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Test/리뷰

머시너리움 [Machinarium] (2009)

giantroot2010. 7. 14. 13:25

21세기에 등장한, 20세기의 유산들로 빚어진 정파 어드벤처.

사후적으로 보면 [미스트], [가브리엘 나이트 3]와 [그림 판당고], [오미크론] (1990년대 중후반을 전후로) 이후 이야기와 퍼즐로 승부하는 순수한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는 주류 게임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화려한 그래픽과 자극적인 게임 디자인을 선보이는가로 승부를 거는, 3D-HD 게임 시대에 이야기와 순수한 두뇌싸움으로 일관하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를 주류 게임 시장에 내놓는다면, 그건 개그로 오해받기 쉽다. [헤비 레인]과 [앨런 웨이크], [하프 라이프 2]가 웅변하듯이 어드벤처도 급속도로 하이브리드화 되가고 있다.

하지만 [헤비 레인]처럼 헤비한 모션 캡처를 할 수 없는 창조적인 제작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장르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존 디포 시리즈, 텔테일 게임즈, 연말에 공개될 제인 젠슨의 [그레이 매터]가 그렇고 이번 [머시너리움]도 그렇다. 모든 요소를 제외한, 순수한 퍼즐과 이야기로 이뤄진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는 지금도 가능하다.

이 게임의 제작사는 체코에 있는 아마니타 디자인이다. 샘로스트 시리즈로 등장한 많은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이들은, 샘로스트 후속작으로 이 작품을 내놓았다. 비록 샘로스트 시리즈 1편(=데모)밖에 못했지만, 이 게임은 3D 대세를 거스르는듯한 우아한 2D 그래픽과 독창적인 퍼즐 디자인을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 머시너리움은 전작에서 받았던 찬사를 이어가는 작품이다.

게임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미스테리/추리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도입부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 주인공 로봇 조셉은 여러모로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조셉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지는데, 이 방식이 무척 독특하다. 모든 이야기와 대사들은 효과적인 무성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됬는데, 보면 절로 웃음과 감탄사가 동시에 나온다. 머시너리움은 언어의 한계라는 스토리 위주의 게임이 가질수 밖에 없는 산을 재치있게 돌파했다. 물론 도시를 파괴하려는 악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시에 소박한 사랑을 다룬 전반적인 이야기도 잘 다듬어진 편이다.
 
게임의 퍼즐은 적절히 밸런스가 맞춰져 있다. 종종 허들이 높은 퍼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초보자라도 좀 고생하면 풀 수 있는 수준이다. 적어도 힌트 없이 사기적으로 던져지는 퍼즐은 없으며, 힌트도 적절한 수준으로 제공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퍼즐은 마지막 아케이드 액션 게임 아니였나 싶다. [머시너리움]의 퍼즐은 전통적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의 향수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다만 핫스팟 범위가 좁은 것과 중간에 등장하는 오목 AI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라는 흠 아닌 흠을 지적하고 싶다. 

이 게임의 세계관은 20세기에 많이 기대고 있다. 프리츠 랑이 [메트로폴리스]를 구상하면서 머리와 종이에 잔뜩 담았을법한 스팀 펑크 풍 상상력부터 시작해 고풍스러운 재즈 음악, [로봇]의 카렐 차펙과 얀 쯔반크마이어, 프란츠 카프카가 공격했던 동유럽 특유의 관료주의,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 깁슨 식 사이버펑크 등이 그렇다. 하지만 [머시너리움]은 느긋한 태도로 이 재료들을 가지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있으며, 결과 역시 인용 이상의 것이다. 아기자기하지만, 고풍스러운 매력을 갖추고 있다.

[머시너리움]은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거의 수공업에 가까운 2D 그래픽은 전반적으로 무채색 톤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밀함과 정교함, 그리고 포스를 뿜어낸다. [Braid]와 더불어 HD 시대의 2D 그래픽의 미덕을 제대로 보여준다. 얀 쯔반크마이어 같은 재인들로 가득한 걸로 유명한 체코 아트 애니메이션의 저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IDM과 재즈를 넘나드는 배경 음악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두 압도적이다.

[머시너리움]이 어드벤처 게임의 대세를 바꾸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헤비 레인]과 달리, 그들의 작품들은 소박한 판매고를 올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같은 장르의 인디 게임인 [브레이드]처럼 화끈하게 혁신적이지도 않다. 아마니타 디자인이 이 이후로도 초거대 제작사로 성장할 가능성은 더더욱이나 드물어보인다. 어찌보면 [머시너리움]은 그저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세계관을 중시하고 잘 짜여진 퍼즐의 재미를 중시하는 고전적인 2D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의 미덕을 생각해보면 [머시너리움]은 20세기 게임과 작별하기 위해서라도 21세기 게이머들이 꼭 해봐야 하는 게임이다. 특히 당신이 [네버후드], 유럽 아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더더욱 해봐야 한다.

P.S.1 전반적으로 석원님의 Gigi의 [Maintenant] 해설지를 오마쥬한다는 느낌으로 썼다.
P.S.2 후반부는 어머니하고 같이 즐겼는데, 정말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며, 앞으로 이런 게임을 많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된 도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