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 신지의 데뷔작 [헬프리스]는 키타큐슈 상공을 날아다니는 조감 샷으로 시작한다. 허나 이 영화는 그런 시작과 달리 얼마 안 되는 장소를 옮겨다니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첫 영화답게 돈은 별로 들인 티가 안 보이고 장소는 한정되어있는데다 인물들도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는 그러나 어떤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1989년 여름 키타큐슈. 야스오라는 야쿠자가 형기를 마치고 키타큐슈로 돌아와 죽은 보스를 찾는다. 하지만 옆에서 진실을 알려줘도 야스오는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다. 한편 야스오에겐 켄지라는 나이 어린 친구가 있는데 야스오는 켄지에게 정신지체인 여동생 유리를 맡기고 떠나버린다. 켄지에겐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가 있고, 삶도 녹록치 않다. 그렇게 카페에서 야스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켄지는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폭발해버린다.
[헬프리스]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제목 그대로 무기력함이다. 인물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지만 그 발걸음들은 힘겨워보인다. 하지만 이 무기력함은 안전한 무기력함이 아니다. 오히려 살벌하기 그지 없는 폭풍 전 고요나 다름없는 무기력함이다. 그리고 그 폭풍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듯이 자멸로 향한다. 이유도 없고 삶에 대한 의욕도 없는 그런 폭력이다.
이 무기력함과 폭력은 아버지의 상실에서 비롯된다는게 주목할만하다. 아버지가 있다는 켄지는 말할것도 없고 야스오는 두목을 오야 (아버지)라 부른다. 이 간단한 인물 설정에서 [헬프리스]의 정치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켄지의 아버지가 인터내셔널가를 흥얼거리는 부분 외엔 구체적인 정치성은 없지만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등장한 어떤 정신적인 풍경을 떠올리지 않는건 어렵다. 여기에 생각없는 아키히코, 과민성 공격을 보이는 카페 주인과 종업원이 가세해 어떤 균질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야스오나 켄지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일본이라는 "성과사회"에 긍정할수 없기에 살벌한 피로를 품게되었다는 점에서 (스오를 알아본 경찰은 야스오에게 "너같은 쫄따구"라고 운운한다.) 같은 캐릭터며 동시에 어떤 시대성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다소 고증을 포기하면서 켄지에게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티셔츠를 입혀 이 무기력함을 1990년대와 연결시키려고 한다. 쇼와가 끝나고 헤이세이로 들어섰지만 새 시대의 풍경엔 죽은 아버지들의 흔적이 어른어른거리고 일본의 청춘들은 공백의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야스오와 켄지는 궁극적으로 차이가 있다. 단적으로 영화의 끝에서 켄지와 유리는 살아남고 야스오는 자살을 선택한다. 왜 켄지와 야스오는 둘 다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켄지만이 살아남고 야스오는 죽음을 선택하는가? 내 생각엔 야스오나 그가 그렇게 찾던 아버지 모두 폭력이 일상화되어버린 '야쿠자'였기에 더 이상 의욕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 죽음을 선택한거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오가 등장할떄부터 이미 한쪽 팔이 없는 상태였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신에게 휘두르는 폭력과 타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된데다 삶의 목표마저 없어졌다고 할까? 야스오는 그런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켄지는 다르다. 우선 그는 폭력의 세계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었고 타인이자 소리없는 드라마를 보고 감정을 상상하는 유리를 보살펴주는 마음씨가 있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에 빠져있어도 거기서 와해된 야스오와 달리 도망가는게 가능했다. 혹은 좌절한데다 끝내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이상주의를 계속 믿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야스오의 광기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켄지가 마지막에 야스오의 총을 버리는 장면은 그런 켄지와 야스오 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무기력에서 벗어난 켄지와 유리가 그동안 함께했던 바이크를 버리고 토끼를 찾으러 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순진무구한 결말은 그러나 켄지가 죽은줄 알았던 야스오의 펄럭이는 팔이 남아있다. 야스오는 그렇게 시대의 망령이 되어 유리와 켄지 주변을 방황하는 것일까? 그러나 [헬프리스]는 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이 대답을 하기 위해 한 편의 영화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야오아마 신지는 이 대답을 위해 4년후 다시 키타큐슈로 돌아와 [유레카]를 만들었고 또 7년이 흘러 [새드 배케이션]을 만들었다.
'Deeper Into Movie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탄의 가면 [La Maschera Del Demonio / Black Sunday] (1960) (0) | 2013.10.22 |
---|---|
악마의 등뼈 [El Espinazo Del Diablo / The Devil's Backbone] (2001) (0) | 2013.10.20 |
스플라이스 [Splice] (2009) (0) | 2013.10.10 |
일대종사 [一代宗師 / The Grandmaster] (2013) (0) | 2013.09.12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0) | 2013.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