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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1)

giantroot2013. 5. 10. 21:48



테이크 쉘터 (2013)

Take Shelter 
7.3
감독
제프 니콜스
출연
마이클 섀넌, 제시카 차스테인, 쉬어 윙햄, 캐시 베이커, 케이티 믹슨
정보
드라마 | 미국 | 120 분 | 201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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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누설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미국적인 현상을 들라고 하면 역시 총기와 방공호일 것이다. 특히 땅이 좁고 총기 소유가 금지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현상이 모두 ‘자기보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대조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게 흥미롭다. 총은 일단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물건이다. 이 외향적인 자기보호는 곧 미국에서는 서부개척사의 무법자들을 거쳐 갱스터의 자기 보호, 미군의 세계 보호, 마침내 개인의 자기 보호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방공호는 정반대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보호를 띄고 있다. 위협의 대상에서 피해서 자신과 주변인의 몸을 지킨다는 것. 제프 니콜스의 [테이크 쉘터]는 제목 그대로 방공호와 방공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행복한 가장인 커티스는 어느날부터 세상이 멸망하고 주변인들이 가족을 공격하는 환영에 시달린다. 이에 커티스는 방공호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방공호를 만들기 시작하고 주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커티스가 보는 환영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의 괴물들처럼 일상 속에서 음험하게 꿈틀거리며 커티스를 공격해온다. 기분 나쁜 황색 비, 기묘한 흐름을 가지고 움직이는 새들, 갑자기 사나워져 주인에게 대드는 개, 자신을 공격하고 딸을 뺏으려는 주변 사람들, 갑자기 붕 뜨는 집안의 가구들 같은 같은 환영에게 제프 니콜스 감독은 불쾌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부여해 영화의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다.


이런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위협들 속에서 커티스는 자신의 문제가 가족 내력에 있는게 아닌지 의심해보고 약을 먹는 등 합리적인 치료책을 찾고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커티스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진짜 해결책을 섣불리 손대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치료에 수반되는 재정부담, 그리고 이 환영이 단순히 대물림되는 정신병에서 오는 것이 아닌,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과 비슷한 문제의식과 작극술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자신의 위치와 진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장에 대한 비웃음이 강했던 레이와 달리 니콜스는 훨씬 커티스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으며 그리 풍족하다고 할 수 없는 커티스 집안의 상황과 거기에 닥쳐오는 실제적인 위협과 커티스의 고뇌도 주목하고 있다. 귀가 먼 어린 딸의 수술 비용,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직장에서 동료와 충돌, 시골 커뮤니티에서 불협화음, 형과 어머니 등 가족 내력 등이 빠짐없이 언급되면서 커티스와 주변 인물들을 단순히 ‘장르적인 도구’가 아닌 생생한 인간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커티스 역시 단순한 예언자 캐릭터가 아닌, 자신이 보는 환영에 대한 회의감도 가지는 복잡다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복잡한 캐릭터와 배경 설계 때문에 영화의 위협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 커티스가 선택한 방안은 바로 방공호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실제적인 위협을 ‘총’으로 제거할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불확실한 유전성 정신병을 치료하다가 아무런 대비를 마련하지도 못한 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허나 방공호를 만든다는 선택 역시 영화는 불안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아니라는걸 못박아두고 있다. 실제로 방공호가 만들어지면 만들어 질수록 커티스의 ‘행복한 가정’은 위협과 상관없이 무너져 가기 시작한다. 방공호를 만드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되고 인간관계도 헝클어지며 돈은 점점 부족해지며 사만다는 직장을 나가게 된다. 라이온스 클럽에서 폭발해 미친 설교자처럼 외치는 커티스의 모습은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위협이 다가오고 있어도 그 이유와 해결 방법을 알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개인의 두려움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중으로 된 영화의 결말 구조은 이 점에서 흥미롭다. 밖을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커티스에게 사만다는 당신이 직접 열어야 한다고 말하며 커티스에게 맡긴다. 그리고 치열한 갈등 끝에 나온 세계는 허무하게도, 멀쩡하다. 결국 커티스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신병을 인정하고 치유받기를 선택한다. [패닉 룸]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패닉 룸에서 나가야 했듯이 [테이크 쉘터]는 결국엔 그 문제를 직접 마주 하기 위해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정한지 바로 후 커티스가 봤던 불길한 환영은 가족들 앞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이 현실이든 아니면 가족만이 보는 환상이든 상관없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딥 원’처럼 사라지지 않고 삶에 끈질기고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평범한 삶이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테이크 쉘터]가 만약 미국이라는 지역적 상황을 넘어선 보편적인 메시지를 가지게 됬다면 바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