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단상

불안은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통해 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결핍과 히스테리

giantroot2020. 4. 30. 01:36

2012/10/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딥 엔드 [Deep End] (1970)

2012/11/06 - [Deeper Into Movie/리뷰] - 외침 [The Shout] (1978)

2013/06/28 - [Deeper Into Movie/리뷰] - 에센셜 킬링 [Essenstial Killing] (2010)

2014/01/16 - [Deeper Into Movie/리뷰] - 문라이팅 [Moonlighting] (1982)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로만 폴란스키의 동료로 시작했지만, 폴란드 영화사에서도 잊힌 감독에 가깝다.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1982년에 공개한 [문라이팅]이었으며, 대부분의 영화는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거나 아직도 먼지에 슬어있다. 심지어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던 시기도 있을 정도다. 차라리 그를 설명하자면 [어벤져스]의 러시아 악당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늙고 고루한 주인공의 러시아계 할아버지를 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권투 선수와 재즈 음악가를 했다는 특이한 이력과 동시에, 개성 강한 폴란드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불안과 결핍, 히스테리의 문제에 천착해온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1960년대 말 폴란드를 떠난 뒤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전전하면서 국외자로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어떤 지점에서는 망명자로서 불안과 히스테리를 안고, 그것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장평은 스콜리모프스키가 197-80년대 영국 시절 만든 영화 세 편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가지고 어떻게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있는지 다뤄볼 생각이다.

  1. 불안의 요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캐릭터에게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바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짜증스러움과 공격적인 태도, 기행, 또는 자존감 부족으로 드러나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불안이 강력하게 드러나며, 이 불안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로 영화를 이끌고 간다는 점이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시나리오 단계부터 캐릭터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하나로 묶는 틀로써 불안이라는 감정을 내세우며, 이 불안이 도무지 나아갈 수 없을때까지 계속 부풀리다가 갑자기 멈춰세우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 결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그 결핍 끝에 정신 착란적인 상황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짜증과 경험에 설득력을 배우의 연기에서 끌어내고 있는데, 감독의 배우 경력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 단락에서는 영국 시절 스콜리모프스키가 만든 세 편의 영화가 서사에서 어떻게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단순한 서사를 선호하는 감독임에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라면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스콜리모프스키가 돌발성과 의외성을 통해 장르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 진척될지를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영화를 만든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종종 장르 영화의 특성에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장르적인 전형성에 대한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불안이 방향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나아가 초현실적인 무드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연기 역시 대사보다는 배우의 제스처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문라이팅] 같은 경우, 대사를 되도록 배제하고 제레미 아이언스의 행동에 집중하는 무성 영화적인 시도에 가까운 대사 활용을 보여주고 있다.

  • [딥 엔드]: 스윙잉 런던의 섹스 코미디가, 섹스 희비극이 되기까지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목욕탕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10대 마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님 때문에 목욕탕에 취직하고, 거기서 같이 일하는 또래 여자인 수잔을 짝사랑하게 된다. 수잔도 마이크를 싫어하진 않는다. 여기까지는 1960년대 서구권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성 혁명의 자유를 누리려는 섹스 코미디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전제다. 수잔 역 역시 당시 스윙잉 런던을 대표했던 모델이자 배우 제인 애셔를 기용하고 있다. 장르의 법칙에서 예상되는 [딥 엔드]의 서사적 귀결은 마이크가 짝사랑하는 수잔과 사랑을 이룬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 코믹한 수난을 거칠 것이다. 실제로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에서는 성적 수난은 코믹한 성장 과정의 일환을 그려진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가 마이크라는 인물을 끌고 가는 방식은 전제가 약속하는 안정된 전개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마이크와 수잔이 일하는 목욕탕은, 손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수잔은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 수잔은 마이크에게 성적 매력이 있으니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마이크는 자신이 마주하게 된 상황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며 끊임없이 어긋난다. 영화의 초반부는 마이크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다. 마이크는 성적으로 노련한 성인 여성들에 주눅이 들거나, 수잔의 남자들이나 경찰 같은 성인 남성에게 수난을 당한다.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는 임신이 가능한 남자 포스터를 뒤집어쓴 장면이라던가, 직장에 등장한 부모님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에게 의존적이며 미숙한 소년 성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지만, 그 호감은 일정선 이상 발전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성적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

반대로 수잔 같은 경우엔 남자들과 원조교제에 익숙해져 있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실제로 수잔은 마이크의 추궁에도 '나는 유부남과 섹스하는 훨씬 나쁜 여자다. 그럼 내가 어떤 여자야 하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스콜리모프스키는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설정을 통해 수잔이 마이크랑 달리, 미성년적 가치관에서 졸업했다는걸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잔은 자신의 육체만을 탐하는 남자들을 경멸한다. 약혼자 크리스에게 너도 날 덮치지 않냐며 쏘아붙이면서 '결혼하면 영원히 나를 가질 수 있다'며 말하는 수잔의 대사는 섹스의 현실을 알아버렸고 결혼의 낭만성도 믿지 않는 캐릭터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수잔은 명백히 성 혁명이나 페미니즘 이후에 가능한 여성상이다. 하지만 수잔은 자신이 처한 성인을 상대로 한 성적 매력의 거래와 착취라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잔과 관계를 맺는 크리스나 수영 강사가 '결혼'과 관련 있다는걸 (크리스는 수잔의 약혼남, 수영 강사는 유부남이다) 생각해보면 가부장의 위선적이고 일탈적인 성적 해방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 때문에 [딥 엔드]의 연애 노선은 배배 꼬여있다. 수잔은 마이크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에서 벗어난 듯한 순수함 때문이지 이성적인 매력 때문에 끌리지 않는다. 반대로 마이크는 현실성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만으로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수잔과 마이크의 관계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직장 동료 이상에서 발전하질 못한다. 이 방향성의 어긋남은 끊임없이 불안과 히스테리로 누적되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마이크가 지하철에 타서 누드 핀업을 수잔에게 들이대며 '너는 그런 여자가 아니잖아'라고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수잔에게 제지당하는 장면은, 마이크의 성 관념이 유아적인 혼돈에 빠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유아적 혼돈을 바라보는 승객의 숏을 통해, 마이크의 히스테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준다. 수영장으로 돌아와 빠트린 누드 핀업이 여성으로 변하는 시퀀스를 마이크의 기대가 마침내 망상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결말을 장식하는 눈 속에서 반지 보석 찾기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파국을 통해 농축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퀀스는 수잔의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사소한 실수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거창하게 확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수잔과 마이크는 보석을 찾기 위해 눈을 퍼다가 물 빠진 수영장에서 녹여서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 눈을 녹이는 수영장을 떠나지 않으며,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역시 반지를 찾은 이후 이뤄진다. 이 과정 도중에 수잔 역시 반지를 찾지 못할까 초조해하며, 심지어 자신과 관계가 있던 유부남 수영 강사에게 필요 이상의 짜증과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인다. 반지를 찾을 수 없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서비스적 관계를 거부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반대로 마이크는 보석을 미끼로 수잔에게 섹스를 거래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 보면 이 거래가 파국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래가 이뤄진 후 수잔과 마이크는 수잔이 지금까지 해왔던 원조교제적인 관계나 다름없어지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현란한 앵글과 편집은, 섹스의 친밀함보다는 기교로 심적인 거리감을 강조하고 있다. 섹스 후 등장하는 마이크의 발악이 수잔을 향한 크리스라던가, 수영 강사의 반응과 다를 게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여기다 갑작스러운 결말을 내면서, 이런 답답함을 박제해버린다. 이 [딥 엔드]가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남성이 처벌한다는 상당히 반 페미니즘적인 읽힐 수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면 수잔과 마이크라는 두 인물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反-성장물이라 볼 수 있다면, 성장하려고 애쓰다가 성인 남성이 당연시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행동 방식에 물들어 여성을 우발적으로 살해해버린 소년의 파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외침]: 음향의 주체가 드러내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

시골 데본에서 진행되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특유의 불안이 공포/괴담 장르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지, 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다른 두 편보다 이야기 구조에 대한 실험과 더불어, 음향과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심리적인 불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앤서니와 레이철은 이상적인 부부라는 껍데기 아래에 각각 간통과 불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의 부부 관계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외침을 배운 찰스 크로슬리가 끼어들면서 해체된다. [외침]이 흥미로운 점은, [딥 엔드]에서 볼 수 있었던 히스테리 연기나 자잘한 사건식 구성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설명을 축소하고 서사를 추상화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침]의 초반부를 보면, 앤서니와 레이철 부부가 이미 등장하고 있음에도 처음 볼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액자 밖 이야기는 크리켓 점수 기록 때문에 정신병동에 온 그레이브스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앤서니 부부와 크로슬리가 등장하는 숏은 처음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 화자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실제로 액자 속 얘기 역시 명백히 크로슬리가 화자임에도 앤서니와 레이철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의 주체는 다시 크로슬리로 바뀌면서 끝나면서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또한 스콜리모프스키와 각본가 마이클 오스틴은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갑작스러운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크로슬리가 사라졌다가 재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앤서니가 몰래 사귀고 있는 여자의 남편이 갑자기 저주로 고통받는 회상 시퀀스, 크로슬리의 영혼을 보관한 돌을 어떤 복선 없이 앤서니가 찾아내는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액자 속 서사가 끝났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앤서니나 레이철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지 않고, 영화 도입부에 등장한 레이철이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을 다시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이야기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은 없이, 불길한 감정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다만 이런 식의 전개가 스콜리모프스키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호러나 괴담 장르의 전형성과 비틂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의 정수를 확인하기엔 다소 아쉽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액자 안에서 진행되는 [외침]의 서사는 사실 장르를 일탈하는 내용은 아니다. 성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해체극과 문명과 야만이라는 갈등 자체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주술이라는 개념도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뉴웨이브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작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소리라는 개념을 부각하며, 소리를 '만드는' 과정을 이미지로 담는데 집착하는 데다 장르에도 반영하면서 긴장감을 만들고 있다. 원작과 달리, [외침]에서 앤서니의 직업은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현대 음악가다. 그는 교회 신자들을 위해 오르간을 연주하면서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에서 예술 작업을 이어간다. 앤서니의 직업과 활동은 그 점에서 서구 문명에 사는 지식인의 믿음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크로슬리는 이런 믿음 체계를 교란하는 자로 등장한다. 앤서니를 만난 크로슬리가 갑자기 종교와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도 이런 연장선에 있다. 전근대성의 파괴성을 지닌 크로슬리에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교회 목사의 말들은 공허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외침]의 서사에서 주목할 만 부분이라면, 크로슬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지점이다. 이때 앤서니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앤서니는 크로슬리가 사라지는 걸 고대했지만, 정작 사라졌을 때 반응은 안심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는 심리를 드러낸다. 이후 이들의 삶은 크로슬리가 등장하기 이전처럼 진행된다.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다면, 앤서니와 간통 상대의 관계일 것인데 스콜리모프스키는 갑작스럽게 교회를 나가는 간통 상대의 숏과 자전거가 걸려 넘어진 숏을 집어넣으면서, 이들의 간통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레이철과 앤서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있다. 심지어 앤서니는 크로슬리의 외침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다시 크로슬리가 등장하는데, 부부의 반응은 크로슬리에게 홀려있는 상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관계를 처음으로 돌리는 척하면서, 이들의 관계에 크로슬리라는 야만적 타자한테 얼마나 잠식돼버렸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레이철과 달리 앤서니는 얼마 안 있어 크로슬리의 홀림에서 벗어나 버리는데, 야만의 세계에서 수컷들은 결국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주술을 걸어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수컷들 간의 적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외침]의 전개는 분명 여성 혐오적인 지점이 있다. 다만 영화의 결말은 이런 구도를 이상하게 틀고 있기도 하다. 상술했듯이 수컷들은 죽거나 병원에 입원해 등장하지 않고 레이철 혼자서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다 앤서니와 레이철의 관계 역시 보기보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라던가, 레이철이 크로슬리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관계를 단순한 주종 관계라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되려 결말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레이철이 남성들에게 해방되었다는 인상마저 준다. 물론 이런 해방이 매우 단편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외침]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딥 엔드]의 갑작스러운 살해라던가 [문라이팅]의 의처증과 거기서 비롯된 망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처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거리 두기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 [문라이팅]: 귀환의 불확실성에 홀로 갇혀버린 폴란드 남자

[문라이팅]은 영국 하위층에 속한 불법 체류자의 비루함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불만족과 히스테리로 연계하는 영화다.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심리에 집중했던 두 영화랑 달리, [문라이팅]은 영국 내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인 텍스트와 1980년대 자유 폴란드 노조 사태라는 정치적인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다. [문라이팅]의 불만족은 귀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입국 심사장에서 시작하는데 [딥 엔드]의 도입부 면접 시퀀스와 닮아있는 구석이 있다. 먼저 장소 설정은 마치 영국이라는 사회가 이 폴란드 남자들을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딥 엔드]가 그렇듯이 [문라이팅]의 주인공들 역시 이 심사 과정이 어색하고 불안하다. 마스터 숏 없이 끊임없이 머리를 다듬는 직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는 점이라던가, 번쩍거리는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조명, 말없이 보기만 하는 얼굴 숏들을 이런 불안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망명한 폴란드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불안함을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감하고도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폴란드인인 노박과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이중 착취 구조에 빠져 있다. [문라이팅]의 시작은 영국의 값싼 급여가 폴란드의 비싼 급여가 될 수 있다고 꾀어 1달 동안 저임금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설정을 통해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와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의 격차와 그 격차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을 보여준다. 도입부 티나 터너 공연을 회상하는 장면은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가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는 감독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란드가 자유 노조 문제로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 착취의 허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착취 구조를 알고 있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폴란드인인 주인공 노박은 부하들과 달리 권력을 쥘 수 있게 되지만 대신 온갖 수난을 당하게 된다.

노박을 불안하게 상황들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로는 어떻게든 사실을 숨기고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노박과 사실을 모르는 세 노동자들의 관계가 파탄난다. 거짓말과 무급으로 착취하는 노박과 모르고 당하는 세 노동자의 관계는 그 점에서 공산당의 착취에 반대하며 정당한 노조 구성을 요구하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의 거울쌍 같은 존재다. 결말의 사실을 알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자유 노조 사태에 대한 씁쓸한 풍자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적은 돈으로 영국에서 작업해야 하는 바람에 재정난이 발생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 결과 빠르게 귀국해 편안하게 살려는 계획이 망가져 버린다. 세 번째로는 아내 안나가 사장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심이다. 이 의심은 폴란드로 돌아가야 해결되지만, 노박은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레흐 바웬사와 자유 노조 운동 때문에 귀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박의 권력은 중요하지만 하찮기 그지없는데, 상황을 조감할 수 없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이다. 서브플롯으로 등장하는 폴란드인들에게 공사 소음을 욕하며 폴란드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영국인들이 대표적이다. 폴란드와 영국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우호적인 외교 관계였지만, 영국의 외국인 혐오증과 더불어 2차 세계 대전의 자유 폴란드군 문제처럼 두 나라에서 버림받은 어둠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서브플롯은 매우 뼈아픈 정치적 문제를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문제가 오가면서 노박은 상당한 박탈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문라이팅]은 [딥 엔드]의 런던 도회의 에피소드 위주의 전개로 돌아가면서도 대사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불법 체류자의 박탈감과 불안감을 파고든다. [문라이팅]은 대사가 많은 영화다. 하지만 정작 대사의 대부분은 외화면에서 펼쳐지는 노박의 영어 내레이션에 기대고 있다. 반대로 영화 속 노박의 대사들은 자막 없는 폴란드어나, 최소한의 문장으로 이뤄진 영어뿐이다. 그렇기에 [문라이팅]은 노박의 심리 묘사는 넘쳐나는데, 화면 속 실제 소통은 부족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폴란드어 밖에 할 줄 모르는 데다 고국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리를 읽을 수 없다. 한마디로 타자로 그려진다. 때문에 [문라이팅]은 1인 퍼포먼스 극에 가까운 영화로 변모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영화 대부분을 노박이 물건을 훔치거나, 어떻게 돈을 아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거나, 동료들을 속이는 방법을 궁리하는 에피소드로 채운다. 자잘한 사건의 연속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는 [딥 엔드]의 구조로 회귀했다고 할 수 있지만, 초라함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초라함은 영화의 엔딩에서 쓸쓸하게 드러난다.

  • 학대당하는 자전거, 결말의 모호함

재미있는 점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전거는, 자동차랑 달리 미성년도 소유할 수 있는 탈 것이다. 탈 것 중에서도 가장 왜소한 모양새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는 남성 주체의 왜소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성은 차를 타지 못하거나, 타더라도 조수석에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고 다니던 자전거 역시 훼손되거나 처박히거나, 아니면 도둑맞기까지 한다. [딥 엔드]에서 마이크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 도입부 이후 [딥 엔드]는 마이크의 자전거를 험하게 다룬다. 그중 가장 노골적인 상징은 자동차 바퀴 아래에 낀 마이크의 자전거다. 자전거가 사라진 마이크는 얼마 안 있어 소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전철을 타는데, 여기서도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등 불안감은 해소되질 못한다. 마이크는 소심하게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내는 것으로 복수를 하지만, 끝내 자동차를 타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대우는 마치 미성년으로써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외침]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성인 남성인 앤서니다. 그렇지만 앤서니는 한 번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간통 대상과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레이철이 운전하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크로슬리와 앤서니의 만남 역시 앤서니의 자전거 바퀴의 바람을 빼면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앤서니는 크로슬리 앞에서 바람 빠진 바퀴에 펌프질하는데, 이 행위는 뒤에 등장하는 앤서니랑 간통 상대가 자전거랑 타는 시퀀스랑 붙어 분명한 성적인 암시를 남긴다. [외침]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미성년의 불안보다는, 크로슬리로 대표되는 야만 앞에 불안한 문명인의 위치를 은유하는 쪽으로 다뤄진다. 한편 [문라이팅]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의미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 가깝다. 노박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지 못한다. 대신 자전거에 기댈 수 밖에 없는데, 기껏 얻은 자전거는 도둑맞고, 새로 자전거를 훔쳐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전반적으로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서 자전거의 대접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데, 주로 인물의 불안을 가중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중요한 단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파국 이후 혼란스러움에서 영화를 끝내는 경향이 있다. [딥 엔드] 같은 경우, 수잔이랑 섹스를 한다는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싸늘한 비극을 동반한 초현실적인 결말에 도달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결말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딥 엔드]는 예정된 운명으로 달려가는 희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외침]은 호러 장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설명을 무시하면서 그 불안을 촉발한다. [외침]의 결말에서 대체 앤서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숏은 크로슬리 시체를 확인하러 온 레이철에서 끝나기 때문에 합당한 설명이 없고 모호한 상태 그대로 남게 된다. 한편 [문라이팅]는 어떻게 영국에서 살아남아 폴란드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 진상을 밝힌 노박이 동료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난다. 안나가 정말로 간통하고 있었는지, 노박과 일당들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갈망하는 목표나 정황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주지 않은 채 끝나는 결론을 선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불안의 형상화
  • 촬영과 편집의 파편화, 초현실적 투사

그렇다면 스콜리모프스키는 어떤 식으로 불안을 영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먼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촬영과 편집이 파편화된 방식으로 이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걸 지적해야 할 듯하다.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몽타주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떨어지는 빨간 액체에서 좀 아웃되어 자전거라는 걸 밝히는 숏과 결말 부근에 등장하는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이다. 전자를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딥 엔드]라는 영화가 도착할 결말이, 해피 엔딩이 아닌 배드 엔딩에 가깝다는 걸 액체의 질감과 기괴함을 통해 감각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후자 같은 경우 스콜리모프스키는 눈 같은 신체 부위만을 담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짧은 숏, 부감 숏을 빠르게 교차하면서 섹스의 쾌락과 행위를 시각화한다. 하지만 이 몽타주에서 에로스 행위는 매우 짧게 제시되기 때문에 감각을 파편화하는 쪽에 가깝다. 이 장면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파편화가 에로스를 싸늘하게 분해하는 쪽에 가깝다.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중에서도 촬영과 몽타주의 파편화가 심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줌 사용도 그렇지만, 영화는 음향을 증폭하거나 몽타주를 추상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감각 기관의 불연속성과 압도됨을 표현하고 있다. [외침]에서 주목할 장면은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은 앤서니가 권력을 상실하고,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서사의 변곡점이라 할만하다. 이 섹스 시퀀스가 [딥 엔드]가 그렇듯이 파편화된 숏의 연결로 이뤄져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런데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섹스 시퀀스에서 갑자기 앤서니의 스튜디오에 걸려있던 나체 여자 사진을 옷을 다 벗은 레이철이 흉내 내는듯한 흑백 숏을 집어넣는다. 레이철은 어째서 스튜디오에 걸린 사진의 자세를 흉내 냈을까? 우선 이 시퀀스의 주체가 누군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답은 간단하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시퀀스를 앤서니가 달리는 숏이랑 교차 편집하고 있다. 즉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앤서니의 상상이다. 요컨대 레이철이 자세를 흉내 낸 것은, 앤서니가 늘 머무는 스튜디오의 풍경이 앤서니의 악몽과 뒤섞였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점에서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호러 장르의 불안과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문라이팅]은 파편화된 몽타주는 자제하되, 지속해서 등장하는 텔레비전 숏과 더불어 줌과 클로즈업을 통해 노박의 생존을 위한 범죄과 초조함을 물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라이팅]의 초현실주의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고 난 뒤, 잠자리에 든 노박이 안나의 환영을 보는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안나의 환영이 실체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문라이팅]에서 텔레비전은 고국 폴란드의 상황을 보여주는 Showing 역할이기도 하지만, 노박의 불안을 투사 Projection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딥 엔드]와 [외침]에도 그랬듯이,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는 주인공의 무의식이 투영된 이미지의 실체화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그 실체화는 주인공의 불안과 결핍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노박이 아내의 환영을 보자마자 브라운관을 깨버리는 장면은, 스콜리모프스키가 스트레스나 망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 고립과 소외, 컨텍스트로써 음향

한편 음향이라는 부분에서도 주목할 점이 많다. 재즈 연주자였다는 이력답게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적 특징 중 하나라면, 망명자로서 망명한 국가의 영화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때문인지 몰라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음향을 통해 불안과 고립을 강조함과 동시에 문화적 컨텍스트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딥 엔드] 같은 경우에는 당시 유명했던 록이나 팝 음악가가 참여하고 있다. 영국 포크 가수 캣 스티븐스의 'But I Might Die Tonight'하고 독일 록 밴드 캔의 'Mother Sky'가 대표적이다. 'But I Might Die Tonight' 같은 경우 애상적인 멜로디와 외침으로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Mother Sky' 같은 경우에는 신경질적이고 반복적인 기타 독주, 의미 없는 가사를 읊조리다 외치는 보컬을 통해 마이크가 밤거리를 방황하는 시퀀스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두 가수의 국적을 촬영 장소랑 연계하면 흥미로운 해설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딥 엔드]는 실외 장면을 포함한 절반은 영국에서 찍었지만, 실내 장면을 포함한 다른 절반은 영국이 아닌 서독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두 삽입곡을 통해 이 영화가 두 개의 국가에서 촬영했다는 걸 주지해주길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딥 엔드]의 삽입곡은 어떤 지점에서는 당시 영국과 서독일의 문화을 반영하면서, 감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삽입곡이 등장하지 않는 [외침]이나 [문라이팅]를 살펴보자. [외침] 같은 경우엔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복잡한 구성의 록 음악을 추구했던 밴드 제네시스의 멤버를 기용해 음악을 맡기고 있다. 사운드트랙 자체는 호러 영화의 전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음향을 문명과 야만의 대비와 연계하는 방식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영화는 앤서니가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채집하고 만드는 장면을 공들여 보여준다. 여기서 앤서니의 채집과 합성 행위가 앤서니의 육체하고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듯 하다. 병에 사로잡힌 벌레가 내는 음이라던가 연장 도구, 담배를 이용해 만든 음들은 앤서니의 성대를 거치지 않고 마이크로 녹음된 뒤, 신시사이저로 합성된다. 요컨대 앤서니의 작업과 생활은 파편화되어 있고, 기계를 통해 인위적인 합성 과정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의 '외침'을 보자. 이 외침을 보여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크로슬리의 얼굴과 입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이 외침이 크로슬리가 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의 합성된 소리가 기괴하지만, 파괴력이 없다면, 크로슬리의 육성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크로슬리의 육성을 통해 전해지는 외침은 이런 안정 되어 있는 문명인의 파편화와 합성 개념을 교란하고 있다. 앤서니의 작업에 대한 크로슬리의 조롱이라던가, 외침 장면 이후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 크로슬리가 사라진 뒤 앤서니가 외침을 흉내낸다는 점은 그 점에서 육성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과 파편화된 문명의 허약함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라이팅]는 전작들과 달리 사운드트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대신 침묵과 소음의 대비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이 영화의 대사가 외화면에서는 지나치게 과다하지만 내화면에서는 지나치게 부족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은 언급한 적이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대사 대신 내화면을 채워 넣는 음향은 공사 소음과 텔레비전 뉴스다. 먼저 공사 소음 같은 경우, 작업 특성상 전기톱과 드릴이 만들어내는 살벌한 음향들이 대부분이다. 이 음향은 영화 내내 등장하여 폴란드어 대사를 지우거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음의 살벌함은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노박과 다른 동료들과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한편 [문라이팅]은 텔레비전이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인데, 노박과 동료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보는 텔레비전은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거나, 노박의 음모로 보이질 않는다. 반대로 노박이 혼자 있을 때 들려오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를 전달하는 뉴스는 영어를 들을 수 있는 노박의 초조함을 가중한다. 노박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을 가로막지만, 반대로 텔레비전이 전하는 현실에 위기의식과 소외감을 느낀다. [문라이팅]은 그 점에서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립'과 '소외'라는 상황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1. 결론

세 편의 영화로 살펴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 세계는 크게는 불안함을 일으키는 서사적 요소, 음향에 대한 민감함, 파편화된 숏과 편집,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투사 및 형상화로 종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영화적 조류에 대한 민감함이라던가 세 편에 등장하는 자전거의 활용 역시 주목할만하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의 독특함은 불안함과 히스테리라는 비가시적인 심리 상태를 형상화하는데서 드러난다. 물론 이런 연출이 폴란드 시절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변해왔는지를 논증할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2011년 영국판 [딥 엔드] 블루레이 발매를 알리는 씨네21 기사에서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자기 영화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며",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의 DVD는 지금도 희귀한 편"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다. 8년이나 지난 지금 역시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한 두 편 정도 더 복원되었을 뿐, 제대로 된 회고전 역시 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 대한 담론은 다른 폴란드 출신 감독들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그나마 쉽게 볼 수 있는 스콜리프스키의 영화를 분석한 이 장평이 감독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