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연쇄 살인 사건들을 다룬 잘 만든 영화들은 그 사회에 대한 증언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통해 80년대 억압적인 한국 사회상을 찾아낼 수 있고, 최근에 개봉한 [추격자] 역시 그랬다.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줬던 [세븐](1995)의 스릴러 세계에 몸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븐]과 다른 방식으로 한 시대와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실제 60-70년대 미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조디악 킬러를 다룬 논픽션 물을 영화화한 이 영화는 네 명의 인물을 내세워 조디악 킬러의 행적을 쫓아간다. 원작자 만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그와 같은 신문사를 다녔던 선배 기자 폴 에이버리, 사건 담당 형사였던 데이빗 토스키와 윌리엄 암스트롱. 이들 모두 조디악 킬러를 뒤쫓다가 거대한 미궁으로 빠져들어가는데...
핀처의 전작들이 상당히 현실과 다른 인공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면, [조디악]은 6-70년대 미국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딱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테크닉과 자극으로 무장한 [세븐]때와 달리 상당히 사실적인 분위기를 추구한다. 심지어 그는 화려한 오프닝 크레딧마저 버렸는데, [패닉 룸]의 과시적인 오프닝 크레딧에 비해 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간단한 자막으로 처리해버린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영화같이 고전적인 느낌이 난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하게 고전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부분 부분 그의 현란한 연출이 살아나는 장면도 있고, (고속촬영으로 빌딩 건설 장면을 찍는 와중에 그 위에 대사가 오버랩 되는 장면) 전통적인 필름이 아닌 새로운 기술인 HD카메라로 촬영으로 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들은 주제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진다. 그 동안 핀처 감독의 단점으로 스타일 과잉이 손꼽힌 것을 생각하면 이건 분명 상당한 발전이다.
[조디악]은 스릴러의 정석에 무심한 편이다. 이 영화의 살인 장면들은 냉정하고 간결한데다가, 그것마저 중심이 아니다. 범인 역시 후반부까지 숨기는 대부분의 스릴러와 달리, 중반부에 확실히 알려줘 버린다. 오히려 이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부분은 조디악이라는 살인마를 쫓는 사람들이 붕괴돼가는 모습이다. 그들은 불분명한 진실에 고통받고, 그 진실을 확고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진실들과 노력들은 의심받고 쉽게 부서져 버린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레이스미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종합해 그럴듯한 결론을 형사에게 내 보인다. 하지만 형사는 '당신의 주장은 일리가 있으나, 증거가 없다'라고 반박하고 그가 지목한 범인은 그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 버린다.
이를 통해 영화는 진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을 표출하고 있다. 조디악 연쇄 살인사건은 결국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고 그 진실을 밝혀 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가혹한 파국만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의 형식적 해피 엔딩은 오히려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진실을 진실이라 부르지 못하고 묻혀 있다가 모든 것이 망각 됐을 때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상당히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조디악 킬러가 활동하던 6-7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68혁명의 실패 등 사회는 진실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대중음악적으로 이상적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사이키델릭 록이 몰락했던 시대였다. [조디악]은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상이 몰락해 아무런 대안도 없었던 암담했던 한 시대를 꿰뚫어 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가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왔다 해도, 여전히 현재에도 충분히 먹힌다. ‘확고한 진실’이라는 말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디악]은 말 그대로 성숙한 핀처가 만들어낸 영화다. 그만의 시각적 스타일도 완벽하게 이야기와 조율이 되어있고, 마지막에 전달하고 싶은 주제 역시 성숙해졌다. 스릴러의 정석을 따르지 않았더라도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예전에 보여줬던 과시적인 스타일을 그리워하며 이 영화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핀처가 자기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작품 세계를 변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이고, 그것을 훌륭하게 성취해냈다. 다만 일반적인 스릴러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뱀다리. 이 영화 리뷰를 쓰면서, 나는 한국사를 생각했고, [살인의 추억]을 생각했다. 조금 우울했다. 한국사 대부분은 왜곡된 진실들이 차지하고 있고, [조디악]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던 [살인의 추억]은 확신범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네 사회에서 진실의 위치는 [조디악]이 보여준 그것보다 한창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지.
2008년 3월 14일 DVD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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