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잔혹사: AI야 AI야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 (이하 아날로그) 는 내용으로 보면 "우주에 고립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SF 미스테리물입니다. 25세기 지구. 통일 대한민국에서는 첫 번째 성간 콜로니를 만들기 위하여 먼 우주로 세대우주선을 출항시켰지만 이 우주선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 연락이 끊기고 사라집니다. 수천 년 후, 마침내 이 우주선이 발견되었고 플레이어는 여기서 일어난 일들을 알아내야 합니다.
[아날로그]는 일반적인 비주얼 노벨과 달리 대화보다는 인물들이 남긴 기록이 중심이 되는 게임입니다. 따라서 게임의 중심은 이 로그들을 읽고 AI들에게 보여주면서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얼핏보면 이질적이긴 하지만 [아날로그]는 여전히 비주얼 노벨이라 불릴수 있는 게임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기록들을 통해 '스토리텔링'이 진행되고 그 스토리텔링이 게임 디자인의 중핵을 이루고 있거든요. 다만 크리스틴 러브는 평범한 비주얼 노벨 제작자들과 달리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이런 터치는 자칫하면 단순해질수 있는 이 장르에 새로운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업링크]와 서구식 인터랙티브 픽션의 오마주 같은) 오버드라이브 터미널이 좋은 예입니다.
"우주에 고립된 우주선"이란 SF 장르로써 [아날로그]는 안전한 수준에서 무리하지 않고 성실하게 분위기를 만드는 수준입니다. 애시당초 1인 제작 비주얼 노벨이기도 하니깐요. 하지만 [아날로그]엔 언급한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조선 시대의 악습이였던 남존여비입니다. 그리고 이걸 무기로 크리스틴 러브가 써내린 이야기들은 '남존여비' 사상에 짓눌려진 두 가문의 인간들이 펼치는 근친상간, 동성애, 섹스, 폭력, 음모, 냉동인간이 뒤섞인 2대에 걸쳐 내려가는 어처구니없지만 잔인한 비극입니다. 그리고 이 비극은 단지 기록으로만 머물지 않죠.
자칫하면 편견에 찬 공격으로 떨어질수 있는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 점에서 크리스틴 러브는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한 미싱링크가 살짝 있긴 하지만-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추측으로 짐작할수 있는 수준입니다.-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한 풍부한 디테일과 상상력, 냉정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존중(뮤트가 대표적입니다.)이 담긴 시선으로 그려낸 무궁화호의 비극은 현지인인 한국인들조차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아날로그]가 SF풍으로 재현해내는 조선 시대의 풍습과 여인 잔혹사는...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니깐요.
그리고 이 게임은 보편적인 울림을 획득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잘못된 악습이 세상을 지배하게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개인이 파괴되는가에 대한 경고로 말이죠. 꿈많은 소녀가 끔찍한 사상을 맹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망가지고 결국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암울한 이야기니깐요. 하지만 마냥 퍽퍽하고 어두운 내용은 아닙니다. 게임엔 '처음으로 사랑을 깨닫는 소녀의 설레임' 같은 굉장히 로맨틱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아날로그]의 연애 시뮬레이션적인 요소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까요.
[아날로그]는 비주얼 노벨의 신기원!! 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과 묵직하고 고민해볼만한 화두를 지니고 있는 게임입니다.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를 조금씩 새롭게 바꿔나가는 제작자의 작지만 알찬 실험 정신과 흡인력 있는 문장력, 그리고 매력적인 두 AI 캐릭터는 플레이어들을 이 여성 잔혹사로 인도할 것입니다.
P.S.1 한국어 번역은 훌륭합니다. 그 SF적인 분위기와 사극 분위기 사이가 모호해서 난도가 높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들을 잘 집었더라고요.
P.S.2 전반적인 분위기는 [시스템 쇼크]나 [바이오쇼크]하고 분위기가 닮아 있습니다. 기록 중심의 스토리텔링, 우주선을 배경으로 게임 내내 음산한 기운이 지배한다는 점, 잘못된 사상이 지배한 폐쇄 사회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크리스틴이 [바이오쇼크] 팬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직접적인 영향도 생각해볼만합니다.
P.S.3 반대로 게임 디자인으로 보자면 이 게임은 PS 시절에 나온 게임판 [시리얼 익스퍼리먼츠 레인]하고 닮아있습니다. 단편 단편으로 된 기록들을 모아 하나의 큰 퍼즐을 맞춰간다는 점에서 말이죠. 다만 이 쪽은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만들다보니 그렇게 됬더라....에 가까울듯 합니다. 그리고 [레인]은 UI 디자인이 굉장히 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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