시의 생산력을 토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김소영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를 들고 온다.

위에서 [구경꾼의 역사]에서 주지했듯이 파리의 파노라마와 디오리마는 도시 대중의 시선이 가장 몰리는 곳인 ‘대로’에 놓여져 있었다. 글쓴이는 초기의 영화와 그것의 카메라 움직임은 이런 대로를 활보하는 대중의 시선을 따라 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확실히 초기 영화들은 철도라던가 (최초의 영화 제목은 ‘기차의 도착’이었다.) 이동하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전개했던 기술 복제와 예술에 관한 논의는 위에서 전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벤야민이 저작활동을 했던 당시 영화의 흐름을 간략히 집자면 1920년대부터 영화는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카메라의 배치를 달리해 찍은 각각 이미지들의 연결을 고민하는 몽타주 기법이 도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몽타주들은 종종 도시문화와 스펙타클에 매혹된 산보가 (플라네르)하고 연관되고 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를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베를린, 대도시 심포니], 세계로 퍼진 마천루의 이미지를 가지고 미래의 도시를 상상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등 초기 몽타주와 카메라 기법을 이용해 19세기 파리보다 더욱 발전한 메트로폴리스라는 구경거리를 관람하는 구경꾼들의 시선과 매혹을 담아내고 있었다.

비록 벤야민 자신은 이 당시 영화보다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곤 하지만, 이런 예술가-플라네르의 변화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품]을 통해 19세기 ‘아우라’의 유물들인 아케이드, 파노라마, 산업도시들의 몰락과 동시에 20세기적인 ‘기술복제’의 아이이자 혁명의 파이오니어인 영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혁명의 아이가 잘못하면 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도 명백히 하고 있다.

김소영은 이제 여기에 여성이라는 존재를 놓기 시작한다. 우선 그녀는 도시의 여성 플라네르는 창녀라는 존재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이는 가정과 같은 개인적 영역을 여성의 공간으로, 그리고 거리나 공공 영역들을 남성의 공간으로 구획하는, 성차에  근거한 사적 영역/공적 영역의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분법은 곧 밤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인권 운동을 통해 깨졌다.

이제 이렇게 자유를 얻은 여성 플라네르들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영화와 아케이드다. 여가 시간에 공적 공간에서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를 소유할 수 없었던 여성 주체에게 영화와 영화관은 그 권리를 안겨주었다. 물론 이 권리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지금도 온전하다고 하기엔 힘들다. 그리도 아케이드는 윈도우 쇼핑을 통해 영화와 비슷한 파노라마적인 쾌감을 여성 주체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런 둘의 공통점은 이미지를 소모한다는 점에 있었으며 여성의 근대적 정체성과 욕망이 부분적으로 형성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하는 여성 감독이 있다. 바로 엘비라 노타리라는 감독이다. 비록 인정받진 못했지만 엘비라는 나폴리 지역의 영화문화의 초기 지도를 만들었으며 나폴리라는 도시의 매혹적인 파노라마를 펼쳐보였다. 엘비라 노타리의 영화들은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영화 이론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졌던 수인/관객이 아닌 동적이고 유목적인 성격에 주목하게 만든다. 나폴리는 전통적으로 동적인 스펙타클을 제공하는 도시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건설된 곳이다. 나폴리의 상영관은 그 모더니티의 중심인 아케이드에서 상영됬다. 따라서 나폴리 여성들에게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모더니티의 총화를 맛보러 간다는 것이였고 엘비라 노티라는 그 욕망에 걸맞는 영화를 만들어서 내보낸 것이였다. 즉 엘비라 노타라 같은 여성 영화 감독과 여성 관객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남몰래 어머니 도시를 배회하는 쾌락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마냥 해방적인 것도 아니였다. 전쟁의 업화 이후 간신히 일어나는 중이였던 독일의 베를린은 사정이 달랐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여성들도 공장을 나가야 했다. 이런 공장은 모더니티와 성적 해방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량 강화라는 족쇄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해방조차 남성-파시즘의 등장으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됬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여성들의 영화를 전유한 모더니티 항유가 현대 영화이론 중 수용이론에 대한 대안의 근거로 제시할만하다고 보고 있다.

‘영화 연구의 소지형도’는 상품으로서의 스펙타클과 그에 매혹된 관객과의 관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9세기 파리와 20세기 초 벤야민의 시대를 거처 마침내 20세기 말엔 모든 삶이 거대한 스펙타클들의 축적이 되어버린다. 이 거대한 구경거리의 사회에서 문화는 점점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글쓴이는 그에 따라 영화 연구는 이제 이미지가 정교하게 상품화되는 문화 전반에 대한 학문이 되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현 시대를 전자복제 시대라고 보고 있다.

글쓴이는 남성과 여성의 텔레비전 시청 스타일을 들면서 이 곳에서도 사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연관짓는 사고가 가정을 일터와 분리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됬다고 보고 있다. 허나 소비사회가 등장하면서 이 엄격한 구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글쓴이는 비디오 테이프와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복제 시대의 대표적인 매체를 비교하면서 이 구분이 어떤 식으로 흔들리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리모컨을 통해 독서를 하는 것처럼 영상을 받아들인다던가.)

이를 통해 글쓴이는 영화 관람이 특정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는거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적자면 지금까지 영화 관람은 내러티브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글쓴이는 이어 영화 연구의 첫 번째 과제로 관객들이 영화 카메라가 탐사해 열어 주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또바로 읽는 힘을 부여해줘야 하며 나아가 동시대의 모든 복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김소영의 [시네마, 테크노의 푸른 꽃]에 실린 두 편의 글은 1996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읽어야하는 글이다. 1990년대 한국은 민주화 이후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으며 기존의 문예영화 스타일의 내러티브 중심의 비평을 배격하고 새로운 비평 형식을 찾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도시를 걷는 그녀, 플라네즈’는 그런 페미니즘적인 접근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여성적 스펙타클에 대한 고찰과 파악을 통해 영화 이론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고 있으며, 두 번째 ‘영화 연구의 소지형도’는 그렇게 정리한 화두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영화 비평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