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 320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

디트로이트의 여름, 미성년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아메리칸 슬립오버] (2010), [팔로우] (2014)에 드러나는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영화 세계

2015/08/06 - [Deeper Into Movie/리뷰] - 팔로우 [It Follows] (2014) 2014년 공개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는 칸 영화제 화제작 중 하나였다. 심지어 4년 후 발표된 미첼의 신작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곧바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개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주목받았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을 읽어보면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평들이 대다수다. 재미있는 점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라는 감독의 커리어에서 보면 [팔로우]는 전작과 다른 이질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미첼의 데뷔작인 2010년작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코미디 드라마에 가까웠던 영화다. 하지만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보면 의외로 이 영화가 [팔로우]랑 공..

불안은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통해 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결핍과 히스테리

2012/10/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딥 엔드 [Deep End] (1970) 2012/11/06 - [Deeper Into Movie/리뷰] - 외침 [The Shout] (1978) 2013/06/28 - [Deeper Into Movie/리뷰] - 에센셜 킬링 [Essenstial Killing] (2010) 2014/01/16 - [Deeper Into Movie/리뷰] - 문라이팅 [Moonlighting] (1982)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로만 폴란스키의 동료로 시작했지만, 폴란드 영화사에서도 잊힌 감독에 가깝다.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1982년에 공개한 [문라이팅]이었으며, 대부분의 영화는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거나 아직도 먼지에 슬어..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3/01 - [Deeper Into Movie/리뷰] - 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Night and Fog] (1956)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알랭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

어둠의 표적 [Straw Dogs] (1971)

2018/01/30 - [Deeper Into Movie/리뷰]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은 매우 이상하게 시작한다. 잠깐 어딘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이미지를 흐린 뒤 타이틀을 띄운다. 그 흐릿한 이미지의 정체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은, 타이틀이 다 뜨고 난 뒤다. 사실 그 이미지는 교회 묘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곧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도착한다. 감독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빠르고 잘라낸 시선 숏으로만 제시되는 에이미에게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노골적인 관음 숏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성적인 이미지를 흘리며, 관음..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1942)

저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을 보면 마치 거창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왕실 암투극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대는 1940년대 폴란드 극단, 즉 동시대다. 이 영화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나치 앞에서 이뤄지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거창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아니다. 영화는 마치 현재의 암울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희극적 설정을 깔아둔다. 마리아와 요셉은 반 나치적인 풍자극과 셰익스피어를 연기하는 폴란드 배우 부부다. 요셉이 고뇌에 잠겨 있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팬인 소빈스키 중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소빈스키에 푹 빠지게 되고 요셉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