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단상

흔적과 초월로서의 디지털 멜랑콜리 모험 영화: 긴츠 질발로디스의 [플로우]와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를 중심으로

giantroot2025. 7. 20. 03:05

영화 역사에서 큰 변화가 몇 차례 있었다고 가정해보면 아마도 가장 최근에 있었던 큰 격변은 디지털 이미지의 등장을 들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과 컴퓨터가 영화 제작 과정에 포함되면서, 필름이 현실의 무언가를 포착한다는 개념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름 없이도 컴퓨터 속 데이터를 통해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 역시 등장했다. 손 그림이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만든 3D 모델링을 활용하는 풀 CG 3D 애니메이션은 명백히 컴퓨터로만 가능한 영상물이었다. [토이 스토리]는 그 점에서 산업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영상의 개념에 질문을 던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실사 영화에서도 디지털은 유물론적인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카메라들은 점점 더 소형화되어, 프리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 이후 다시 한번 카메라의 기동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카메라는 무수하게 늘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하거나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 반대로 한 장소에 진득이 머무르거나 (왕빙, 페드로 코스타) 어떤 순간을 재빠르게 쫓아가기 시작했다. 카메라=눈이라는 통념에서 보자면, 이제 영화는 무수하고 무한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포착기록으로 대표되던 실사 이미지는 디지털화를 통해 필름의 물질적 한계에서 비롯된 조심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가능성을 얻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카메라가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21세기가 시작하고도 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이런 가능성이 카메라 그 자체가 배치나 조작의 한계를 초월해 대상을 포착하는 영화 (고프로를 원양 어선 곳곳에 설치해 표현주의적 디지털 다큐멘터리를 선취한 베레나 파라벨의 루시앵 카스텔 테일러의 [리바이어던]이 대표적일 것이다) 을 만들어낸 것은 명백했다.

 

[토이 스토리]에서 30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은 더욱더 깊숙이 삶과 예술의 영역을 침투하고 분화해나가고 있다. HD 화질에도 미치지 못한 화질로 제작되어 필름으로 인화되어 상영되었던 [토이 스토리]의 기술력은 필름이라는 물적 기반에 옮기지 않고도 상영할 수 있게 되었고, 소규모 제작자들 역시 값싼 프로그램을 이용해 대자본에 기대지 않고도 그래픽과 음향을 창조해 풀 CG 3D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반대편인 소형화된 카메라는 배치나 조작의 한계를 뛰어넘음과 동시에 전 세계에 깔린 통신망과 접속되어 연출자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그 현장에 있지 않아도 대상을 어떻게 찍으라고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원격 영화의 가능성이 등장한 것이다. 30년이 흐르면서 애니메이팅과 촬영 방법론 모두 디지털이 처음 도래했던 시절에서 더 멀리 나아가고 있으며, 무섭도록 영상에서 풍경을 구현하는 방식에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요컨대 2020년부터, 영상 제작에서 실제 풍경을 직접 포착해야 한다는 당위성 내지는 필요성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연출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래픽 작업으로 애니메이팅/시뮬레이션으로써 영상을 만들거나, 반대로 카메라와 마이크가 현장에 있는 제작진을 화상 회의로 불러내 그곳에 없지만 동시에 광통신망 위에 살아있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 감독을 현현해 영상을 포착하는 원격 연출 모두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자파르 파나히는 2022[노 베어스]를 통해 국경 안쪽 정치적 유배지에서 국경 바깥의 현장을 원격으로 연출하면서, 동시에 유배지에서 또다시 카메라의 포착과 관련된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감독 자신을 보여주면서 21세기 영화 제작 환경이 달라지고 있음과 동시에, 그 달라짐이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 점에서 2024년에 공개된 긴츠 질발로디스의 [플로우]와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는 닮지 않은 듯하면서 기묘한 지점에서 공명하며, 어떤 영화적인 공간과 존재론을 초월하려는 시도를 다룬 모험 영화. 먼저 두 영화는 애니메이팅과 원격 영화의 가능성을 심화하고 있다. [플로우]는 소규모 팀과 최신 도구로 구성된 대안적인 풀 CG 애니메이션 영화고, [그랜드 투어]는 고전적인 스튜디오 촬영과 디지털 원격 연출을 합하면서 스크류볼 코미디와 크리스 마커식 여행 에세이 영화를 결합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모험의 주체는 어딘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인다. 한쪽은 종의 본능을 초월해가며 협력하는 동물들이며 다른 한쪽은 끊임없이 쫓고 쫓기며 식민지 위를 흘러가는 과거의 연인들이다. 그들은 디지털로 생성되거나 원격으로 포착된 풍경을 가로지르며 관객만이 느낄 수 있는 멜랑콜리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서 그들이 도달하는 결말은 어떠한 시적인 초월이다. 이 순간 주체들은 영화의 중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 점에서 이 글은 디지털의 틈입으로 변이를 겪고 있는 21세기 영화가 어떻게 모험-항해 영화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는지 탐색해보고자 한다.

 

흔적의 멜랑콜리, 유령 같은 모험가들

긴츠 질발로디스의 애니메이션 [플로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여러 의미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영화 이론에서 자신의 투영된 모습을 바라보는 샷-이미지는 (라캉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인식하고, 나아가 멜로드라마적인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 대다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들은 감정의 격동과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멜로드라마의 주체가 될 수 없고, [플로우] 역시 표면적으로는 내적 심리와 감정이 액션을 결정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외적인 액션이 사건을 주도하는 액션-모험 영화에 속해있다. 결정적으로 [플로우]에 등장하는 반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고양이는 전부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닌, 오픈소스 CG 프로그램인 블렌더로 생성manipulate된 것이다. 그렇기에 [플로우] 자기 자신의 반사된 이미지를 타자라 인식하지 않는 디지털 고양이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디지털 고양이는 인간이 알고 있던 고양이라는 종의 한계를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 이미 뛰어넘은 것인가?

 

적어도 서사 상에서는 이 이유는 정당화되어 있다. [플로우]는 인간이 사라진 혹은 멸종한 이후의 영토를 탐색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후 동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서사의 상상에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플로우]를 보는 관객들은 인간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체감한다. 우리는 검은 고양이가 사는 집 주변에 있는 손과 고양이 조각들을 먼저 마주한다. 그런 뒤 고양이는 인간이 썼던 책상과 가구들을 거쳐 침대에서 잠든다. 고양이가 홍수로 수몰된 집을 떠난 이후로도 인간의 흔적은 고양이가 합류한 카피바라 탐험대 앞에서 드러났다가 사라져간다.

 

명백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어법이지만, [플로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엔 인간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으며, 모호한 흔적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이미 이 풍경들은 서사 속 동물들에게는 아무런 맥락이 없다. [플로우]에 등장하는 남겨진 풍경은 뚜렷한 서사나 의미를 형성하기보다는, 스크린 밖 관객의 감각과 감정, 지식을 자극하는 잔여물이나 파편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로우]는 남겨진 인공물들을 탐색해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모험 영화지만, 그 탐색으로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리란 목적의식은 발견할 수 없다. 서사 속 누구도 그 남겨진 풍경의 맥락을 의심하거나 구체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뿌리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이자 멸망 이후 관객만이 인지할 수 있는 무맥락의 멜랑콜리를 탐사하는 모험 애니메이션인 셈이다. [플로우]가 항해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다는 뿌리 내리거나 서 있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런 바다가 땅을 집어삼킨다면 이전의 뿌리는 감춰지거나 잠깐 드러날 뿐이다.

 

진행되는 서사와 동떨어져 오로지 순수한 쾌감으로서 풍경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때 카메라는 더 이상 액션의 주체가 벌이는 행동을 포착하지 않는다. 주체는 이미 간단한 스케치와 정교한 모델링을 통해 인간 창작자가 조형된 후, 이미 설계된 배경 속에 움직이며 가상의 카메라 초점 앞에서 애니메이팅된다. 질발로디스는 그 풍경을 필름이나 디지털 기록장치 같은 매개체에 포착하지 않고 생성했다는 점에서 포드적인 전통과 다른 길을 간다. 포드의 유명한 지평선 발언을 변주하자면, 질발로디스는 실재하는 카메라의 물리적 배치 여부로 포착된 풍경을 보여주거나 변화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블렌더 내 카메라 관련 메뉴를 클릭해 값을 수정함으로써 자신과 팀원들이 설계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 순간 카메라는 세계 어디서든 위치할 수 있다. 물론 서사 영화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모험의 주체 근처로 있어야 한다.

 

이전에도 사변적으로 인간 사회의 맥락과 떨어져 창조된 후 명확한 맥락으로 환원되길 거부하는 캐릭터와 풍경을 추구해온 애니메이션이 있긴 하나 (미카엘 두독 드 비트의 2D 애니메이션 [붉은 거북]이 대표적일 것이다), [플로우]가 독특한 이유는 그 사변적으로 생성된 세계를 탐험하는 주체를 인간과 동물의 특질을 섞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가 가능한 이유는, 질발로디스의 연출적 전통이 영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질발로디스는 이미 대중적인 시각 매체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미학적으로 성립되는 예술인지에 대해서는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은 매체에서도 뿌리를 끌어온다. 바로 비디오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은 컨트롤러를 잡은 플레이어의 조작과 풀이로 성립된다는 점을 이용해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일견 자연적이면서도 고도로 설계되어 미적 쾌감과 동시에 세계와 플레이어 간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게임들이 등장했다. 밀러 형제의 [미스트], [젤다의 전설] 시리즈, 우에다 후미토의 [이코][완다와 거상], 조너선 블로우의 [위트니스], [에디스 핀치의 유산],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여러 게임을 더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들이 1990년대 중후반 초창기 풀 폴리곤 게임들이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게임들은 영화가 구축했던 풍경 미학이 어떻게 비디오 게임이라는 상호작용적인 공간에서 해석될 수 있는지 시도해왔고 몇몇은 시적인 영역에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질발로디스는 [어웨이]에 이어 [플로우]에서 시도하는 것은, 이런 비디오 게임에서 이뤄졌던 설계된 풍경 미학이 관객이 일방적으로 봐야 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도 성립할 수 있는지다.

 

본작의 동물들 역시 그 점에서 기묘하게 구성되어있다. 도입부에서 생성이라는 개념을 썼지만, 질발로디스가 CG 동물을 조형하고 개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사실주의와 구성주의 어딘가에 있다. 우선 [플로우]의 동물들은 실제 동물에 가깝게 설계되었다. 그들은 말하지도 인간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물론 엄밀하게는 실제 동물의 양태를 그대로 가져왔기보다는 상술했듯이 종을 초월한 양태를 띄지만, 질발로디스는 만화적인 양식에 속하는 걸 거부한다. 제작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플로우]의 등장 동물들과 동작과 음성은 실제 동물들에게서 채집되었지만, 렌더링 된 동물 그래픽에 입혀졌다. 이 과정에서 채집된 실제 동물의 소리는 주체와 맥락을 잃고, 창작자의 판단하에 CG 동물의 가상적 육체에 콜라주 된 후 봉합된다. 이 와중에 영화 음향 제작에서 자주 발생하는 소리를 내는 실제 주체와 가상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는 때도 있다. 일례로 이 영화의 카피바라의 울음소리는 실제 카피바라가 아니라 낙타에게서 따왔다. 즉 질발로디스는 사실주의적인 채집을 했지만, 그 채집물을 배치하는 반드시 사실적이리라는 법은 없으며, 표현을 위해 왜곡하기도 한다.

 

[플로우]의 특이함은 자신의 생성/조작적인 태생을 인정하면서도 실사 영화적인 포착과 채집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모양새에서 발생한다. 지금까지 픽사나 드림웍스가 만든 주류 3D 동물 애니메이션들이 만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그래픽 도안적인 풍부한 표정과 인간의 성우 연기로 직접적으로 호소해왔다. 질발로디스는 이런 그래픽-만화적인 전통과 인간 성우의 풍부함을 최대한 거부하고, 실사 영화적인 포착을 서사 및 애니메이팅 단계에서 최대한 도입하려고 한다. [플로우]CG 동물 캐릭터들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인간성이 실제 동물의 행동 양태와 채집된 질료와 함께 봉합되어 있지만, 기존 동물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봉합된 후에 보여지길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봉합된 동물 캐릭터들은 유령처럼 남겨진 인간의 흔적을 목격하면서, 지나친다. 이때 멜랑콜리를 느끼는 건 동물이 아니라 관객이다. 여기엔 더 이상 인간 주체가 서 있을 곳은 없다.

 

반대로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는 고전적인 시네마의 전통과 양태를 의식하면서 만든 모험 영화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그랜드 투어]는 인간이 사라진 동물들만의 미래를 상상하며 흔적을 항해하던 [플로우]와 정반대로 동시대 이미지엔 없지만, 고전적인 스튜디오 세트 속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인물들을 흘려보내는 명랑한 멜랑콜리에 사로잡혀있다. 아시아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20세기 초엽 제국주의 국가 출신인 두 영국인 남녀의 영원히 잡히지 않는 희비극적인 사랑의 유희를 탐닉하는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인물을 나눠 유사한 동선을 밟게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랜드 투어]는 엄격한 고전주의적 태도로 관객의 직설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역사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랜드 투어]는 지극히 현대 영화적으로 다양한 영화적 구성물을 혼합하면서, [플로우]만큼이나 2020년에만 가능한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모험 영화다. 먼저 [그랜드 투어]는 영화적 풍경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플로우]처럼 디지털적인 생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설계적인 태도로 만들어가는 영화다. 고메스는 사실적인 고증이나 정합성에 맞춰 영화의 풍경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편이다. 특히 허구 속 아시아를 보여줄 때 고메스는 이 풍경이 세트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영화의 인공성을 거리낌 없이 폭로한다. 갑작스럽게 비치는 인공적인 조명, 고메스가 구축한 아시아의 풍경은 전통복을 입은 아시아 여성, 대나무, 판다, 전통 가옥과 정원 등 문화적 상징 이미지로 조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분명 지역적 맥락에 놓여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랜드 투어]는 실제적인 역사 로맨스 코미디로 접근하기보다는, 과거의 문학과 영화에 기반한 이국적이며 환경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달픈 과거의 흔적이자 꿈으로 접근하게 된다. 인물들이 (죽은듯이) 잠들면서 한 장이 일단락된다는 점은 [그랜드 투어]의 몽상성을 서사로서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이때 고메스가 염두에 두는 것은 스튜디오에서 세계 그 자체를 배경으로 재현하고 관객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몽상을 구현하겠다는, 고전 할리우드 감독과 제작자들의 인공성에 대한 순수하면서도 객기 넘치는 신뢰다. (상술한 존 포드도 포함되는) 많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들이 전 세계에 퍼져있는 문화적 이미지를 모아 스튜디오에서 가짜 세계 풍경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발명한 장르가 제공하는 순수한 감정과 액션에 탐닉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고메스는 고전 할리우드 시절의 그 객기 넘치는 태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기엔 고메스는 현대 영화감독이며, 포르투갈 영화의 모호함내지는 멜랑콜리의 전통을 잘 알고 있다. 몰리가 종종 선보이는 과잉되고 우스꽝스러운 웃음의 제스처는 [그랜드 투어]의 스크류볼 코미디에 등장하는 여성 주체의 활력과 액션이 이제 현대 영화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과거의 제스처가 되었으며, 이 영화가 그런 제스처에 내재한 단순성에만 기대서 만들지 않았다는 감독의 명백한 힌트일 것이다. 마치 인공적인 허구 세계에 반하듯이, 고메스는 인공적인 허구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다큐멘터리 방법론으로 포착된 현대 아시아 푸티지들을 틈입시킨다. 여기에는 인물이나 사건은 없다. 그저 이전과 이후 허구 시퀀스와 연계된 아시아의 현재만이 담겨 있고 육체 없는 해설만이 흘러갈 뿐이다. 이렇게 동시대적으로 채집된 다큐멘터리 푸티지는 외화면 해설에 남겨진 에드워드와 몰리의 이야기를 마치 포스트 식민주의 영토 위를 떠도는 유령처럼 감싸 안는다.

 

여기서 [그랜드 투어]는 크리스 마커의 여행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일부 끌어들이고 있다. 마커가 그랬듯이 고메스는 편집 내지는 몽타주를 통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다양한 외국의 정경들이 영화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키노아이의 신봉자로서 타자 이미지를 채집해왔던 마커랑 달리, 고메스는 그렇게까지 키노아이 미학의 유물론적 채집 방식에 충실하진 않다. 오히려 그는 키노아이 미학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다르게 재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화 외적인 얘기지만 [그랜드 투어]의 다큐멘터리 파트를 이야기하려면 이 파트의 몇몇 샷들은 통신망으로 원격 연결된 고메스 지휘하에 세컨드 유닛 제작진들이 촬영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어느 정도는 촬영 당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인한 불가항력도 있었지만, 고메스는 여기서 한 가지 실험하고 있다. 디지털과 통신망의 힘을 빌리면 감독이 굳이 직접 거기 있지 않아도, 영화적 구성물을 채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거기에 없다’.

 

다만 고메스는 거기에 없음이 영화의 정치적 실천이 불가능해질 뿐이라고 회의적으로 보는 자파르 파나히랑 달리, 유희적으로 즐긴다. [그랜드 투어]를 본다는 것은 스튜디오 촬영으로 만들어진 고전적이면서도 인공적인 풍경과 동시에 디지털 기술에 맞춰 변이한 키노아이가 포착한 동시대적 풍경이 뒤섞이는 마술 쇼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 고메스는 여기다 자신의 정체성과 거리가 먼 영국인들을 내세워 태연하게 포르투갈어를 위시한 다양한 언어로 서머싯 몸에서 빌려온 제국주의 시절 영국 문학의 질료들을 가져온다. 그리고 스크류볼 코미디의 희극성과 낙천성의 탐닉을 애끓는 멜로드라마적 상황과 대치시키고, 연인들의 여정은 꿈꾸듯이 잠들고 싶어 한다. 이런 쇼 속에서 관객은 이것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유령처럼 어딘가를 영원히 떠돌아다닐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숙명론적인 향수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그랜드 투어]의 분열증적인 유머와 애상적인 로맨티시즘은 식민주의 영문학과 스크류볼 코미디라는 고전성과 21세기 현실 아시아 풍경과 원격-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이라는 현대성이 희비극적인 멜랑콜리라는 감정 속에 통합되면서 발생한다. [그랜드 투어]의 동시대적인 아시아 풍경 다큐멘터리 푸티지와 해설로 구성된 시퀀스들은 그 점에서 [플로우]의 남겨진 인류 문명의 흔적들과 공명한다. 풍경 속에 어른거리는 과거 흔적은 허구 속 동물이나 인물들과 연계되지 못한 채 관객들만이 감지하고 멜랑콜리를 느낄 뿐이다. 어찌 보면 [그랜드 투어]의 과거와 현재 이미지 사이에서 쫓고 쫓는 에드워드와 몰리는 [플로우]의 협동을 배우며 종을 초월하려는 동물들보다도 훨씬 더 현실과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초월의 순간을 마주하는 주체들

이런 다양한 자연적/인공적 혼성물로 구성된 풍경 속에서 모험을 떠나는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딱히 확실한 목표나 방향성을 두지 않는다. [플로우]의 동물들은 바다로 잠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항해하다 물이 빠진 후에야 여정을 멈춘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을 밝힐 생각도 없고, 배와 바다가 있기에 그저 지구를 항해한다. [그랜드 투어]의 두 남녀는 추격전을 벌이면서도 어떻게 피할 건지/만날 건지 아무런 계획도 없다. 심지어 방향과 계획이 명확해야 할 몰리조차도 에드워드랑 7년째 만나지 못했다며 자신의 추격이 무턱대고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 몰리가 여정을 지속하는 원동력은 명확한 목적성보다는 아니라, 에드워드가 말했듯이 끝끝내 꺾이지 않는 사랑의지, 반대로 에드워드는 나약함우울감이다. 그 점에서 [플로우][그랜드 투어]는 최종 목적지를 맥거핀 삼고 불가항력에 이끌려 멜랑콜리한 풍경 이미지를 관망하고 체험케 하는 부류의 모험 영화/로드 무비에 속한다. 그들은 어디서 끝날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여정을 지속하면서 자신과 관련 없는 풍경들을 체험한다. 이 과정에서 두 영화의 모험은 끝나지 않고 무한히 이어질 것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그 순간, 두 영화 모두 모험이 멈추고 초월의 순간이 등장한다. 이 초월의 순간은 난데없으며, 어떤 마술적인 힘으로 모험을 중단시킨다. [플로우]는 이 점에서 명쾌하게 자신이 판타지 장르에 속해있다고 밝히고, 초월의 순간을 탐닉한다. [플로우]의 후반부는 종의 본능을 따르라는 동료들에게 배척당해 배에 들어온 뱀잡이수리가 배를 떠나면서 시작된다. 뱀잡이수리를 찾던 고양이는 어느 탑에서 그를 발견하는데, 그 순간 뱀잡이수리는 하늘 위로 떠 올라 저 너머로 사라진다. 이 순간 질발로디스는 중력을 지우고 사물들과 동물들을 띄우면서, 초월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천착한다. 뱀잡이수리는 소속 공동체의 인정이 아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초월하고, 끝내 가시적인 영역에서 사라진다. 더 이상 그는 [플로우]라는 영화에 소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고양이는 떠올라서 사라지는 걸 저항하며 땅으로 내려온다. 이때 고양이는 자신을 연출하거나 표출하지 않는다. 질발로디스의 설명을 비틀자면, 고양이는 뱀잡이수리를 데려간 저 너머의 세계에 일순간 홀리며 무중력에 몸을 맡기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기 싫어한다. 그렇다고 고양이는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에 잠기지도, 탑 꼭대기에도 머무르지도 않는다. 고양이는 본능과 감각을 따라 헤엄쳐서 거슬러 올라와 기어이 배로 돌아온다. 이때 고양이의 귀환은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듯이 필사적이다. 고양이가 배에 타고 오르자 비가 멈추고 다시 땅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때 처음 배를 끌고 온 카피바라가 배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플로우]의 결말은 일종의 시험이다. 과연 그들은 일반적인 동물 나아가 자신이 속한 종을 초월해, 다른 종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때 어른거리는 영화는 소마이 신지의 [태풍 클럽]이다. [플로우][태풍 클럽] 둘 다 모든 걸 삼켜버리는 물 이미지에서 종=성장의 끝을 초월하려는 개별 주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물의 이미지가 끝나고 맑은 하늘 아래 도달한 끝은 판이하다. 소마이는 학교와 일본 사회, 영화라는 과거의 맥락을 질기고도 질긴 핏줄과도 같다고 정의 내린다. 아무리 롱테이크로 반항적이고 파격적인 에너지의 순간을 지속하고 포착하려고 해도 살아있는 한 일본, 일본 영화, 필름으로 포착된 실사 영화로 확장되어가는 숙명에 복속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다. 그렇기에 친구들의 거의 발광하듯이 이뤄지는 반항의 퍼포먼스에서 다소 한 발짝 물러서 있던 주인공 미카미는 끝이 다가오자 반항적인 순간에 있었던 자신을 기괴하게 박제하는 방식으로 항거하고 종을 초월해버린다.

 

반대로 질발로디스는 사라짐이나 박제를 거부한다. 질발로디스는 기존의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저항하며 다른 양태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질발로디스는 인간적 맥락과 딱히 관계없게 설계된 폴리곤 동물들이, 인간적 미덕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습득하도록 조형한다. 그들은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조형되었기에 맥락에 복속되어버린 성장한 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한한 자유를 부여받은 셈이다.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지 않고 바라보는 수미상관적 오프닝과 엔딩 샷은 그 점에서 시간과 경험을 통해 쌓인 경험의 가치를 깨달은, 허구에서만 가능한 동물 주체의 모습을 보인다.

 

뱀잡이수리의 초월을 본 고양이가 지상으로 돌아온 이유를 혼자 있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라고 설명한 질발로디스는 인터뷰는 [플로우]의 어떤 모순적인 미학을 무의식적으로 꿰뚫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발로디스는 자신이 대상과 풍경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생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지상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길 원한다. 혹은 최대한 포착하길 원한다. 그 점에서 질발로디스는 포착의 실사 영화와 생성의 컴퓨터 3D 애니메이션의 틈새 속에서 밀레니얼 세대 이후 영상 연출자가 겪는 딜레마의 흐름 flow를 헤엄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질발로디스는 행동에만 집중하는 무성 액션 영화의 쾌감, 사실주의와 구성주의, 동물 영화의 전통과 실제 동물의 행동, 실사 영화와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구성물 사이를 헤엄쳐간다.

 

한편 [그랜드 투어]의 초월은 좀 더 메타픽션적인 자장에서 이뤄진다. [그랜드 투어]의 표면적인 끝은 명백히 비극이다. 도주와 추격으로 이어지던 두 남녀의 여정은 아시아의 냉혹함을 마주하면서 갑자기 멈춰버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랑의 유희는 갑자기 죽음의 벽에 막히고, 몰리는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가사 상태에 빠져든다. 이 영화가 1부와 2부 구성으로 한 사람의 여정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며, 에드워드 역시 잠들면서 영화에서 사라졌던 걸 생각하면 냉혹함이 두 번이나 가로막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인들은 언제나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는다. 또는 감정이나 시간적 틈새는 맞붙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따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때 고메스는 갑자기 조명을 스크린 쪽으로 비추고 촬영 스태프를 보여준다. 일종의 메타픽션 풍 액자식 구조라 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액자식 구조랑 달리, [그랜드 투어]의 액자 틀은 최후의 순간에만 자신을 드러내 초월을 보여준다. 이때 초월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연출하는 마술과도 다름없다. 이 마술 속에서 몰리는 다시 깨어나고 어디론가 부축받으며 사라진다. 몰리의 마지막 행보는 세트, 나아가 샷에서 나가는 듯한 제스처다. 즉 몰리는 [플로우]에 빗대서 설명하자면 지상으로 내려와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고양이보다 초월에 인도되어 영화를 빠져나오는 뱀잡이수리에 가깝다.

 

고메스는 질발로디스랑 달리 서사나 장르의 전형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복적으로 빠져나와 인물의 감정과 의지를 미지의 영역으로 이어가게 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전형성에 머물러서는 서사 속 상황을 구원하거나 새로운 양태의 모험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메스는 디지털의 가능성을 받아들여 실사 영화의 방법론들을 확장하거나 변주하고 이음새를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영화적 유희를 즐기며 여행을 지속한다. 하지만 동시에 고메스는 최종적으로는 그런 명확한 이음새, 나아가 숙명적 비극을 초월하는 로맨티시즘을 그려내고 싶어 한다. 대나무 숲에서 에드워드가 봤던 판다를 몰리가 도착해 보는 샷은 그 점에서 상당한 틈새를 두고 교차 편집으로 벌어지는 황홀한 로맨티시즘이다. 그들의 시선 방향과 궁극적인 도달점이 마침내 일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는 [그랜드 투어]의 혼종성이 [플로우]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로우]는 흔적만 남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나아가 서사/영화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 질발로디스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결국 질발로디스는 사라지지 않고 성장 서사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걸 택한다. 고양이는 기어이 사라지지 않고 바다를 거슬러 올라와, 힘을 합쳐 동료를 구해내고 종을 초월해 달라진 자신()을 인식하면서 끝난다. 재난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암시에도 [플로우]는 자기 인식적인 샷으로 드러난 성장의 결과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다시 말해 [플로우]는 동물이 주인공인 풀 CG 애니메이션 전통과 딜레마의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관객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게 성장의 결과를 내보이며 영화의 이음새를 깔끔하게 숨긴다.

 

반대로 미겔 고메스는 영화 제작 현장이라는 메타픽션적인 틀이자 바깥을 폭로하면서 지금까지 엄격하게 구분되어왔던 세계와 시간, 고전성과 현대성 간의 틈새를 무력화하는 데 집중한다. 가시적으로 흘러왔던 서사는 비극으로 막혔음에도 기어이 고메스의 개입으로 부활이 덧붙어지고 다시 낙천성으로 전환된다. 적어도 이 순간부터 몰리는 더는 과거의 시간, 나아가 영화 속 허구에만 속하지 않게 된다. 이런 부활이 완벽한 해피 엔딩을 보장하진 않지만, 기계장치의 신인 미겔 고메스는 엄격해 보였던 시공간의 이음새를 흐려버리고 그 흐릿해진 세계에서 몰리를 부활해 보내는 방식으로, 인물의 낙천성과 의지를 이어가게 한다. 최종적으로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는 지극히 현대 영화적인 방법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과거의 유령들이 영화를 보는 현재의 관객에게 도달하려는 투어라고도 할 수 있다.

 

[플로우][그랜드 투어]는 서로 관련 없는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얼핏 두 영화는 하나로 엮기엔 쉬이 까다로울 정도로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두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혼종적인 방법론과 목적과 방향성 없이 지속되는 흐름, 모험 도중 등장하는 초월적인 순간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모험 영화의 양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묘하게 공명한다. 어찌 보면 두 영화의 이런 공명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개체의 핵심을 찌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디지털의 유령 같은 특질과, 나아가 그 유령성에 대한 인간의 양면적인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