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2015년 칸 영화제의 센세이션 중 하나였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중에서도 회색지대인 시체 처리반 ‘존더코만도’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을 재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했다는 평가와 도덕 판단이 부재한 듯한 시선과 더불어 역사의 비극을 영화 연출의 첨단으로 나가기 위해 착취한것 아니냐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렇다면 [사울의 아들]은 어떤 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영화가 현대 영화 중에서 어떤 전통에서 출발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영화는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논쟁에 휩싸였다. 무수한 영화들이 나왔지만 이 논쟁의 첨단에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를 들수 있다. [밤과 안개]는 이미 사라져버린 참상의 공간과, 분명하게 남아있는 당시 자료 사진을 교차시키면서 질문을 던졌다. [밤과 안개]는 끔찍한 참상을 당시에 찍혔던 영상들과 사진들로만 보여주고, 자신이 찍은 카메라는 없어져버린 공간만을 보여주면서 현재 시점에서 역사의 비극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한건 아닐까, 라는 고뇌를 던졌다. 실제로 레네는 [밤과 안개] 이후 [히로시마 내 사랑]부터 [사랑해 사랑해]까지 기억의 불일치와 재현이라는 문제에 파고들면서 그 고뇌의 근원을 파헤치고자 했다.
한편 란츠만은 [쇼아]에서 조금 더 신중한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수용소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도 비극의 순간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영화엔 어떤 자료화면도, 재연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란츠만은 생존자들이 회고하는 증언은 오로지 암시적인 세팅 속에서 드러났으며 동시에 그 재현 불가능한 끔찍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란츠만의 반대편에는 고다르가 있었다. 고다르는 란츠만을 향해 공격을 몇 번 가했는데, 그는 란츠만이 영화의 가능성, 나아가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논쟁을 틀어막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심지어 고다르는 란츠만을 홀로코스트 이후 시는 불가능하다, 라는 아도르노의 발언을 엮어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 논쟁은 곧 다른 학자들을 통해 이어졌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사울의 아들]은 바로 고다르와 란츠만이 논쟁했던 그 지점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영화다. 시작부터 알 수 있겠지만, 영화는 1인칭 시점의 영화다. 물론 로버트 몽고메리의 [호수의 여인]이나 [하드코어 헨리]처럼 주인공의 눈과 카메라가 동일시 된 영화가 아니다. 라즐로 네메스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처음부터 완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이 오직 사울 하나의 시선만을 허용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첫 장면은 그 점에서 영화의 시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낸다. 핀트가 엇나간 프레임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고 그 중 제일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화면 가득히 잡힌다. 맞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사울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자마자 네메스 감독은 그를 계속 행동하게 만든다. 네메스 감독은 1.37:1이라는 좁디좁은 프레임에서 영화는 부단히 움직이는 사울의 움직임과 시선만을 가득 채운 뒤, 그가 바라보는 캐릭터나 사물들을 아웃포커스로 처리한다. 이쯤 되면 어딘가 완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 아웃포커스는 마치 거기 있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듯하다.
물론 네메스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아웃포커스엔 단호한 결기가 서려 있다. 이 결기는 대체 무엇일까? 다시 첫 장면부터 생각해보자. 고정된 카메라에서 어떤 인물을 다가오게 한 뒤, 그 인물이 움직이는 동선에 찰싹 달라붙는 촬영 방식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기다림을 읽었다. 네메스의 카메라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쥐]의 블라덱 슈피겔만일수도, 아니면 [인생의 아름다워]의 귀도일수도, 아니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유태인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가 알다시피 사울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카메라를 트랙인하는 등의 “선명한” 방식을 쓰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답은 “네메스는 카메라의 전지전능함을 믿지 않는다.”, 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카메라가 감히 역사의 비극 속에 있었던 인간을 고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주인공 앞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몽타주나 편집을 이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를 고정시킨 뒤 흐릿하게 넘어 보이는 유태인들 속에서 주인공 사울을 불쑥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그가 속해있는 역사적 상황에 끌려 다니는 주인공을 계속 쫓아다닌다. 사울은 카메라 앞에 그렇게 ‘등장’한 뒤 홀로코스트 현장으로 뛰어들고, 카메라는 그 인물을 순응한 뒤, 그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핸드헬드와 스테디캠 같은 인물의 시점에 몰입하고자 하는 촬영방법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적인 극사실성을 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일견 사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울의 얼굴과 몸, 가끔 근처로 들어오는 인물들만을 허용하는 카메라의 아웃포커스는 오히려 모든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시퀀스에서 사울이 겪는 수난은 흐릿하거나 프레임 밖 음향으로 처리된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보다는 오히려 자크 오디아르나 페드로 코스타 같이 인물의 움직임과 운동감을 표현주의적으로 담아내는 영화에 가깝다.
물론 이 추상화는 관객들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친절히 설명된 존더코만도라던가 소품들과 희미하게 보이는 세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왜 네메스는 ‘그 주변’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얼마 안 있어 등장하는 가스실 시퀀스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가스실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네메스가 시각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오로지 분주히 움직이는 사울과 그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 시퀀스가 끝날 무렵 네메스는 사울이 틀어막는 문 너머로 들리는 끔찍한 비명이 외화면 에 울러퍼진다. 하지만 이 음향이 외재 음향이 아니라 내재 음향이 외재화 되었다. 즉 네메스는 가스실의 비명이라는 영화 속 음향이 영화 속 음향이라는 사실이 교묘하게 지우고 사운드 편집을 통해 가스실의 비명이 마치 주인공들이 인지할 수 없는 디제시스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더욱 끔찍하다. 디제시스 바깥으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듯 [사울의 아들]은 음향을 일종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끌고 간다. 이 영화에서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행동이나 음향들의 근원은 상술했지만 아웃포커스 효과로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울이 근원과 가까이 있을 때에만 마지못해 보이는데, 그조차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음향들은 화면과 따로 노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기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화형식이 거행되는 들판에서 사울이 랍비를 이끌고 나오는 시퀀스가 그렇다. 이 시퀀스가 우리는 시각 이미지를 통해선 간신히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반대로 대사가 포함된 음향을 들으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학대받으며 노역하는 수용자들, 불태워지는 시체들……. 그렇기에 우리는 희미한 이미지들과 분명한 소리를 합하면서 그 현장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이야말로 [사울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함이다. 이 영화의 지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함 속에서 주인공을 압박한다.
드라마라는 측면에서도 [사울의 아들]은 경계선상에 있다. 우리는 사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딘가 가까이 하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사울은 고결하지 않은 주인공이다. 그가 하는 몇몇 행동은 범죄다. 인간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러니는 “우리는 이미 죽은 상태다”라는 선언으로 등장한다. 죽은 자를 애도한다는 인간적인 행위는 살아있는 자를 이용하고 죽음과 비윤리를 외면한다는 아이러니를 반복한다. 심지어 네메스는 그 아이러니를 강화하기 위해 사울의 캐릭터를 애매하게 조형했다. 사울은 진짜로 자기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어떤 도덕적 속죄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네메스는 이 모든 행위는 이미 ‘죽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네메스는 어딘가 림보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영화적인 상황을 구성한다. 아웃포커스된 프레임 역시 일종의 림보적 효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아들]이 취한 영화적 기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네메스는 강제수용소라는 현장을 재현한 세트를 만든 뒤, 촬영할 땐 일부러 그 현장을 흐릿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네메스는 정 반대로 그 현장에서 음향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네메스는 음향을 명확하게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를 대신 ‘보여줄’ 수 있는 장치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음향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이미지와 합하거나 대조하는 방식으로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는 [사울의 아들]에 새겨지는 아웃포커스된 이미지에 음향으로 참상의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사울의 아들]에서 음향은 단순히 이미지에 종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은 란츠만식 침묵도 아닌 고다르식 드러냄도 아닌, 흐릿한 화면에 선명히 들리는 음향의 폭격으로 두 가지 방법론을 모드 선취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사울의 아들]을 보는 관객들은 흐릿한 화면에서 발생하는 선명한 소리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심지어 사울이 아수라장에 있을 때 에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수라장을 헤치고 사울이 무엇을 이루고자 행동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방법은 논쟁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오로지 사울의 시선만을 허용하는 이 영화의 샷은 놀랍게도 200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FPS 게임, 특히 밀리터리 FPS 게임의 경향과 닮아있다. 2000년대 초중반, 엉성했던 폴리곤 그래픽이 발전하면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나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 [배틀필드] 시리즈 같은 게임들은 방 안 모니터에서도 실제 전장으로 데려가는 만족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들은 모두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어에게 (고증과는 관계없이) 만족감을 줄만한 화려한 폭발과 총기 소음을 통해 전장을 누비는 영웅이 될 기회를 주었고 금세 돈을 쓸어 모았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들이 레퍼런스로 참조한 영화들과, 그 영화들을 모니터 위에 재현한 전쟁 이미지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블랙 호크 다운]이 정립한 저널리스틱한 태도로 때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스크린 위의 사실성의 극한을 추구했던 전쟁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들이 역으로 [13시간]이나 [액트 오브 밸러], [론 서바이버] 같은 전쟁 영화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자연히 그들은 전쟁을 엔터테인먼트 화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심지어 미군은 이 흐름에 편승해 [아메리칸즈 아미] 같은 모병 게임부터 E3에서 홍보 부스를 설치해 모병을 했던걸로 유명하다.
물론 [사울의 아들]이 FPS와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상기한 FPS 게임들은 [사울의 아들]처럼 창작자 자신이 알 수 없는 걸 상상하지 않고 흐릿하게 처리하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걸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채워넣는다. 적어도 [사울의 아들]은 밀리터리 FPS 게임들처럼 안일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전장의 이미지를 착취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 [사울의 아들]은 섬뜩하게도, FPS 게임이 추구하는 극한의 현실성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사울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사울의 행동과 시점만을 허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행동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사울이 노동을 하는 샷, 사울이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며 슬픔을 참는 샷, 사울이 도망가는 샷, 사울이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는 샷, 사울이 계단을 올라가는 샷, 사울이 나치에게 모욕을 당하는 샷.... 심지어 카메라가 사울에게서 멀어질 때도 카메라는 사울 근처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등장시켜 참상을 목격케 한다. 즉 서사적으로 네메스는 사울에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카메라는 사울에 몰입해 있다. 후술할 마지막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원칙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상술했던 사울이 학살당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랍비를 찾아 헤매는 시퀀스이다. 이 순간을 묘사하는 카메라는 FPS 게임들이라던가 [칠드런 오브 맨] 같은 전쟁의 참상 속에 달려가며 숨 가쁘게 질주하는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상기한 FPS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 시점에 몰입을 해 즉각적으로 총을 쏘고 달려가서 적을 때려눕힌다면, [사울의 아들]을 보는 사람들은 사울이 살아남기 위해 하는 액션들에 몰입해 그가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지 서스펜스를 느끼며 체험한다. 한마디로 카메라가 이입하는 대상에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다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이는 영화 제작 현장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딜레마에 가깝다. 라즐로 네메스는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역사적 자료에 기반에 수용소 세트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수용소 옷을 입히고 촬영을 해야 한다. 이 준비 과정이 일반적인 전쟁 영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사운드 스테이지 촬영으로 전쟁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에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거친 지금 이 시기에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전쟁 영화 촬영을 한다면 가짜가 될 게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이건 네메스가 추구하는 윤리와 미학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 전쟁과 감금, 학살은 사운드스테이지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울에게서 멀어져 전체를 조감하는 구도로 촬영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네메스가 세워놓은 윤리는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결국 네메스는 여타 전쟁 영화나 FPS 게임들처럼 정교하게 재현한 수용소에서 시야각을 좁히고 흐리게 하는 방식으로 디테일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비극에 예의를 표한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사울 주변만의 시선을 고집하던 [사울의 아들]은 결말에서 자신의 원칙을 하나 깬다. 어떻게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울은 아들의 시체마저 강에서 잃어버리고, 겨우 탈출해 어느 외딴 집에 숨는다. 이때 사울은 소련군을 찾아 동포들을 해방시키자는 계획을 흘려듣다가, 한 아이가 자신을 향해 바라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때 사울은 환하게 웃는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사울에게서 벗어나 아이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아이가 독일군에게 입이 막혀있는 동안, 사울이 있는 곳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아이는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결말 시퀀스의 구성은 그동안 사울에게 몰입해왔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카메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이에게 넘어가 마무리 짓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장면은 사울의 시선이 아이의 시선으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울의 심리에 기반을 두어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울이 아이를 향해 웃는 장면은 사울의 마음 깊은 기저에 안식과 평화와 연계되어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소련군에 대해 떠드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사울의 표정만을 집중하는 카메라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소련군이라던가 반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안식이다. 그 순간은, 소년이 어느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음 샷에서 유령처럼 불쑥 등장한다. 소년의 이런 등장은 마치 사울의 아들이 유령으로 등장한 것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
이 순간 카메라는 갑자기 사울에게서 멀어져 소년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한창을 멀어졌을 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며 사울이 죽음을 맞이한다. 섬뜩한 점은 사울의 죽음은 초반에 등장한 가스실 시퀀스처럼 외화면에 울려 퍼지는 외재 음향처럼 보이는 내재 음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네메스는 이로써 극을 이끌었던 사울의 죽음을, 가스실 희생자들이나 살해당한 무수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동일시한다. 이때 급격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울에게 닥쳐올 역사의 비극을 못 보겠다듯이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갑자기 멈춰서고 아이는 숲 너머로 사라진다. 그렇게 카메라가 멈춰서 바라보는 곳은 사울이 죽은 곳도 아닌 아이가 사라진 곳이다. 결국 마지막 프레임에 남는 건 아무도 없는 울창한 숲 뿐이다.
이 결말은 홀로코스트를 바라보는 라즐로 네메스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네메스는 이 결말에 대해 마냥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아이러니컬한 구원이라 평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울이 죽은 폐가를 돌아보지 않고 아이를 바라본 것은 무엇 때문 이였을까? 사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자”를 위한 역설적인 구원이라면, 그 역설적인 구원을 기억할 자로 사울의 아들을 닮은 남자아이를 지목한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을 장식한 텅 빈 화면은 무력해보인다. 네메스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아가지도 않지만 미래를 쫓아가지도 않는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던 영화의 카메라와 아웃포커스 기법과 연계시켜보면, 이 결말의 미장센은 그렇게 영화 내내 밀고 갔던 자신의 방법론이 정말로 옳았는지, 미래를 쫓아가 확인해야 할지 확신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가깝다. 그렇기에 네메스는 마지막 프레임에 어느 누구도 쫓아가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결말은, 그동안 자신이 구축해왔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카메라가 가질 수 있는 FPS식 몰입의 위험성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프레임으로 제거하려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의 아들]은 권선징악식 홀로코스트의 종말을 얘기하지도, 희생자에 대한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영화의 의도는 끔찍한 참상의 희생양이 현실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선택의 아이러니 도덕적 판단 없이 그 무게를 이해하길 바라는 것이다. [사울의 아들]이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 홀로코스트와 전쟁이라는 스펙타클을 기대할법한 순간을 일부러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영리하면서도 신중하게 프레임 내 정보를 통제하고 가치판단을 배재한 채 배우의 움직임에서 어떤 원초적인 슬픔과 절박함을 끌어낼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여전히 논쟁적인 구석이 있다. 과연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스펙터클을 억누르지 않았던 게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가 그랬듯이, 네메스는 어떻게 영화에서 폭력적인 이미지가 작동하는지 인식했으며 그 인식과 사유를 윤리적으로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던 건 인정해야 할듯하다. 단적으로 [사울의 아들]을 보면서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관객은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그 스펙타클에서 어떤 공포와 무력감, 슬픔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사울의 아들]은 상술한 FPS 게임의 스펙타클의 무비판적 오락화이라는 함정을 피해 역사가 가지고 있는 끔찍함을 전달하는데 일단은 성공했다.
상술한 [폭력의 역사]는 폭력 이미지의 메커니즘을 갱스터/액션 영화라는 장르 언어와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논리적인 샷/시퀀스 연결법과 시퀀스 간의 대위법이 맞물려 드러냈으며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객관적으로 그 과정을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방식은 사기극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안고 있다. 실제로도 영화는 헛디딜 뻔 한 순간들을 종종 노출한다. 가령 사울이 랍비를 찾아가던 도중, 멀리서 도망가다가 총살당하는 유태인을 흘끔 보여주는 시점 샷을 보자. 네메스는 이 컷에 담긴 총살당한 유태인의 디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전 샷들처럼 흐릿하게 처리할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자면, 그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줬다고 해도 영화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총살당한 유태인이 사울과 관계있는 것도 아니고, 사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집하면서 굳이 보여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영화를 만약 VR로 관람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흐릿하지만 존재하는 디테일들은 과연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 올 것인가? 이 영화의 윤리적인 당위성은 1.33:1이긴 해도 비교적 넓은 스크린이기에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관객은 사울에게만 허용된 영화 속 관찰자 시선보다 넓은 시야를 보장받기 때문에 사울과 사울이 속한 배경 상황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얘기하면 주관적인 샷과 그 주관적 샷 너머에 있는 흐릿하지만 객관적인 후경의 비율을 상당히 위태롭게 잡혀있다는 얘기도 된다.
동시에 [사울의 아들]의 인물 간의 폭력적인 관계가 샷의 논리에 반영되는 방식이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샷-리버스 샷 구도가 거의 없이 사울의 샷이 중심이 되는 영화인데다, 서사 자체도 나치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라면 청소하는 척 하면서 시체를 찾으러 온 사울이 변명하자 나치들이 모욕을 주는 장면인데, 이때도 네메스는 나치에 대해 혐오를 보일 뿐 그들의 심리나 논리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에서 나치는 마치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같은 존재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를 재난영화라고도 우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를 배재한 천재지변적 묘사는 감정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지만, 반대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맹점도 안고 있다. 이런 단순화는 체험에 비중을 두다보니 어쩔 수 없는 맹점이라 본다.
재구성의 원초적인 감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비관주의를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전하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사울의 아들]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텅 빈 프레임은 그 점에서 조금 섬뜩하다. 마치 보이지 않지만 저항할 수 없는 허무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고 망설이는 인상이랄까. 극단적인 체험이 끝나고 네메스는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면서 카메라를 멈춘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울의 아들]은 FPS와 VR 시대에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에 대한 도발적인 텍스트로 받아들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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