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돌한다. 고로 존재한다.
*2004년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가 아닙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하면 즉각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변태적이다. [플라이], [네이키드 런치]의 신체와 관련된 상상력, [비디오드롬], [엑시스턴즈]의 생체적인 도구들, [스파이더], [엠 버터플라이]의 금기된 성적 소재 등 그의 영화는 불온한 상상력들로 넘쳐난다. 이 중 [스파이더], [플라이]만 제대로 봤지만, 그의 영화는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류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번에 본 [크래쉬]는 그 중 '신체와 관련된 상상력'과 '금기된 성적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방송국 PD인 제임스 발라드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서로의 성적 욕구를 괴상한 방식으로 푼다. 바로 외도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줘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임스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고 거기서 의사인 헬렌을 만나게 된다. 헬렌은 그와 캐서린을 본을 소개하고, 그들은 자동차 충돌과 그에 관련된 성적 관계로 빨려들어가는데...
이 영화의 성적 관계는 다양하다. 일반적인 성생활부터 시작해서 동성애, 페티시즘, 사디즘, 마조히즘, 항문 성교, 관음증 등 인간사의 성 관계를 총 망라한 듯한 느낌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런 성적 관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부분에 불과한데, 이 영화의 궁극은 바로 자동차 충돌로 인한 성 에너지 분출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속된 말로 말하자면 '교통사고에 하악하악'거리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왜 굳이 자동차인가? 왜 등장인물들은 자동차 충돌에 성적 분출을 느끼는가?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는 주지하다시피, 제 2의 발이며, 자신을 상징한다. 자동차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며, 그 사람이 어떤 자동차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시 계급화된다. 서점을 가보면 다양한 차량 잡지가 쌓여있으며, 운전 면허를 얻을 수 없는 청소년들(특히 남자) 조차 차를 가지길 원한다. 이렇게 따지자면 [트랜스포머]는 차에 관한 남성(특히 미국 아해들) 판타지다. 중고차 뽑았는데 그 차가 세계를 구하는 정의의 영웅이며, 멋진 스포츠카로 변신해 잘 생긴 여자도 따라온다니!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닌가.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그런 점들을 확장시켜 차를 제 2의 신체로 은유한다. 이 영화에서 딱 한 장면만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신체 변형 및 훼손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지만, 여전히 변태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차는 아까도 적었듯이 신체나 다름없으며 그 차들이 충돌하는 것은 신체의 충돌과 그로 파생되는 성관계나 다름 없다. 충돌의 강도는 섹스의 강도이며, 속도는 오르가즘이다.
등장인물들이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여피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롤링 스톤즈 노래 처럼 부유하고 한량한 이들은 '만족할 수 없는' 헌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인 차에 집착하는 것이다. 결국 크로넨버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테크놀러지는 인간에게 낡은 육체 대신 새로운 육체를 부여했다. 그러니 새로운 육체엔 새 삶의 방식을. 이렇게 적고 보니 사이버펑크 작가의 주장하고 비슷한 것 같다.
이런 불온한 상상력 속에서 나타나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은 불쾌하다. 이 영화의 섹스 신은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뉴라인에서 제작했다.)했다는 점을 감안 할때 꽤 과격한 편이다. 신체 흔적에 대한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 요소로 가득찬 그들의 섹스는 관객에게 성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 '이 XX들 뭐야?'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의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유도 그 점일 듯 싶다. 절대로 관객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제임스가 남기는 "다음번엔 될꺼야 다음번엔"라는 대사는 상당히 씁쓸한 맛을 남긴다. 돌이켜 보면 이 영화 속 성적 관계는 절대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아니였다. 어딘가 뒤틀리고 불쾌하며, 소통이란 느낌은 없는 만족과는 거리가 먼 성적 관계였다. 제임스의 이 대사는 새 육체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 고독한 사람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강도를 세게 해야지 진정으로 만족에 도달 할 수 있냐라고. 이를 통해 감독은 '새로운 육체'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을 나타내고 있다.
[크래쉬]는 차가운 영화다. 크롬 위주의 색감, 강박적인 카메라 세팅 및 편집(촬영감독이 [록키 호러 픽쳐 쇼] 출신이다.), 배우들의 훌륭하지만 감동하기엔 거리가 있는 연기, 하워드 쇼어의 음울한 영화음악 등 관객의 감정 이입을 끊임 없이 배제하며 시종일관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느긋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좀 낭비되었다 하는 캐릭터나 스토리도 있었다.(헬렌과 가브리엘은 할 얘기가 더 있는데 그냥 끝나버린듯한 느낌이였다.) 사실 이 영화는 드라마 구조보다 그 과정에 담겨있는 캐릭터들의 대사와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남에게 추천하기에는 뭣한 영화다. 일단 상업적 재미는 거의 없다. (있다면 섹스 정도일까. 하지만 아까도 적었듯이 음란함보다 불쾌함이 압도한다.) 솔직히 영화 마지막엔 '이거 뭥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데, 테크놀러지 시대의 성과 인간관계 대한 고찰은 지독히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야마모토 히데오의 만화 [호문쿨루스]를 괜찮게 읽었다면 보고 후회하진 않을듯 싶다. 둘다 변태적인 씁쓸함이라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PS. 부제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따왔다.
PS2. 뉴라인 진짜 DVD 하나는 잘 만든다. 10년 됬는데도 영상의 선명도 및 색감이 상당하다. 향후 HD로 나오면 어떨지 궁금하다.
PS3. 한때 이 영화 때문에 난리 났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쯤이면 소개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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