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란 기본적으로 포드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는 산업이다. 적어도 대다수의 관객이 기꺼이 표를 살 영화들은, 배우와 감독, 스태프의 영역이 분명히 나뉘어 있었고, 통제가 이뤄진 공간 속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하지만 컴퓨터를 시점으로 디지털 캠코더와 휴대 전화가 등장하면서 현장에서의 영화 촬영과 편집은 서서히 그 문턱을 낮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도그마 95의 위악성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 낮아진 문턱을 제일 민감하게 알아차렸던 국가는 다름 아닌 이란이다. 이미 많은 감독이 디지털 캠코더의 조악한 기동성으로 제2의 프리 시네마/시네마 베리테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지만, 이란은 그 어디보다도 카메라를 자유롭게 놓고 촬영할 수 없었던 국가였기에 훨씬 그 가능성에 맹렬히 매달렸다.
시작은 2002년 공개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텐》이었다. 《텐》은 여러 지점에서 블랙박스 시네마라 부를만한 영역을 탐구한 영화였다. 여기서 블랙박스의 특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블랙박스는 기본적으로 차량이나 비행기 같은 탑승물의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존재한다. 동시에 블랙박스 내 기록 도구들은 자신이 속한 체계가 잘 작동하고 있는가의 '감시'로서도 기능한다.
키아로스타미가 정말로 블랙박스를 동원한 건 아니지만, 《텐》에서 그가 쓴 촬영 방식은 블랙박스 체계와 거의 유사했다. 키아로스타미는 디지털 캠코더를 차 안 운전석/조수석 방향에 배치한 후, 끊임없이 카메라를 돌려가며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자, 나아가 운전사와 승객의 모습을 찍었다. 명백히 계획한 세 장면-샷을 제외하면, 키아로스타미는 차 안에서 배우들 간에 일어나는 대화와 사건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들을 편집실에 들어간 후에야 편집으로 샷과 몽타주로 구체화했다. 주연을 맡은 마니아 악바리가 "《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찍혀졌다"고 한 발언은 《텐》이 어느 정도 블랙박스가 지닌 감시의 태도를 빌려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증명한다.
《텐》은 그 점에서 차 안을 일종의 미시 사회 (여기서는 이란 여성 사회)의 축소로 인식하고, 카메라가 그곳의 블랙박스로 기능해 어떤 체계 나아가 체제를 축소해 기록하고자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는 감시를 통한 체제 유지가 아닌, 오히려 돌출에 가깝다. 키아로스타미의 디지털카메라는 '장면화'나 '미장센'의 강박이 없다. 체제에 불만이 있지만 공개적으로 발화할 수 없는 이란 여성들이 차량이라는 사적이면서도 완전히 사적이지 않은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발화하는 순간이 큰 편집 없이 담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샷-리버스 샷은 카메라 두 대의 존재를 인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키아로스타미는 《텐》을 통해 필름 기반 포드주의적-체제 순응적 제작 체계에서 벗어나 비디오의 가벼움을 만끽하며, 개념에 기반한 영화를 만들었다. 동시에 키아로스타미는 더 이상 영화를 위한 순간을 연출하지 않고, 일상의 순간에 쉼 없이 이어갈 수 있는 비디오 시선을 배치하는 식으로 영화를 틈입시켜 개인 속에 눌러져 있던 정치 사회적 불만과 충돌을 돌출시킨다.
키아로스타미가 《쉬린》 이후 해외로 떠나고, 그 사이 반정부 비판으로 창작 금지령을 받고 집에 갇힌 자파르 파나히는, 10여 년 전 스승의 영화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나히가 블랙박스 디지털 시네마 개념을 다시 들고 온 건 좀 더 뒤의 얘기다. 디지털 파나히의 첫 막을 알리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만들면서 파나히가 먼저 떠올리는 건, 디지털 캠코더를 든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 동료 모지타바 미르타마숩이다. 그 점에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원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페르시아어 원제를 살펴보면 ‘영화’에 해당하는 단어를, 페르시아어의 ‘영화’가 아닌 영어 Film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걸 알 수 있다. 파나히는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이 ‘필름Film’ 영화 제작 방식을 쓸 수 없다는 걸 알고, 매개체로서 필름과 산업적 생산 요소로서 필름을 부정하면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텐》에서 엿보았던 비디오 매체의 '어디든지 틈입시킬 수 있는 가벼움'과 1인 밴드로서의 영화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보고하고 돌파하기로 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필름이 아닌 매체를 활용한 정치 영화 선언이다.
그렇기에 자파르 파나히는 배우도, 세트도, 조명도, 영화 카메라도 없는 자기 집에서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과 함께, 디지털 ‘비디오’이자 다큐멘터리로서 자신의 영화를 시작한다. 자파르 파나히가 밥을 먹으며 스마트폰을 보는 정면 샷에서 시작하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식사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본능을 행하는 행위지만, 막상 영화에서는 간과되거나 축약되거나 반대로 극적으로 장면화된다. ‘필름’으로서 영화에서 식사 행위는 장면화되기 의외로 까다로웠던 행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 특히 ‘홈비디오’에서 식사는 다른 양상을 띤다. 물론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촬영하던 시절엔, 홈비디오를 방송 콘텐츠화하는 유튜브나 먹방이라는 영상 문화가 개념이 본격화되진 않았다. 파나히 역시 먹방이라는 오락적인 개념으로 도입부 식사 장면을 찍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홈 무비가 등장한 이래로 자신들이 밥을 먹는 걸 찍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생성되고 있을 잔치 영상들이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잔치는 음식을 앞에 두고 특정한 사회적 결속을 다루는 제의(대표적으로 관혼상제)를 벌이는 행위이며, 행위의 끝에 음식들을 먹어 치움으로써 사람들 간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한다. 홈 무비에서 홈비디오로 넘어오면서, 식사 나아가 잔치 영상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어떤 순간의 포착에 관대해진 비디오 매체의 기술적/미학적인 경제성하고도 관련 있다. 반드시 현상을 거쳐야 볼 수 있는 필름과 달리, 비디오테이프는 비교적 값싸고 즉물적이다. 촬영 후 비디오 덱이나 컴퓨터 같은 디지털 기반의 매개체에 비디오를 넣으면 볼 수 있기 떄문이다.
이 경제성을 통해‘비디오’로서 영화는 '필름'으로서 영화가 마주해야 했던 어떤 강박관념과 무게를 벗어던진다. 언제든지 부담 없이 놓고 찍을 수 있기에 어느 순간에도 존재할 수 있게 때문이다. 따라서 비디오테이프, 나아가 디지털 데이터가 필름을 넘어서 영상의 물질적 기초를 이뤄가는 1980년대 이후 영화 내지는 영상은 더욱더 과감하게 촬영 대상의 영역을 확장해 갔다. 소형화된 카메라는 침투할 수 없었거나 지나치게 사소하다 싶었던 순간까지 파고들었고, 개인 역시 저렴해진 카메라를 소유하는데 거리낌 없어져 일종의 기록 과잉 시대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2000년대 말에 이르면 스마트 기기와 유튜브 같은 영상 사이트의 등장으로 훨씬 급진적인 빅뱅을 일으키기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의 '먹방' 도입부는 그 점에서 스마트 기기와 디지털 비디오를 통해 필름으로서 영화가 은연중에 추구해야만 했던 '미장센' 내지는 '미학화'의 무게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파나히는 2000년대 이후 비디오와 필름 두 매체 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다큐멘터리와 영화 간의 경계가 많이 흐려졌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파나히에게 많은 영감을 준 《텐》 에서도 마니아 악바리라는 배우의 다큐멘터리적인 순간과 분명 다른 배우가 개입했을 허구적인 순간은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진동하며 관객의 인지 세계를 의심케 했다. 파나히는 여기서 영감을 받아, 디지털 비디오를 매개체로 자신을 모델이자 배우로 삼아 투영한다.
그리고 그 투영이 이란 정부와 검열 기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1990년대부터 등장했던 포드주의에 저항하는 캠코더 기반 게릴라 영화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틈을 벌리는 영화다. 파나히는 《텐》에서 ‘1인 밴드 영화’를 실천했던 키아로스타미의 실험을 이어가, 자기 집에서 자연인으로서 자신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기존 영화 제작 체계에 내포된 체제 순응성을 해체하며 틈을 벌린다.
하지만 파나히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그 틈을 벌리는 방식은 아직까진 조심스럽다. 모지타바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집에 들어온 뒤, 파나히는 만들지 못했던 ‘필름’으로서의 영화를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재현하려는 ‘필름’으로서의 영화는 파나히 자신의 상황의 ‘거울’ 쌍을 이루고 있다. 파나히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듯이 이란 소녀가 감금된 극 중 상황을 자신과 모지타바가 함께 상상해 가며 흔적들로 설명한다.
하지만 파나히는 금방 좌절하고 마는데, ‘필름’을 위해 쓰인 허구가 도무지 ‘비디오’의 거리낌 없는 노출에서 성립되지 않고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필름 카메라 자리에 비디오 캠코더를 놓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는 기존의 ‘필름’-포드주의하고 별반 다를 게 없어지며, 지금 당장의 총체적인 불가능을 뚫을 수 없다. 즉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파나히는 이전의 체계로 회귀할 수 없게 가로막혀 있다.
그렇게 필름으로서 영화를 제한된 공간과 비디오 시선 속에서 성립시켜 보려는 시도가 좌절한 후, 파나히는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와 스크린, 촬영 기기를 오간다. 제일 먼저 파나히가 DVD로 이전에 찍었던 '필름'으로서의 영화를 다시 보는 장면이 있다. 이때 디지털 매체로서 DVD는 필름으로서 영화를 축소해 보존하고 그 순간을 다시금 환기하는 보조기억장치로 작동한다.
이 보조기억장치를 통해 파나히는 현장에서 배우를 통제할 수 없었던 순간을 그대로 영화에 포함해야 했던 걸 떠올리는데, 그 순간 파나히는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자신이 '감독'으로 있었던 필름으로서 영화를 빠져나와서 비디오로서 영화의 '배우'가 되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배우'의 위치로 갔을 때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가? 파나히는 시나리오가 내정했던 방향을 이탈하는 순간의 당혹감과 호기심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디제시스 밖 통제자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 역시 디제시스에 포함된 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영화를 상상한다. 파나히는 디지털 캠코더로 대표되는, 비디오 시선과 나아가 디지털 매체의 대안성에 기반한 디지털 시네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내려고 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후반부는,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하나는 파나히 본인의 스마트폰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전면에서 나서진 않지만 가까이 가서 볼 수 없는 파나히 본인을 대신해 새해 불꽃놀이를 기록한다. 초기 스마트폰 영화이기 떄문에 이 스마트폰 영상은 조악하고 거칠다. 하지만 이때 파나히는 키아로스타미와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비디오 시네마의 가능성을 넌지시 지목한다. 바로 한 개인 신체의 보조 도구이자 일부로서의 비디오카메라다. 영화 후반부부터 캠코더를 들고 온 모지타바는 먼저 퇴장하고 끝날 때까지 파나히는 모지타바가 준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을 기록한다.
이때 파나히는 단 한 번도 컷을 나누지 않고 캠코더를 통해 롱 테이크로 청년의 모습을 촬영하는데, 마치 '필름'으로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을 최대한 비디오 시선의 힘을 빌려 버텨보겠다는 심정과도 같다. 하지만 파나히는 영화의 결말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아파트 대문에 도착하자 파나히의 상황을 알고 있는 청년은 "누가 감독님을 볼지도 모른다"라며 제지하고 캠코더를 든 파나히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선다. 그 멈춰 선 자리에서 거대한 철문과 위로 터지는 폭죽놀이를 바라보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끝난다.
이상하게도 파나히는 이 결말 이후 《노 베어스》 이전까지 카메라가 돌연 한 자리에서 멈춰서고, 인물들이 전진하면서 영화를 끝내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파나히는 필름과 차별화된 비디오 시선을 현실에 틈입시켜 '장면화' 내지는 '미장센'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키아로스타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이 승계는 키아로스타미 때보다도 훨씬 절박한데, 궁극적인 자유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파나히는 이 과정에서 영화 만들기 내지는 이미지 포착 자체가 근본적으로 정치 사회적인 영토와 맥락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의 끝은 파나히는 카메라를 멈춰 세우고 롱 샷으로 작아지는 자신과 다른 인물들을 본다. 《노 베어스》 이전 파나히 영화들의 결말엔 억압적인 이란 영토에서 사라지면서 동시에 나아가고 싶다는 정과 동 간의 진폭이 가득하다. 영화를 내놓을수록 이 멈춰 세움과 전진은 점점 더 정교히 발전했고 반문하는 과정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장편 영화 위주로 하나씩 확인하고자 한다.
우선 3년 만에 각본가 캄보지아 파토비와 함께 돌아온 《닫힌 커튼》은 좀 더 전통적인 극영화 영역으로 회귀하면서, 파나히 영화 중에서는 가장 부조리 문학적인 전통에 천착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집에 갇힌 여자아이의 영화를 구상했던 파나히는, 소규모 제작진으로 별장에 갇힌 작가/감독이라는 영화로 계획을 우회적으로 실현한다. 이 갇힌 작가의 공간에 남자와 여자 멜리카가 들어오면서 긴장이 흐르게 되고, 파나히는 이 긴장감과 미스터리로 어떤 부조리한 미궁으로 쌓아간다. 장르로 보자면 《닫힌 커튼》은 명백히 홈 인베이전, 타자가 집에 침입하는 서스펜스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시작은 집으로 들어오는 작가를 찍는 고정된 카메라다. 파나히는 거대한 창살과 가림막 프레임 사이로 롱 샷 롱 테이크 속에서 차를 멈춰 세우고 짐을 들고 들어오는 작가의 모습을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상술했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결말 샷을 생각해 보면, 파나히는 어떤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인물의 이미지로 전작의 가로막힌 결말에 대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조금 뒤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이 집에 들어오는 작가 역시 별장의 소유주에게서 '빌린' 것이다. 즉 자기 집이 아니다. 오프닝의 육중한 창살과 가림막들은 작가에게도 방어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닫힌 커튼》은 이중의 홈 인베이전 영화가 된다. (비록 정당한 과정으로 빌렸지만) 타자의 집에 침입하고 유폐한 작가에게 침입한 남매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닫힌 커튼》은 자기 반영적이며 허구의 경계선을 탐구하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허구의 집에서 미스터리를 유발하는 인물들의 행위와 그 행위의 과정이 망으로 뻗어가며 모호한 미궁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자크 리베트의 영향력도 보인다. 하지만 리베트랑 달리 파나히의 미궁은 좀 더 우울하고 도피적이며, 종종 굳게 닫힌 허구의 집을 둘러싼 방어막을 뜯어내려는 폭력적인 행위로 돌출된다. 집에 들어온 여성이 커튼들을 찢어발기거나, 외부인들이 집에 들어오려고 집을 파괴하는 외재 음향적 연출들이 그렇다.
이는 파나히와 캄보지아가 홈 인베이전 장르의 갈등 구조를 이란 내 정치적인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기에 발생한다. 홈 인베이전 장르에서 외부인은 필연적으로 집을 파괴할 수밖에 없고, 집주인 역시 위협에 노출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파나히는 그 위협에 노출된 상황이야말로 허구가 최종적으로 마주해야 할 진실의 순간이자, 수용자와의 대화이며, 동시에 정치적 폭력과 마주함이라 본다. 허구화든 현실의 포착이든 필연적으로 세상과 마주해야 하지만, 그것은 강제적이고 말살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 영화 역시 허가 없이 만든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디지털 비디오가 누리는 자유 역시 취약한 영역에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닫힌 커튼》은 1인 다큐멘터리 정체성이 강했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 비해 좀 더 허구에 기울어진 영화이며, 영화 속에서도 보이듯이 제작 체계 역시 소규모로나마 기존 포드주의적인 전통으로 회귀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가 워낙 극단적이라 그렇지, 어느 정도 기존 파나히 영화 제작 체계가 일부 돌아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닫힌 커튼》은 이전과 달리 자신이 디지털 비디오의 자유와 미학적인 특질을 활용하고 있다는 걸 종종 노출한다. 정확히는 이 영화의 비디오 시선인 아이폰 카메라가 어디서 무엇을 목격하는가의 문제가 그 노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 영화의 아이폰 카메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작가가 침입자인 멜리카와 그의 오빠가 어떻게 이 집에 침입했는지 재현할 때다. 이 장면에서 파나히는 허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재현하려는 작가의 행위를 일종의 재현 다큐멘터리처럼 구성한다. 이때 아이폰 카메라는 영화를 찍는 카메라 반대편에서 진실성을 증명하고 기록하려는 도구로 변모한다. 작가가 위태롭게 아이폰 카메라를 올려놓고 사건을 재현하는 모습은 그 점에서, 디지털 비디오 나아가 스마트 기기의 촬영이 자신이 속해 있었던 전통적인 극영화와 어떤 아슬아슬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형상화하고 있다.
좀 더 극적인 틈입은, 자살의 순간에 등장한다. 《닫힌 커튼》은 자살 암시와 시도가 자주 등장하는 영화다. 실제로 파나히는 탄압 이후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닫힌 커튼》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파나히는 《닫힌 커튼》 내에서 자살 충동을 고백하거나 자살하려는 순간에, 비디오 시선을 등장시킨다.
먼저 첫 자살 시도 장면은 이전부터 자살 충동이 있었던 멜리카가 호수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멜리카가 이 샷은 도입부처럼 롱 샷 롱 테이크로 이어진다. 또한 파나히가 보는 아이폰에 담긴 영상으로 등장하기에, 아이폰을 거친 간접적인 파나히의 시점 샷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좀 더 나아가자면 멜리카의 자살 샷 자체가 파나히의 비디오 시선으로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멜리카는 자신의 우울과 자살 충동을 어느 누구에게도 편히 털어놓을 수 없으며, 비디오 시선으로 구성된 쓸쓸한 롱 샷 롱 테이크 속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두번쨰는, 파나히 자신의 자살 시도 샷이다. 두 샷은 같은 구도를 취하고 있기에, 유사성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둘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외부적 억압에서 비롯된 건 자명하다. 질문은 여기서부터다. 과연 파나히의 자살 시도 샷이 멜리카의 자살 시도 샷과 유사한 구도로 이어진다면, 그의 자살 시도는 누구의 시점 샷으로 찍었을까? 허구의 파나히를 감독하는 실제 파나히? 아니면 파나히의 자살 영상이 담긴 아이폰을 보는 다른 누군가?
《닫힌 커튼》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 이어 스마트 기기의 개별성과 내밀함으로 허구의 영화와 분리된 다큐멘터리적인 영토를 보고 확장하면서도, 편집이라는 도구로 허구로서의 영화에 편입해 교란한다. 최종적으로 파나히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인물들이 공유하는 '우울'과 '자살 충동'이라는 극단적인 감정의 공명을 몽타주로 유도하고 있다. 그렇기에 파나히는 역재생으로 자신의 자살을 무력화한다. 멜리카랑 달리 파나히는 자신의 자살을 무력화할 수 있는 건, 편집실에서 이미지를 배치하거나 조작할 힘이 있어서다.
그렇기에 다시 멜리카는 남고 롱 샷 롱 테이크로 작가와 파나히가 떠나는 걸 보여주는 결말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창살과 가림막을 보여줌에도 어떤 홀가분함마저 느껴진다. 비록 파나히는 이란 여성들을 해방할 수 없었지만, 극영화에서든 다큐멘터리에서든 싸워야 할, 내지는 유폐를 그만두고 영화를 만들어야 할 당위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자살을 역재생으로 무력화하고 유폐지였던 허구의 집을 떠난 파나히는 《택시》를 통해 테헤란 거리로 나서게 된다. 동시에 이는 《텐》의 블랙박스 시네마의 영역에 들어섬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파나히는 키아로스타미랑 달리 극단적인 형식주의를 주창하지 않는다. 젠더나 계급 차에 따라 노골적으로 샷-리버스 샷과 커팅을 거부하고 한 카메라에만 머물렀던 《텐》과 달리, 파나히는 뒷좌석 샷까지 포함해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을 비교적 전통적인 샷-리버스 샷으로 구성한다. 《택시》의 블랙박스적 비디오 시선은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이해가 전제된 세계다.
결정적으로 《택시》의 승객들은 파나히가 설치한 블랙박스 카메라, 나아가 비디오 시선을 인식하고 아예 허구에서 벗어난, 대사가 아닌 말을 하기까지 한다. 또한 파나히는 조카인 하나 사에이디가 든 디지털카메라로 또 다른 비디오 시선을 들여와서, 결과적으로 《텐》보다 더 많은 비디오 시선을 택시 안에 배치하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텐》 이후 디지털 비디오, 나아가 스마트 기기의 보급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었기에 가능했던 세팅이다. 또한 장벽처럼 세워진 사회 계급 간의 격차와 갈등이 주 소재였던 《텐》과 달리, 파나히라는 창작자라는 특수한 개인과 창작자를 알아보는 승객 간의 관계의 영화기에 발생하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택시》에서 파나히는 《텐》과 달리 자주 차를 멈춰 세운다. 아예 차 밖을 나가서 멀리서나마 대화하는 장면을 찍는 《택시》의 카메라는 그러나 다시 파나히의 택시 안으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택시》는 자신에게 허용된 택시 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불가항력이자 권력과의 싸움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키아로스타미랑 달리 파나히는 차 안에 있으려고 해도 세상이 계속 틈입한다고 말하며, 거기에 대응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택시》는 명백히 홈 인베이전 장르를 끌어들인 《닫힌 커튼》의 후속작이다.
파나히는 테라야마 슈지의 말을 빌리자면 '필름을 버리고 도로로 나선다'. 그리고 그 도로에서 차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이전작들처럼 허구와 실제를 뒤섞어 표출한다. 《하얀 풍선》과 《텐》 어딘가에 놓인 (즉 금붕어 어항을 들고 성지를 방문하려는 할머니들) 패러디적인 상황이라던가, 죽어가면서도 홀로 남겨져 성차별을 받을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박해에 파나히를 대하기 조심스러워하는 지인들, 자신들의 이런 암매매가 이란 씨네필들에게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파나히의 영화도 언급하며 파는 불법 DVD상과 그에게서 DVD를 사는 영화학도, 파나히를 변호해 주지만 동시에 자신 역시 박해에 대응해야 하는 다방면적인 방어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여성 변호사 등은 차 안의 세계가 어디서 왔는지를 의식하고 세계 속의 다양한 행위자들과 도구들을 영화에 자유로이 포섭하고자 하는 시도다. 《택시》는 허구로서 로드 무비와 다큐멘터리 간의 혼종을 게릴라 디지털 시네마 속에서 체화한다. 파나히는 그게 자신의 새 방법론이라 천명한다.
조카 하나의 질문은 그 점에서 이중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학교 선생님에 따라 배급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하나는, 자신이 든 디지털카메라로 그 포부를 이루려고 한다. 하나는 명백히 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거울 쌍이며 디지털 비디오로 구성된 게릴라 영화가 정식으로 승인되길 원하는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승인 욕망은 우스꽝스럽게 표출된다. 하나가 승인될 수 있는 영화를 찍기 위해 한 소년을 두고 원하는 선함을 끌어내려는 장면은, 배우에게서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기 위한 전형적인 연출가의 양태를 보여준다.
당연히 하나가 카메라에 포착하길 원하는 선한 행동은, 뻣뻣하고 둔감하게 조작된 순간으로 남고 《택시》의 몽타주 체계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하나는 자신이 《하얀 풍선》의 소녀처럼 행동할 줄 알았냐고 말하기에 이는 상당히 복합적인 장면이 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자신의 계획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상황의 양가성을 얘기했던 파나히는, 조카를 통해 디지털 비디오엔 자유로움도 있지만, 여전히 작위성에 빠질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파나히는 기본적으로 연출이라는 행위는 포착과 조작의 경계가 있다고 본다. 이 포착과 조작의 경계가 어떻게 흔들릴 수 있는지는 이후 《3개의 얼굴들》이나 《노 베어스》에서도 이어진다.
《택시》의 결말은 지갑을 내린 할머니를 찾아가기 위해 차를 멈춰 세우는 파나히와 조카다. 창작 금지령 이후 파나히는 영화를 만들수록 카메라를 롱 샷 롱 테이크에 세워두고, 그 속에서 전진하며 사라져가는 인물들을 그린다. 처음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곤 최대한 자유를 지속하며 나아가려다가 벽에 가로막히면서 끝났다. 두 번째 영화 (《닫힌 커튼》)에서는 파나히는 작가와 함께 닫힌 창살들로 가득 찬 집을 두고 떠난다. 세 번째 《택시》에서는 파나히는 사소한 선행을 하기 위해 차를 멈추고 함께 떠난다. 그런데 그 순간 화면이 암전되고 갑자기 누군가가 차에 침입해 메모리 스틱을 훔치려는 대화가 들리면서 《택시》는 끝난다.
《택시》의 결말은 그 점에서 디지털 비디오로 구성된 시네마를 구성하는 데이터가 메모리 스틱이라는 명확한 물질에 보존되어 있으며, 선행을 하려는 틈을 노려 권력이 강탈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인식의 확장을 보여준다. 이때 《텐》에서 계승해 온 블랙박스로서 시네마는 디지털 비디오는 이 악의/검열의 침입을 보여주지 않는다. 혹은 못 한다. 그렇기에 파나히는 영화에 참여한 그 누구도 크레딧도 올리지 못한다. 《택시》의 굳건함과 섬뜩함은 파나히 자신의 의지와 연대와 더불어, 그 의지와 연대의 틈을 노리려는 권위주의 권력의 악랄함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택시》 결말에 드러나는 디지털-시선의 무기력함은, 비디오 시선에 기반한 진실 게임을 벌이며 신정화 이전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가는 《3개의 얼굴들》보다는 (이 영화 역시 인물들이 멀어져가는 롱 샷 롱 테이크로 끝난다.) 《노 베어스》에서 극적으로 전환된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지금까지 이어왔던 디지털 시네마 영토에서 파나히의 전진과 멈춤이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한다. 이 샷은 이전까지 파나히가 썼던 롱 샷 롱 테이크 교묘하게 뒤틀며 위장하고 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파나히식 롱 샷 롱 테이크처럼 시작했다가 줌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일단 이 샷에서 인물들은 멀어지는 게 아니라 카메라는 멀어지려고 하는데 가까워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멈춰있지 않고 상당히 유려하게 인물의 동선을 옮겨간다.
곧이어 파나히는 이 장면이 자신의 촬영 현장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없는 원격 촬영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끌어들인다. 《노 베어스》는 명확히 '부재'의 개념을 미학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논쟁거리가 된 사진 촬영(의 순간), 감독이 부재한 배우들만 있는 영화 촬영 현장은 사진을 촬영한 순간의 샷이 없는 현실이라는 거울쌍적인 상황과 더불어 《노 베어스》의 또 다른 키워드인 '부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재'로 인해 생긴 좌절감과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영화다.
《택시》 결말에 드러나는 디지털-시선의 결의와 무기력함은, 이전작의 연장선상으로 비디오 시선에 기반한 진실 게임을 벌이며 신정화 이전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가는 《3개의 얼굴들》보다는 (이 영화 역시 인물들이 멀어져가는 롱 샷 롱 테이크로 끝난다.) 《노 베어스》에서 극적으로 확장되고 전환된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지금까지 이어왔던 디지털 시네마 영토에서 파나히의 전진과 멈춤이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 점에서 《노 베어스》의 도입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도입부는 이전까지 파나히가 썼던 롱 샷 롱 테이크 교묘하게 뒤틀며 위장하고 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파나히식 롱 샷 롱 테이크처럼 시작했다가 줌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샷에서 인물들은 멀어지는 게 아니라 가까워진다. 카메라는 멈춰있지 않고 상당히 유려하게 인물의 동선을 옮겨간다.
곧이어 파나히는 이 장면이 자신의 촬영 현장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없는 원격 촬영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끌어들인다. 《노 베어스》는 명확히 '부재'의 개념을 미학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논쟁거리가 된 사진 촬영(의 순간), 감독이 부재한 배우들만 있는 영화 촬영 현장은 사진을 촬영한 순간의 샷이 없는 현실이라는 거울쌍적인 상황과 더불어 《노 베어스》의 또 다른 키워드인 '부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재'로 인해 생긴 좌절감과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영화다.
《3개의 시선들》에서 차를 타고 자신의 뿌리이기도 한 동아제르바이잔 시골로 돌아갔던 파나히는, 이번엔 최대한 가볼 수 있는 곳까지 가보겠다며 동아제르바이잔주에 있는 이란 국경 근처까지 간다. 한밤중 밀수꾼의 도로로 국경 바로 앞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 파나히의 모습은 조국에 대한 파나히의 감정은 양극단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파나히는 자신이 속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을 짓누르는 탄압의 벽을 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파나히는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 없다. 이미 무수한 인터뷰에서 파나히는 망명 대신 남아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물론 그게 결코 기꺼움만은 아니라는 건 파나히조차도 인정하고 있다. 파나히는 그 갑갑함을 해소하기 위해 《택시》에서 시작한 로드 무비를 국경까지 이어가고, 《노 베어스》에서 갈 수 있는 최대한인 국경 근처 마을에 도착해 자유로운 국경 바깥의 현장을 원격 통제하는데 이른다. 어쩌면 파나히는 상술했던 불법 DVD 장사꾼도 그렇고 자신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시도해 정립해 간 디지털 시네마 방법론을 밀수꾼의 방법론이라 부르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노 베어스》 도입부는 감독이자 창작자라는 자기의 존재를 밀수꾼처럼 섬유망 속 데이터로 위장해 머나먼 현장에 현현화하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다.
얼핏 보면 파나히는 디지털 비디오의 끝없는 진화 속에서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 베어스》는 그 진화에 회의적이다. 얼핏 정돈되고 순조로운 듯한 안팎 상황과 이미지는 드로스테 현상처럼 안과 밖이 서로 엉켜서 반복되거나 반영하고 있으며, 달라 보이는 두 상황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파나히는 실패한다. 우선 감독이 부재한 촬영 현장엔, 또다시 현실에 좌절해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배우들이 있다. 감독은 현장에 가고 싶어 하지만 배우들은 현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기묘한 상황인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 속 영화에 출연한 실제 자라 역 배우 역시 탄압을 받아 이란이라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파나히는 여기서 탈출해 서구권으로 가려는 배우들의 실제 사연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애쓰지만, 최후의 순간 허구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 (여권)가 가짜라는 걸 밝히고 만다. 배우들은 그러면 자신들의 영화 역시 해피 엔딩이 아니며, 될 수조차 없다고 항변한다.
심지어 감독이 부재하고, 카메라 역시 부재했기에 중요한 순간을 촬영하지 못하는 상황, 나아가 촬영 불가능함도 노출된다 (혹은 허구로서 등장한다). 파나히는 실제 상황 속 자신의 부재를 디지털 비디오의 발전을 통해 대리자를 내세워 허구 속 해피 엔딩을 끌어내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해피 엔딩의 근본 조건이 허구이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때 섬유망 속 빛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이자 대리자로 현현한 파나히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파나히가 이전부터 통제되지 않는 상황의 당혹감과 매혹을 얘기하긴 했지만, 《노 베어스》는 좌절감을 훨씬 더 많이 얘기하는 영화이다. 파나히는 영화 현장에서 부재하고 무력하며,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이 과정의 끝에서 배우-부부가 자살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노 베어스》는 그 속에서 디지털 시네마 내지는 영화의 어떤 불능성과 무기력함을 증명해 버리는 영화기도 하다.
파나히가 머무는 국경 지대에서도 상황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노 베어스》의 핵심이 되는 삼각관계 속 치정 증거 사진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를 변주한 듯한 구조로 나아간다. 《욕망》에서는 찍힌 사진 속 수상한 이미지의 진위를 가리는 데 집중하다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지만, 《노 베어스》에서는 찍은 순간과 이미지를 진위는커녕 누구도 확언할 수 없기에 논쟁이 일어난다. 파나히는 마을의 규율보다 개인적인 감정을 우선시하는 두 연인 고잘과 솔두즈를 지키기 위해 사진이 없다고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는다.
이때 파나히는 진실의 방에서 자신의 디지털카메라 앞에서 증언하겠다고 말하지만, 삼각관계의 다른 축이자, 마을 규율을 맹신하는 야굽은 카메라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파나히가 겪는 실패는, 여권 거래 장면 포착 실패와 더불어 디지털 시네마의 총체적 실패로도 확장될 수 있다. 곰이 없다고 상상하라는 완고한 사회적 부정과 기만, 불가능 앞에서는 디지털카메라, 나아가 비디오 시선 역시 부정과 기만, 부재, 불가능밖에 담을 수 없다.
이런 실패는 《택시》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지만 《노 베어스》는 현실 포착 실패의 문제를 연출의 문제가 아닌, 근본적인 사회 조건의 문제로 확장한다. 그렇기에, 이 실패는 의외로 중요한 핵심에 다가가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 나아가 기록의 실패로 영화를 향한 근본적인 불신과 만나는 장면이 그렇다. 파나히는 촬영하기 위해 집주인 간바르에게 디지털카메라를 빌려주지만, 정작 카메라 작동법을 잘 알지 못하는 간바르는 버튼을 헷갈리는 바람에 파나히가 원하는 대로 기록하지 못한다.
요컨대 파나히가 다뤄왔던 디지털 비디오의 평등성과 자유에 근본적인 회의와 균열이 생긴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한 기록엔 파나히 자신을 험담하는 사회의 목소리들이 담겨있다. 파나히는 도구와 방법론의 실패로 생긴 균열에 자신의 방법론을 깎아내리려는 시선을 포착한다. 《노 베어스》가 비통한 이유는 거기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거나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찍었다고 추정되는 이미지를 부정해야 하고, 그 부정마저도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영화 속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연인은 또 죽음을 맞이한다.
《노 베어스》는 자신이 그동안 영화적 무기로 활용해 왔던 디지털 비디오 시선 나아가 디지털 시네마가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노 베어스》 결말이 롱 샷 롱 테이크 속에서 인물들이 멀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 베어스》는 인물이 아닌, 새로운 방법론으로 인물들을 촬영하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파나히는 이때 《텐》이나 《택시》처럼 운전석에 고정된 카메라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엔 파나히와 승객 간의 샷-리버스 샷은 없다. 오로지 측면의 파나히만 있을 뿐이다. 운전석에 앉은 측면의 파나히 후경 차창엔 국경수비대 총을 맞고 죽은 솔두즈와 고잘과 모여서 오열하는 사람들이 보여지다가 흘러간다. 스크린과 차 창문이라는 프레임에서 비극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파나히는 한참을 고뇌하는 표정으로 차를 몬다.
자신이 총체적으로 실패했기에 죽어야 했던 연인들에게 창작자 파나히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순간 파나히는 브레이크를 걸고 멈춘다. 하지만 돌아가려는 제스처는 아니다. 그저 이전작에서 카메라를 고정했듯이 자신을 고정하고 영화를 끝낼 뿐이다. 《노 베어스》는 그 점에서 디지털 시네마로 주려고 했던 자유가 실패했고 실패한 이유와 조건을 되새기면서 그것이 감독인 자신의 실책이라 뼈저리게 인정한다. 그리고 인정함과 동시에 여기서 남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자파르 파나히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후로 만들어왔던 디지털 비디오-게릴라 영화들은 디지털 비디오로 포드주의적인 전통적인 제작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저항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기존 포드주의적인 제작 체계가 국가 권력에 왜곡되고 시도조차 막는다면 감독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파나히는 이에 사적인 스마트 기기나 디지털 비디오카메라의 동시적인 포착에서 시작해 허구와 현실 사이를 흔드는 애매함을 감독이 연출해 나가고 포착하면서, 강력한 메시지를 지닌 영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파나히는 거울쌍적인 다양한 상황들을 하나씩 인식하며, 필름이 아닌 디지털 비디오의 자유로움으로 인식과 시도, 과정과 결과를 포착한다. 최종적으로 파나히는 키아로스타미가 끝내 가지 않았던 길로 나아가 이란의 정치 현실을 영화로서 통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런 시도에서도 파나히는 끊임없는 불안과 위협, 좌절에 시달려야 한다. 이 위협은 《쉬린》 이후 해외에서 만든 키아로스타미 영화들보다도 훨씬 직접적이며 파나히 역시 상당히 직설적으로 대응한다. 파나히의 2010년대 이후 영화들이 정치적 직설성을 공공연히 드러냄에도 흥미로운 힘을 잃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비디오 시선에 기반한 디지털 시네마의 성공과 실패를 첨예한 정치적 영역에 놓고 바라보고 나아가 인식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