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의 시작은 우주에서 생존은 불가능하다는 자막이다. 그리고 그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을 활보하는 라이언과 맷, 샤리프, 관제소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한 뒤 곧바로 그들을 처절한 생존의 장으로 밀어넣는다.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에서 생존을 한다는 점에서 [그래비티]는 공간이 캐릭터와 대립하는 유형의 영화다. 그 점에서 영화는 우주라는 공간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라는 화두에 대답해야 하는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그 대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먼저 [그래비티]가 다루는 우주라는 공간은 세밀한 상상력으로 빼곡히 차 있는 공간이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그래비티]는 SF라기 보다는 모험 드라마에 가깝다는 점이다. 물론 케슬러 현상을 바탕으로 실제 일어날법한 일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SF적인 접근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비티]의 세계는 그런 '상상력'보다는 실제 자연의 법칙이 만드는 위기와 난제를 드라마의 기제로 썼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해양 어드벤처의 변주에 가깝다. (실제로 케슬러 효과와 비슷한 사례들이 제법 목격되곤 했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런 자연의 법칙이 인간을 공격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피하는 과정들을 롱테이크로 긴 체감 시간과 깊은 공간을 일치시키는 연출을 통해 무한히 이어진 우주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 롱테이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긴장감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서사상의 정보와 이미지적 쾌감을 안겨주는데 성공했다. [샤이닝]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비티]는 공간을 극도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폐소공포증을 유발시키는 영화이다.
[그래비티]는 설득력 있는 중력 묘사와 음향 없음과 우주 데브리와 구조물의 섬세한 배치와 충돌 계산을 이용한 서스펜스 연출은 굉장한 수준이며 한순간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완벽하게 사실적이라 할 순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 대한 논리가 서 있으며 이는 와이드스크린이 등장했던 1950년대 관객들이 맛보았던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로 입봉한 스티브 프라이스의 음악도 상당한 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투쟁을 한다는 점에서 [그래비티]는 돌아가기 위한 투쟁이며 동시에 잃어버렸던 삶의 영성을 찾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성의 투쟁은 무한으로 이뤄진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가려는 투쟁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알폰소 쿠아론 개인의 '인본주의적인 리버럴 카톨릭'이라는 점에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P.D. 제임스의 원작을 거의 뜯어고치다시피했던 [칠드런 오브 맨]에서 드러났듯이 알폰소 쿠아론은 영성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무시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런 영성을 신의 위치에서 놓는게 아닌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볼 수 있을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헀듯이 영화는 우주를 보여주면서도 정작 인물들이 매료되는 것은 공空과 미지의 공간인 우주가 아닌, 지구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은 맷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라이언이 지구에 있었던 상처와 그가 삶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공과 미지의 공간이 본격적으로 그 경계를 침범하면서 등장 인물들은 갈등을 겪는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던 맷은 어쨌든 흔들리지 않고 경계에서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 동력에서 애를 먹고, 이 와중에 맷은 라이언만을 살려보내기 위해 무의 공간으로 자신을 보내는 걸로 희생한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어떤 신적인 개입 없이 자연적 현상과 인간만의 투쟁으로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걸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영성이 개입한다. 라이언이 간신히 돌파하고 탈출선에 도착하지만 자신의 뜻으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절망과 죽음의 유혹에 빠진다. 아난강과의 대화도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사실은 실패하지 않았지만), 죽음만을 기다리던 도중 맷이 귀환한다. 이 귀환이 어떤 위화감 없이 연출되어 있어서 우리는 진짜 맷이 살아돌아왔는가, 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다음 컷에서 맷은 사실 환상이였다는게 밝혀지고 라이언은 간신히 탈출선을 작동시키게 된다.
이 유령적인 존재로 드러나는 영성이 영화의 주제와 미학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쿠아론은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천당이나 신이 기거하는 완벽한 공간을 믿지 않는다. 그랬다면 영화는 무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해야 했다. 쿠아론은 그곳을 죽음의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거기서 돌아가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공간에 대해 역설한다. 하지만 동시에 쿠아론은 그 무와 미지의 공간에서 오는 어떤 '무언가'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무언가'를 쿠아론은 에피파니적인 현상으로 묘사한다.
이는 AIDS 양성 검사 결과 조작과 그에 따른 오해라는 인간적인 재앙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러브 앤드 히스테리]에서 시작해 비참하고 살기 힘든 근미래의 현실에서 인간의 아이라는 즉물적이지만 숭고한 존재가 가져다주는 위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칠드런 오브 맨]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캐릭터와 배경이 극도로 단순화되다보니 [칠드런 오브 맨]처럼 정치 사회적인 맥락과 풍성함은 없다. 대신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매력이 있긴 하다.
이 영성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몰입도와 동질감에 대한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산드라 블록이 그 영성과 인간 세계 사이에서 번뇌하는 캐릭터를 끌고 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조지 클루니도 좋은 연기를 펼쳐보이긴 하지만 사정상 혼자서 영화를 끌고 가야하는 산드라 블록은 현실적인 여성상을 단단히 뿌리 박은채 아난강의 통신을 듣고 절망과 안도 같은 미묘한 감정들을 소화해내는 모습들은 그간 로맨틱 코미디의 여제로 소모되어왔던 산드라 블록의 연기에 대한 일말의 의혹을 (사실 [스피드]나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입증된거긴 하지만) 없애버린다.
[그래비티]는 삶의 뜻을 찾아가는 여정에 영성의 개입이라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을 몰입을 방해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쿠아론의 시선은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보며, 동시에 그 영성이 감성적으로 울렸다는 것도 순순히 인정하고 싶다. [칠드런 오브 맨]의 풍성한 정치/사회적인 텍스트와 과학적인 텍스트를 병치하는 쾌감은 없지만 [그래비티]는 우주 공간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전환과 삶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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