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Good Morning] (1959)

giantroot2017. 1. 9. 01:11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이나 [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영화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다. [동경 이야기]로 스타일의 완성한 오즈는 [이른 봄]부터 초기작들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를 자처했던 [부초]랑 동시기인 [안녕하세요]는 전후에 만든 [태어나기는 했으나]에서 다뤘던 아이들로 다시 돌아온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태어나기는 했으나]의 느슨한 리메이크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녕하세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문물이었던 텔레비전이다. 이웃집 신식 문물을 텔레비전에 환장한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어떻게든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고 싶어하지만 엄격한 그들의 부모님은 거부한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침묵하는 것으로 반항하고 이 와중에 미노루와 오사무 주변의 친구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선 다른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도 그렇지만, [안녕하세요]를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떤 강력한 구조가 영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첫 두 컷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으례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꾸준히 개척해왔던 필로우 샷과 정물 샷으로 영화의 확고한 구조를 세운다. 두 집의 지붕 처마를 이용한 프레이밍 위에 등교하는 아이들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진행되는 공간과 인물을 모두 설명해낸다. 이 장면의 정교함과 치밀함은 무서울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웃한 집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이 많은 영화인데, 오즈는 철저히 다다미 쇼트을 기반으로 문 프레임과 그 곳을 오가며 대화하는 인물의 동선을 맞춰서 프레임을 짜고 있다. 스타일면에서 완숙한 시절의 영화답게 [안녕하세요]는 넉넉한 인심과 달리 치밀하기 그지 없다.

재미있는것은 [안녕하세요]에서는 그 치밀한 구조를 이탈하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정확하게 뭘 지시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들이였다. 하라 세츠코나 류 치수 같은 오즈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은 오즈 영화 속에서 비슷비슷한 표정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얌전하며 예의바르며, 가끔 감정을 표출한다 해도 단아하게 정리해낼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초인적으로 현명하다. 그렇기에 오즈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친숙한 현명함에 안도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즈가 강력하게 믿는 세계 법칙의 일부로써 행동한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자유롭다.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반복되는 인사말로 대표되는 오즈의 세계를 한심하게 여기며, 자신이 욕망하는걸 얻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다. 그들은 명백히 오즈의 우주를 이루는 세계의 법칙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반항한다. 이는 유성 영화에 대한 무성 영화적 반항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날씨네요' 같은 발화를 우습게 여기며 방귀를 끼는 간단한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며, 어쩔수 없이 말을 할때조차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유성영화적이기 보다는 무성영화적이다. 찰리 채플린 같은 무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무성영화적 유머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발견되는게 아니다. 미츠에가 식칼을 들어 세일즈맨의 연필을 깎는 장면은 아마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장 웃긴 장면일 것이다. 여기엔 오즈 자신의 셀프 패러디도 담겨 있다. 아이들의 이마를 누르면 방귀를 뀐다는 설정 자체가 반복되는 오즈 영화 특유의 반복되는 구조를 연상케하지 않는가? 심지어 오즈는 친절하게 한 아이는 똥을 지리게 한다.

[안녕하세요]는 다른 오즈 영화들보다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한쪽엔 TV와 서양 잠옷을 입는 부부가 사는 집과,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사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서구식 공간이 있으며 다른 한 쪽은 다다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민의 공간이 있다. [안녕하세요]의 전개 대부분은 미노루와 오사무가 문명의 이기 때문에 두 공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미노루와 오사무는 설정상 학교를 다니는 연령대의 아이들임에도 이 영화에서 학교는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한다. 두 공간의 대조를 집중해달라는 의도 때문일까?

이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은 세대라는 문제도 반영되어 있다. 아마 [안녕하세요]는 류 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상이 완고한 가부장으로 출연하는 얼마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류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 케이타로가 미노루와 오사무를 혼내는 장면은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부장성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이다. 노리코 삼부작에서 류치수는 온화하고 현명한 노인이라면, [안녕하세요]의 케이타로는 현실에 찌든 모습이 강하다. 이런 찌듬은 케이타로 뿐만 아니라, 해고 뒤 쓸쓸히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는 토미자와라는 캐릭터로 잘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한 균열이 영화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은 상술한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물과 그걸 향유하는 자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못 쫒아가는 자의 낙오이며, 소통의 엇갈림으로 발생하는 오해기도 하다. 때론 그 균열은 비등점까지 치닫는다. 아무것도 모른채 미노루와 오사무가 갉아먹는 주축돌에다 쥐약을 발라놓는 계획을 하는 타미코라던가, 엉뚱한 오해로 이웃들이 뒷담화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오즈 영화답지 않은 아슬아슬함이 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그 균열을 극한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는 초반부에 세워졌던 세계를 이루는 구조에 대한 강력한 믿음으로 이내 다른 오즈 영화들처럼 그 균열을 금세 메꾼다. 다만 [안녕하세요]는 그 균열을 메꾸는 자는 전작들처럼 현명한 인물이 아니라, 중재자다. 오즈는 이 균열을 메꿀 자로 아이들의 영어교사인 헤이이치로를 내세운다. 그는 서구식 아파트에 살며, 영어라는 신문물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어른이다. 그는 아이들의 방귀 농담을 바보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두 형제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요컨데 헤이이치로는 아이들의 세계를 떠났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줄 아는 사람이다.

헤이이치로의 중재로 소동이 끝난 후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초반부의 안정된 구조로 돌아간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약간의 꾸지람을 듣고 그렇게 원하는 텔레비전을 얻고, 직장에서 밀려난 세일즈맨 토미자와는 새로운 직장을 얻는데 성공한다. 이웃들도 어느새 오해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 역시 그런 일상 속에서 일어난 유아적인 욕구 해소다. 정밀하게 구성된 프레임 속에서 공간과 인물 간의 관계가 강조되는 와중에 정곡을 찌르지만 넉넉한 인심을 품은 유머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안녕하세요]는 자크 타티의 영화랑 닮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대체 그런 균열마저도 품어안을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곳일까? 그 믿음의 단서은 영화의 제목인 '안녕하세요'에서 온다. 아이들의 투덜거림을 인정하면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일견 단순한 인사조차도 분명 의미가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오즈는 그 의미의 아름다움을 헤이이치로를 통해 보여준다.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헤이이치로와 미노루 형제의 이모인 세츠코는 승강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그들은 그러나 고백 대신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인삿말을 한다. 하지만 이 인삿말이 무의미한 인사가 아닌 어떤 관계의 시작이라는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형제 중 오사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마무라 쇼헤이의 [니시긴자역 앞에서]에서 출연한 바 있다. 오즈가 그 영화를 보고 오사무에 캐스팅했을지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마무라가 반 오즈주의자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안녕하세요]에서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품어안는 방식은 후배들이 일으킨 쇼치쿠 뉴웨이브에 대한 답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무의미하다."는 후배들의 도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오즈는 분명 그 안녕하세요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안녕하세요'는 오즈의 성찰과 더불어 오랫동안 구축해온 영화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