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단상

전후 현대 영화 속 소외자/소수자의 “질주하는” 신체에 대하여:『네 멋대로 해라』, 『400번의 구타』, 『장거리 주자의 고독』, 『황해』, 『밤의 다이아몬드』, 『이센셜 킬링』을 중심으로

giantroot2023. 1. 7. 23:10

1872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 설립자 릴랜드 스탠퍼드는 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탠퍼드는 달리는 말이 네 발이 지면에서 모두 떨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스탠퍼드가 선택한 방식은 사진이었다. 풍경 사진가 에드워드 J. 머이브리지에게 말이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해달라고 요구했고 머이브리지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1878년 스탠퍼드가 소유한 경주 트랙에 카메라를 여러 개 설치하고, 셔터에 실을 달아 말이 달리는 순간마다 끊게 만들어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사진은 곧 움직이는 말 The Horse in Motion이라 불리게 되었고. 머이브리지는 이 실험을 종합해 1879년 주프락시스코프라는 말이 달리는 이미지를 연속으로 보여주는, 초창기 영사기를 발명한다.

 

영화의 맹아로 꼽히는 주프락시스코프의 탄생 일화는, 영화가 어떤 대상에 매혹되어 태어났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움직임, 그것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신체 기관이다. 주프락시스코프 이후 등장한 영화는 달리는 신체를 포착하고자 애썼다. 여기서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는 사실 일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신체를 극도로 긴장시키고 소진해, 목표까지 빠르게 움직이게 만드는 행위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달리는 이유 대다수는 사냥하거나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의 달리기는 그보다는 좀 더 세부적인 목표가 부여되지만, 이 역시 위급함 또는 격렬함을 동반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적 없이 달리는 행위 역시 감정의 격렬한 표출이라는 (주로 자유의 표출)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영화들에서 달리기는 종종 움직임에 대한 매혹 그 이상으로 신체를 거쳐 파시즘 찬미의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레니 리펜슈탈의 악명 높은 올림픽 다큐멘터리 올림피아가 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달리는 육상 선수들의 숏은 달리는 신체에 대한 찬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신체의 찬미를 가능하도록 무대를 만든 나치 독일에 대한 찬미기도 했다. 하지만 이 찬미 뒤에는 나치 정권이 악명높은 수용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점과 이 소수자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다는 현실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치가 패망한 1940년대 이후 영화는 새로운 질문에 답해야 했다. 바로 사회적 소수자들의 신체가 달리는 순간을 포착할 때 어떤 영화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질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운동-이미지 개념을 다루면서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의 중요한 테제로 순수 시각 이미지의 등장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할리우드 서사 영화의 기초를 이루는 감각-운동 도식이 파괴되는 순간, 운동-이미지를 넘어 시간-이미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는 논지였는데, 들뢰즈는 이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주인공들이 사회적 소외자이며 수동적인 관찰과 행동 간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회상, , 세계, 결정으로 시간-이미지를 분류하면서 명시적인 서사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영화 문법의 이미지들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때마침 영화 기술 측면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카메라는 더욱 가벼워졌고, 네오리얼리즘을 비롯해 시네마 베리테 및 다이렉트 시네마 같은 새로운 영화 흐름은 스튜디오와 삼각대에서 벗어나 거리를 달려보자고 제안했다. 누벨바그 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새로운 달리기 숏의 등장을 보여주는 영화다. 네 멋대로 해라의 결말은 미셸이 총을 맞고 도주하다가 쓰러져 죽는 장면이다. 고다르는 이 장면을 실제 파리 도로에서 달리는 미셸을 풀 숏으로 따라가며 찍는다. 그리고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앞에서 미셸이 쓰러지자 카메라를 멈춰 세우고 미셸의 죽음과 결말을 동시에 선언한다. 400번의 구타결말 역시 달리기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가족을 떠나 교정원에 지내게 된 앙투안은 축구를 하다가 갑자기 교정원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네 멋대로 해라가 그랬듯이 트뤼포도 달리는 앙투안의 신체를 카메라와 함께 동행하면서 찍는다.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해안가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 앞으로 돌아선 앙투안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잡으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두 누벨바그 주자의 데뷔작 결말에서 달리기가 중요한 행위로 등장하며, 그 달리기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을 때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두 영화의 주인공은 반항하는 청년이다. 미셸은 경찰을 살해한 범죄자고, 앙투안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문제아다. 그렇기에 이들이 달리는 장면은 멈춰있는 장면과 대조되며, 자유의 매혹을 달리는 신체 속에서 풀어내고자 한다. 그 결과 두 영화 속 달리기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제도를 탈출하려는, 영화 어법적으로는 기존 형식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와 연결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그렇게 달려서 도착한 결말은 중단 내지는 멈춤이다. 주인공의 달리기는 갑작스러운 벽 (자동차가 다니는 차로, 바다) 앞에서 중단되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주인공들의 신체 이미지는 갑작스럽게 쓰러지거나 정지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런 정지는 영화를 마무리해야 하는 감독의 결단이기도 하지만, 사회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좌절한 자가 마주해야 하는 공허함이기도 하다. 네 멋대로 해라400번의 구타는 질주 숏에 내재한 운동-이미지를 중단시킴과 동시에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규율에서 벗어난 소외자의 자유와 무력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국 프리 시네마 기수는 토니 리처드슨은 이 두 영화의 달리기 숏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하다. 두 영화가 등장한 이후 1962년 작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 달리기라는 행위를 다루는 데 한 발짝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195-60년대 영국 성난 젊은이 흐름과 프리 시네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달리기라는 액션이 소외자의 심리와 조응하는 과정과 결과에 관심을 기울인다. 불우한 가정 상황 속에서 엇나간 끝에 소년원에 들어온 콜린은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청년이다. 이를 눈치챈 감독관의 추천에 장거리 주자로 뽑히게 된다. 감독관은 콜린에게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나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우승하도록 종용하게 한다. 이 순간부터 달리기는 단순히 신체적인 행위나 자유의 표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안정과 적응을 약속하는 맥락을 지니게 된다.

 

영화 후반부는 콜린이 장거리 주자로 크로스컨트리 시합에서 달리는 시퀀스로 진행된다. 리처드슨은 이 시퀀스를 구성하면서 카메라를 고정하지 않고 실제 장거리 시합 보도 촬영처럼 구성해뒀다. 하지만 일반적인 스포츠 중계 영상이랑 달리, 리처드슨은 콜린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회상 (대부분 이전까지 등장한 콜린의 일상이다) 숏과 트로피 숏, 달리기로 허덕이는 콜린의 신체와 표정을 담은 숏과 결합하고 있다. 요컨대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콜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념들로 구성된 시간-이미지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달리기로 구성된 운동-이미지를 충돌하게 만든다. 이런 몽타주 충돌을 통해 달리기는 건강한 신체를 찬미하기보다는 바로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견뎌야 하는 행위가 되며, 콜린은 지금까지의 자기 삶과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결국 콜린은 달리기 시합을 포기하고 코스를 일탈하면서, 달리기를 거부하게 된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사회적 소외자의 달리는 이유를 신체의 고통스러움과 사회적 인정을 향한 발버둥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결단을 시간-이미지의 논리를 따르는 파편화된 회상 숏과 운동-이미지의 논리를 따르는 고통스러운 신체 숏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심리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주인공은 달리기가 약속하는 보상을 포기하면서 다시 사회에서 이탈하게 된다.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 간의 충돌에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고, 결국 인물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그 점에서 인물의 달리기를 실존의 영역에 배치한 후 실시간으로 달리는 신체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상념 간의 치열한 번뇌와 결단을, 편집으로 결합해 현실과 잠재가 뒤섞인 결정-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전후 소외자 (혹은 반항아)를 주인공을 삼은 영화들의 질주는, 체제에 대한 반작용에 기반하고 있으며, 유달리 피로함과 무기력함이 두드러지고 있다. 언급한 이 영화들이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한 영화들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사회적 소외자의 수동적인 관찰과 행동 간의 불일치라는 네오리얼리즘의 관점을 질주라는 행위에서 어떻게 묘사할지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을 좀 더 심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소외자이긴 하지만 백인-남성이라는 특성을 고려해보면 사회적 소수자라 보긴 힘들 것이다. 심지어 추격받던 범죄자였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조차 백인 프랑스인이다. 그렇기에 소외자지만 소수자는 아닌 이들의 질주는 체제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반항에 가깝다. 하지만 소외자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인 자들의 질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소수자, 나아가 호모 사케르의 질주는 이미 상업 영화에서도 폭넓게 쓰이는 소재다. 유명한 예시로는 나홍진의 2010년 작 황해가 있을 것이다. 연변과 서울을 오가는 네오 누아르인 황해의 주인공은 연변 조선족 구남이다. 택시 운전사인 구남은 남한으로 넘어와 청부살인을 수행하지만, 이내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쫓기게 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구남을 자본의 논리와 욕망에 따라 구남을 호모 사케르적인 존재로 만든다. 구남이 남한에 넘어오는 이유는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로, 실제 조선족 이주 노동자가 남한으로 이주하는 동기를 필름 누아르의 논리로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구남은 남한에 밀입국해 살인을 저지르면서, 중국이나 남한 정부 모두에게 보호받을 수 없는 자가 된다. 체제에 반항이나 탈주하려는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도주자가 된다는 점에서 구남은 상술한 1960년대 유럽 뉴웨이브 영화에 등장했던 백인 소외자들하고는 거리를 두고 있다.

 

쫓기는 순간부터 구남은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달리고 도망치고 죽인다. 이때 구남은 강박적인 플래시백으로 아내에 대한 환상을 떠올린다. 피로한 신체의 감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플래시백은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 질주 숏과 플래시백 숏을 결합하는 방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구남의 플래시백은 가치관의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차라리 끊임없이 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신체와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황해가 도달하는 결말 역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르다. 여타 소외자들의 탈주극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던 질주가 멈추면서 끝나는 점은 같다. 하지만 황해가 질주를 끝내는 방식은 좌절보다도 초현실적인 소진에 가깝다. 모든 기력을 소모한 구남은 밀수선 안에서 탈진한 채 사망하고 시체는 황해에 던져져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 숏 역시 구남의 시점으로 모호하게 제시되는 아내의 귀향이다.

 

이와 관련해 김소영의 평론 한국 영화의 경계 2: <황해>의 난민의 몸(2011)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김소영의 글은 황해의 결말 배경인 황해=서해가 월경의 공간이며 단순히 뼈만 남은 난민의 액션으로 이뤄가는 영화의 태도가 묘사적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 양산되는 비정규직과 경제적 난민이 야기하는 불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투사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구남의 죽음이 남한도 연변도 아닌 황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피와 땅의 결합이라는 파시스트적 슬로건과 반대되는 죽음이라고 본다. 김소영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난민의 질주/도주라는 행위로 대표되는 액션이 묘사적이면서도 투사적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여기서 액션이라는 단어는 구남이 벌이는 폭력이나 도주 같은 생존과 관련된 행동을 총칭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묘사적이면서도 불안의 투사로 진행되는 액션이 끝났을 때 등장하는 초현실적 소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여기서 좀 더 급진적인 부류의 영화를 다루고자 한다. 이 부류의 영화들은, 목표와 방향조차 소실된 채 인물의 질주로만 이뤄진 최소주의 호모 사케르 도주극이라 부를만한 영화들이다. 대표적으로 체코 영화감독 얀 네메츠의 1964년 데뷔작 밤의 다이아몬드와 폴란드 영화감독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2010년 작 이센셜 킬링이 있다. 밤의 다이아몬드는 탈주로 시작하는 영화다. 거의 2분 동안 총소리와 고함과 함께 두 소년은 달린다. 카메라는 핸드헬드 롱테이크를 활용해 이들을 수평으로 계속 쫓아가는데 종종 두 소년의 도망가는 모습에 딱 달라붙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총소리가 잦아들고 숲이 어두워지면서 긴박한 도주는 속도를 서서히 늦추게 된다. 이 영화는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한 홀로코스트 영화다. 하지만 분명 강제 수용 열차에서 탈주하는 시퀀스임에도 사전 정보 없이는 그 맥락을 알 수 없다.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을 알 수 있는 영화 속 단서는 입고 있는 옷 같은 비언어-시각적인 단서들 뿐이다. 네메츠는 도주를 구성하는 디테일을 축소하거나 잘라내면서 영화를 구성하는 서사를 추상화한다. 자연히 두 소년의 도주 역시 방향을 잃어버린다. 영화 내내 그들은 쫓기고 있기에 (작용) 도주한다 (반작용)을 무한히 반복한다.

 

한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이센셜 킬링은 추격이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헬기를 보여주는 부감 숏으로 시작한다. 이는 영화 내내 이어질 모하메드의 도주를 추격하는 미군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며, 중동에서 작전 수행 중이던 미군을 살해한 지하디스트 모하메드는 미군 기지로 끌려가 심문받게 된다. 대다수의 중동-서구 간의 갈등을 다룬 정치/전쟁 영화에서는 모하메드가 자신을 변론하지만, 미군들에게 학대당하는 과정을 담은 숏으로 시퀀스를 구축할 것이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런 전략을 과감히 버린다. 모하메드의 시점에서 보여지는 미군 기지와 심문은 알아들을 수 없는 험악한 고성이 날아다니는, 몽롱한 악몽이다. 다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탈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스콜리모프스키는 얀 네메츠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영화를 이어간다.

 

두 영화가 소수자 주인공의 도주극이라는 건 명백하다. 밤의 다이아몬드는 나치와 사냥꾼들을 피해 도주하는 유대인 소년을, 이센셜 킬링은 미군을 살해한 지하디스트다. 둘을 쫓는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주인공의 정체성이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맥락을 형상화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특히 이센셜 킬링같은 경우, 명백한 테러리스트라는 설정으로 인물과 거리를 두고 있다. 여기다 두 영화의 감독은 도주자들을 연기하는 배우 캐스팅을 추상화한다. 밤의 다이아몬드에 나오는 두 소년은 유대인이 아닌 체코인을 캐스팅했다고 알려져 있다. 얀 네메츠는 이 캐스팅에 이센셜 킬링은 추상화 단계를 넘어 아예 분열적인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모하메드를 연기하는 배우 빈센트 갈로는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트럼프 지지로 논란이 되었던 극우적인 성향을 지닌 미국인 감독, 배우다. 스콜리모프스키 역시 폴란드 언론 인터뷰에서 빈센트 갈로 캐스팅에 대해 그의 외견에서 풍기는 인종/민족적 모호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Naczelny *Tygodnika Powszechnego* (29 October 2011). ["Wiadomości - Gazeta.pl"](http://wiadomosci.gazeta.pl/Wiadomosci/1,80276,8413082,Nie_interesuje_mnie_polityka.html). Wiadomosci.gazeta.pl. Retrieved 5 November 2011)

 

여기다 두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거나 욕구 표출 같은 짧은 대사로 영화의 액션이 펼쳐질 이유를 구축할 뿐이다. 심지어 이센셜 킬링같은 경우 언어의 불일치 (모하메드) 또는 언어의 삭제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청각 장애인 여성 마거릿)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한다. 본질적으로 두 영화는 짧은 대사와 음향 효과가 포함된 무성 영화에 가깝다. 설명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액션 (특히 질주) 숏들과 과거 평화로웠던 순간를 다루는 플래시백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에서 움직이는 몸은 순수하고도 추상적인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요컨대 이 두 영화는 상술한 영화들이 구사했던 심리에 기반한 시간-이미지와 움직이는 몸에 기반한 행동-이미지 간의 몽타주로 엉켜있는 결정-이미지의 구성을 더욱 순수하게 정제하려고 한다. 두 영화의 액션이 벌어지는 배경이 산이나 숲 같은 자연환경이라는 점도 이런 결정-이미지의 순수성을 더욱 강화한다. 밤의 다이아몬드이센셜 킬링은 도주하는 신체를 전시한다는 점에서 톰 거닝이 주창했던 어트랙션 시네마의 정의하고 닿아있다. 두 영화가 무성 영화의 방법론을 취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이 두 영화를 곧장 어트랙션 시네마로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영화가 노리는 효과는 거닝이 언급했던 어트랙션 시네마가 제공하려는 즐거움하고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두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동물로서 인간이다. 구체적으로는 원초적인 욕구에 기반한 충동-이미지의 표출이 두 영화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밤의 다이아몬드를 보자. 빵을 얻으러 민가에 들어간 소년이 부엌에서 일하던 여자와 마주하는 시퀀스가 있다. 소년과 여자가 마주 보는 숏 이후, 영화는 갑자기 소년이 여자를 밀치고 폭행하는 숏을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다음 숏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소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빵을 잘라준다. 밤의 다이아몬드에서 숏과 몽타주는 선형적인 시간을 따르지 않으며, 종종 감각과 지각, 욕구에 따라 무한히 확장되거나 비선형적으로 뒤섞인다. 얀 네메츠는 산발적이고 이질적인 숏을 편집 나아가 몽타주를 통해 도주하는 인간의 심리와 욕망을 낯설게 콜라주 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편집/몽타주 효과보다는 시퀀스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에 집중한다. 이 돌발 상황은 전기톱으로 나무꾼을 살해하는 장면이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에게서 젖을 빼앗아 먹는 장면처럼 폭력적이기도 하고, GPS 교통안내를 인간의 목소리로 착각하는 실소를 머금게 하는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바로 생존 욕구다. 탈주 후 모하메드가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은 도주, 살인, 먹기로 요약할 수 있다. 오히려 서로 괴리된 숏 간의 몽타주가 만들어내는 시적인 흐름마저 없기에 이센셜 킬링의 동물로서 인간은 훨씬 날 것의 무언가로 표출된다. 영화 마지막에 이뤄지는 모하메드와 마거릿과의 소통 역시 상처받은 짐승들끼리 치유하는 과정에 가깝다. 딥 엔드부전승같은 스콜리모프스키의 다른 영화들처럼 강박증으로 얽힌 해프닝과 퍼포먼스로 영화를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하자면 두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동물로서 인간, 욕망의 대리만족보다는 불만족과 고통에 가깝다. 그나마 모하메드의 가족과 종교 생활을 다룬 파편화된 플래시백-시간 이미지만이 인간으로서 정체성과 신념을 제시하지만, 그조차도 짧게 명멸하다 사라질 뿐이다.

 

그 점에서 이 두 영화는, 황해에서 다뤄진 신체를 소진한 소수자의 소멸이 왜 초현실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숏으로 결론지어지는가? 에 대한 상세한 해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영화에는 끊임없이 쫓겨야 하는 소수자의 불안감은 액션, 나아가 몽타주 및 미장센을 비롯한 영화적 구조에 투사되고 있다. 벌거벗겨진 삶, 호모 사케르의 발버둥 자체가 영화적 에너지로 승화하는 것이다. 세 영화의 결말은 영화 전체를 지탱했던 엔트로피가 산화하고 재만이 흩날리거나 (황해, 이센셜 킬링) 영겁의 순환에 빠진 모습을 (밤의 다이아몬드) 보여주고 있기에,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문명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결말에서야 자연을 활용하는 황해랑 달리, 밤의 다이아몬드이센셜 킬링은 문명(나아가 구체적인 정치적 맥락)을 배격한다. 그리고 추상화된 자연을 배경으로 일견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짜인 숏과 몽타주, 시퀀스로, 동물로서 인간의 본능과 욕망, 폭력성을 묘사하고, 불안함을 투사한다. 두 영화의 투사는 그 점에서 명시적인 정치사회 묘사보다 훨씬 복잡한 영역을 건드린다: 과연 인간을 벌거벗겨진 동물로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머이브리지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가 달리는 말의 신체 기관을 연속된 사진으로 포착하고 영사 장치 주프락시스코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스탠퍼드라는 자본가가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영화 매체를 지탱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자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주지하게 만든다. 그런데 머이브리지의 움직이는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흑인처럼 보이는 기수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터넷 글에 따르면 머이브리지 말 사진에 동원된 기수는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길버트 돔이라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명의 기수였다고 한다. (https://fdiv.net/2015/01/02/who-were-jockeys-muybridges-photographs)) 이 무명의 기수가 흑인인지는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미국 영화감독 조던 필은 흑인으로 받아들였던 게 분명하다. 예고편에서 흑인 여성 목장주 질 헤이우드는 머이브리지와 주프락시스코프 얘기를 꺼내면서 사실 사진 속 말 기수가 자신의 선조이며, 선조가 만든 목장은 영화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말한다.

 

분명 허구의 설정에 기반한 대사지만 상당히 뼈있는 통찰을 담은 대사라 할 수 있다. 말의 신체 기관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소수자인 흑인이 동원되었지만,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처럼 뚜렷하진 않지만, 이 흑인(처럼 보이는) 기수의 움직임은 분명히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는 기수에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흑인(처럼 보이는) 기수가 이 사진을 찍은 후 어떻게 살았는지도 잊혀졌기에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가 없다.

 

영화가 사회적 소외자/소수자의 질주 나아가 움직임을 포착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등장한 전후 소외자, 더 나아가 소수자의 질주극은 주체의 무력함과 신체의 피로를 공통점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소외자와 달리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이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소수자의 정체성은 질주하는 주체의 동물성과 초현실적인 소멸이라는 새로운 양태를 도출하게 만든다. 이런 영화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움직임에 대한 원초적인 매혹에 대해 재고하게 하며, 향후 영화가 소수자의 질주를 다룰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