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Test/리뷰

헤비 레인 [Heavy Rain] (2010)

giantroot2011. 11. 18. 14:20


(치명적인 누설은 없지만 할 예정인 분들은 읽지 않는게 좋습니다.)

2010년에 나온 퀀탁 드림의 PS3 전용 어드벤처 게임 [헤비 레인]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전작 [인디고 프로퍼시] 이야기를 좀 해보죠. 빙의한 NPC에 따라 진행 방법이 달라지는 설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메시아라는 게임도 있었지만.)와 장르를 넘나드는 대담함으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의 신선함을 안겨줬던 오미크론이란 게임 이후 만든 [인디고 프로퍼시]는 1990년대 잠시 부흥했다가 별다른 재미를 못 보고 사라진 인터랙티브 무비라는 장르와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야심을 지닌 게임이였고 실제로 그 야심을 이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게임이 시도했던 3D 시네마틱 시퀀스와 게임플레이의 유기적인 결합은 게임 제작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선택기를 통해 이야기가 조금씩 바뀌는 부분은 비록 기술적 한계가 역력했지만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소니의 지원을 받아 돌아온 [헤비 레인]은 [인디고 프로퍼시]에서 한층 더 나아갑니다. 

기본적으로 [헤비 레인] 정해진 틀에서 조금씩 장면이나 상황, 결말 바뀌는 수준에 머물렀던 [인디고 프로퍼시]와 달리 [헤비 레인]은 정말로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변화합니다. [인디고 프로퍼시]에서 루카스의 죽음이나 발각은 말 그대로 게임 오버에 불과했다면, [헤비 레인]에서 죽음은 또다른 분기점일 뿐입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은 에단이 죽어도 매디슨이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헤비 레인은 공략이 거의 필요없는 게임입니다. 게임 조작이나 퍼즐 난이도가 낮은 것도 있지만 (대신 조작의 순발력이 게임의 전체의 난이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게임의 배드 엔딩 같은, ‘이건 시스템적으로 틀린 엔딩이고 넌 틀린 부분부터 다시 해야 돼’가 아니라 ‘그래 늬게 이렇게 유도했는데 결말이 엿 같이 나왔네. 어쨌든 끝.’ 이런 느낌이여서 뭘로 유도해도 게임은 끝납니다. 엔딩을 보면 아시겠지만 각각의 이야기의 끝이 모두 완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원하는 특정 엔딩에 도달하고 싶다면 공략이 필요하겠지만...

게임 조작과 UI 디자인은 상당히 미적이고 명쾌합니다. [헤비 레인]의 미적 감수성은 카일 쿠퍼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데, 핫스팟이 뜨는 방식과 상황 설명이 상당히 현대적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UI가 픽토그램처럼 굉장히 직관적입니다. 전작 [인디고 프로퍼시]를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어드벤처 게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핫스팟 찾기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는 것을 기억하실겁니다. [헤비 레인]은 그 혁신을 세련되게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하면서도 굉장한 몰입감을 자랑합니다. 그 외 육축 센서을 이용한 퍼즐이라던가 패드를 퍼즐에 이용하는 방식도 상당히 리드미컬하게 되어있습니다
 
[헤비 레인]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위에 언급한 게임 플레이과 디자인을 영상에 유기적으로 결합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시네마틱 시퀀스를 게임에 융합하고자 하는 시도는 수없이 많았고, 게임 자체도 점점 영화를 따라가려고 하고 있지만 퀀탁 드림만큼이나 그걸 잘 실현시킨 제작사도 별로 없을 겁니다. 화면 분할과 고도의 교묘한 카메라/편집 기법, 미장센들을 이용해 다양한 시각 정보들에 실 게임 요소들과 이야기 전개를 배치하고 나아가 그것을 조작해 긴박함을 만들어내는 인상적입니다. 특히 두번째 시련 이후 이어지는 추격전과 마지막 종이 접기 살인마와의 혈투 장면을 분석해보시면 이 연출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게임/이벤트 씬의 연출에 긴장감과 리듬감이 굉장히 잘 살아 있습니다.
 
비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그래픽도 상당합니다. 표정 연기를 비롯해 그래픽 디테일이 상당하기도 하지만, 비주얼 자체도 인상적인게 많은데 마지막 시련이 특히 가장 강렬합니다. 이 마지막 시련이 드라마 구성으로 봐도 격렬하게 감정선이 올라가는 부분인데, 그걸 굉장히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헤비 레인]이 [인디고 프로퍼시]보다 가장 눈에 띄게 발전한 점이라면 바로 이야기 부분입니다. [인디고 프로퍼시]는 사이코 스릴러로 시작했다가 후반부 가면 겉잡을수 없이 이야기가 산으로 간 느낌이 강했다면 [헤비 레인]은 자신의 장르에 충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반전이 중요한 스토리인데 (따라서 누설이 게임의 재미를 많이 해치는 부류에 속합니다.), 반전을 ‘놀랐지?’ 이상으로 드라마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태도가 좋았습니다. 단순히 뫄뫄가 범인이다! 때려잡아야지! 이렇게 되는게 아니라 뫄뫄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과거들을 효과적인 연출로 차근차근 보여준 뒤, 반전을 때리고 좀 더 이어가 주인공에게 자신이 겪었던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만들어내는게 좋습니다. 다만 이야기에 다소 구멍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DLC가 취소된게 아쉽지만 대충 상상으로 메꿔질수 있는 수준입니다.

기본적으로 [헤비 레인]의 세계는 무고한 아이들은 죽어나가고 어른들은 좌절하고 정의는 찾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를 위해 데이비드 케이지가 동원하는 연출들은 느와르의 어법들입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황색빛의 칙칙한 색감으로 덮여진 도시, 버려진 공간들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공포, 환락과 고독을 탐닉하는 도시인들, 불면증과 환각 등 어두컴컴한 요소로 가득합니다. 

이런 요소 위에 세워진 캐릭터 메이킹과 이를 얽어 갈등을 만들어내는 법도 탁월합니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 홀로 잠들 수 없는 현대 여성, 정의실현을 위해 자기희생을 선택한 경찰, 늙고 추레해져버린 몸으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탐정 등 네 주인공 캐릭터 모두 상당한 깊이와 굴곡을 가지고 있으며, 게임 내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클라이막스를 구성하는 종이접기 살인마의 정체와 본심이 얽혀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이 가지는 책임과 딜레마’라는 주제에 대한 진지한 드라마가 만들어집니다. 기본적으로 [헤비 레인]은 자극적인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성인을 위한 게임입니다. 개인적으로 책임의 무거움을 깨닫게 되는 20대부터 이 게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헤비 레인]의 게임 디자인은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닙니다. '영화'적인 게임이 으레 그랬듯이 이야기의 변화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면모도 있습니다. 위에서 엔딩의 다양함과 완결성을 들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선택지점이나 거기서 도출될 수 있는 결말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또 버그가 의외로 산재했다는 점이나 걷기 조작이 좀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헤비 레인]이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했던 것 (혹은 가고 싶어 했으나 가지 못했던)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같은 해 나왔던 [레드 데드 리뎀션]하고는 또다른, 게임만의 스토리텔링과 연출에 획기적인 시도를 했고 상당한 수확을 거둬들였습니다. 렉킹볼로 화면의 입체성에 대한 당시 통념을 까부수고 새로운 영상 화법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얻은 영화 [시민 케인]이 그랬듯이 [헤비 레인]은 어드벤처 장르, 나아가 게임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게이머라면 꼭 잡아봐야 할 게임 아닌가 생각합니다.

P.S. 이 게임 이후 나온 [언차티드 3]와 이 게임 이전에 나온 [언차티드 2]의 연출들을 같이 놓고 비교해보시면 [언차티드] 제작진이 [헤비 레인]의 연출에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