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 신지의 [새드 배케이션]은 짧게 [헬프리스]의 사건을 뉴스 기사처럼 건조하고 딱딱하게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어둠 속에서 사내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곧이어 켄지는 중국인 아이인 아춘을 데리고 도망친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때 우리는 그가 자막에 등장했던 켄지와 유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때 아오야마는 키타큐슈 삼부작의 또다른 주인공인 [유레카]의 타무라 코즈에를 데려온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끔찍한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던 그 소녀다. 다행히도 그 시간을 극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부 사와이 마코토도 떠나보낸 코즈에는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하기 위해 '마미야 운수'라는 회사에 도착한다. 이 마미야 운수는 상처받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기묘한 공동체이며 코즈에는 그 속에서 천천히 동화되어간다.
얽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켄지와 코즈에는 어쩌다보니 켄지가 자신을 떠난 어머니 치요코가 마미야 운수 사장과 결혼해 새로운 가정을 이뤄 살고 있는걸 발견하게 되면서 서로 엮이기 시작한다. 치요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마미야 운수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 켄지는 치요코의 반항적인 아들인 유스케에 접근을 하게 되고 이는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새드 배케이션]은 전작에서 정처없이 방황했던 사람들이 '마미야 운수'라는 한 장소에 모여들면서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만 개인과 커뮤니티, 그리고 그 경계를 떠돌아다니며 침잠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가족은 스케일이 커져 국가와 민족의 문제로 확장된다. "일본은 흘러온 섬들이 모여와 만들어진 곳"이라는 고토의 대사처럼, 아오야마는 일반적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개인과 개인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국가와 민족, 성별 간의 경계를 넘은 초월적인 가족을 만들고자 한다. 중국인 소년 아춘과 일본인 남성 켄지, 지적 장애인 여성 유리의 관계가 그렇다
마미야 운수는 그 점에서 영화가 지향하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유레카]의 사와이 마코토처럼, 마미야 운수의 사장인 마미야 시게키는 운수업을 하면서 뿌리가 없는 타자들을 끌어안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다. 그렇게 떠나거나 정박하거나 아니면 방황하는 사람들을 시게키는 아내인 치요코와 함께 커뮤니티를 이끌며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준다. 어느 쪽이든 마미야 운수는 [유레카]의 마코토의 커뮤니티가 확장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어찌보면 아오야마가 그렇게 사랑했던 서부극의 역마차를 생각나게 하는 공간인데 상처받고 고아가 된 전작 등장 인물들이 마미야 운수로 온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시게키 역시 나중에 찾아온 켄지의 친구이자 코즈에의 사촌인 아키히코에게 그런 의도가 담긴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드 배케이션]의 정작 비혈연 가족과 공존하고 있는 혈연 가족에 대해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에게 복수하려는 켄지와 치요코의 관계가 그렇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마미야 부부의 아들 유스케가 그렇다. 영화가 국가와 민족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개념을 들먹이는 중국인들이 '일본인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관계를 파탄내는 인물들로 묘사하는 걸 보면 영화 속에서 혈연 가족이 민족, 국가하고 동일한 선상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아오야마는 이런 대안적 커뮤니티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키타큐슈라는 지역적인 장소를 다루면서도 그 지역성가 나아가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려고 한다. 이는 켄지가 유스케를 이용해 치요코에게 복수하려고 하다가 막판에 유스케를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그 발버둥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실패는 양가적이다. 대안적인 관계의 실패기도 하고 혈연가족을 파괴하려는 시도의 실패기도 하다. 전자의 실패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되었지만 견고한 공동체"가 만드는 거대한 벽에 좌절한 개인의 무기력함이라면, 후자의 실패는 어떤 거대한 가능성에 대한 수긍에 가깝다. 그 가능성을 영화는 모성으로 표현한다. [새드 배케이션]은 남자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국가나 민족이 강요한 여성상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켄지의 버팀목이 되며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사에코는 호스티스이며 유리는 지적 장애인이며 코즈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전선에 뛰어든 여성이다. 어느 쪽이든 이 여성들은 일본 남성들이 원하는 순종적인 여성상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성상은 일본적인 여성상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함과, 긍정성 나아가 생산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동시에 켄지가 복수하려고 하는) 치요코는 여러모로 그 두 가지 가능성이 극화된 재미있는 캐릭터다. 얼핏보면 사근사근하고 항상 희망과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치요코는 전통적인 일본 여성의 희망과 국가가 가지고 있는 혈연성을 대표하는 여성상으로 보인다. 이를 대변하듯이 치요코는 갑자기 불쑥 나타난 친아들 켄지의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못미더운 유스케 대신 그가 시게키의 일을 잇길 원하며 "믿을건 혈연 밖에 없잖니."라고 말을 꺼낸다. 하지만 동시에 치요코는 혈연에 대한 신뢰를 보이면서도 새로운 커뮤니티를 긍정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적으로 치요코는 오즈나 미조구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전통을 대변하던 여성들과 달리 기모노를 입지 않고 나이를 잊은듯한 화사한 옷차림으로 회사를 이끌며 아춘과 유리를 비롯한 마미야 운수의 사람들을 통솔하고 이끄는 역할을 한다. 비교적 안전했던 오즈나 미조구치와 달리 치요코의 세계는 폭력과 강간이라는, 위협이 드러난다는 점도 그렇다.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치요코의 이런 모습은 매우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때때로 영화 속 치요코의 모순성은 무서워보일때가 있는데, 이는 영화와 아오야마의 시점이 켄지에게 맞춰져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공존이 가능할까? 아오야마도 그렇고 나 역시 짐작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치요코는 괴물이 아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반전을 밝혀 치요코가 왜 켄지를 떠날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한다. 치요코는 켄지의 아버지에게 배반당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버린 치요코를 불행하게 하고자 했던 켄지의 복수는 결국 헛되고도 방법과 대상을 잘못 찾은 것으로 판명난다. 그런데 [헬프리스]에 따르면 켄지의 아버지는 인터내셔널 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켄지의 아버지와 치요코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일본 좌파의 실패를 상징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새드 배케이션]의 여성들은 혈연과 비혈연 간의 대립을 무화시켜버리는 어떤 지점이 있는건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남자들은 아버지의 길을 (어찌보면 아오야마 신지에 등장하는 대안 가족적 커뮤니티는 상당히 좌파 코뮨적인 구석이 있다.) 따라가는 것으로 실패한 방법을 계속 시도해 성공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여자들은 그 실패를 거름삼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개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달의 사막]에서 카아이와 아키라가 버려진 시즈오카 고향집으로 돌아가 개척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아오야마는 무의식적으로 서부극에 등장하는 개척자들의 행동과 정신을 영화 인물들, 특히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여성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인 탐색 대신 애매한 판타지가 담긴 결말로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아오야마 신지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영화적인 언어를 찾지 못해서인듯 하다.
키타큐슈 삼부작이 그렇듯 [새드 배케이션]의 세계도 파탄난 캐릭터들의 방황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지점이 개입한다. 우선 말보다 침묵이 많았던 [헬프리스]와 [유레카]와 달리 [새드 배케이션]은 상당히 말이 많아졌으며, 캐릭터들도 많이 등장한다. 테크닉적으로도 컷들 길이가 상당히 짧아지고 심지어 점프 컷까지 구사하는 현란한 기법을 동원한다. 다만 이 현란한 테크닉이 생각보다 먹히진 않고, [달의 사막]과 달리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는 있긴 하지만 캐릭터들이 잡다해져서 그 흐름들을 전부 따라잡다가 영화가 산만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코즈에가 투탑으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에 가까운 역할을 취하고 있어서 역할 분배가 모호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유레카] 이후 아오야마 신지는 자신이 만든 [유레카]를 넘어설 영화적 방법에 골몰하다가 조금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서부극에서 시작해 SF, 추리 스릴러, 호러 같은 어법들을 무차별로 끌어다 쓰는 것이 그렇다. [새드 배케이션]은 여전히 방법론을 정돈하지 못해 난삽하긴 하지만 그동안 친숙하게 다가왔던 키타큐슈 삼부작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과 동시에 이전작들과 다른 다소 우울하긴 해도 따뜻한 감수성이 어느 정도 신선한 구석이 있다. 이후 아오야마가 4년간의 공백 끝에 타무라 마사키와 헤어지고 새로운 촬영 감독과 함께 [도쿄 공원]을 내놓은 걸 보면 [새드 배케이션]은 지난 아오야마 신지 영화를 총합하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한마디로 [새드 배케이션]은 슈퍼아오야마대전이라 할만하며 아오야마 신지를 사랑했던 팬이라면 체크할 필요는 있는 영화다.
P.S. 이 리뷰는 사실 허문영 평론가의 새드 배케이션 평론을 많이 베낀 글이다. 면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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