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의 가수인 비요크는 2008년 한국 음악 잡지랑 내한 인터뷰를 하던 도중, “아이슬란드에는 신선함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곳의 풍경은 매우 삭막하고 솔직해요. 상당히 ‘구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복잡한 느낌은 없어요. 그래서 아이슬란드에는 아이러니가 별로 없죠.” 라고 말한 바 있다. 1년에 10편 정도의 영화가 나오고, 대부분의 영화계 종사자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아이슬란드 영화계가 간만에 배출한 [램스]는 그런 비요크의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설정은 단순하다. 40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내던 시골 양치기 형제가 양이 폐사될 위기에 처하자,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는 얘기다. 그리머 해커나르손의 연출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잔 기교 없는 샷과 구도, 몽타쥬, 가끔 등장하는 썰렁한 유머는 아키 카우라스마키나 로이 안데르손 같은 북유럽 유머 거장이나 다구르 카리 같은 선배 아이슬란드 감독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구식'이다.
하지만 [램스]의 ‘삭막하고 솔직한 구식 연출’은 오히려 장점이다. 그리머 감독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잘 알고 있다. 양이 죽어버리면 생활 기반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농부들이 살아가는 [램스]의 세계는 한국의 축산 농가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중심이 되는 형제간의 갈등과 화합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익숙한 상황과 감정이 낯선 공간과 디테일과 배합되며 독특한 맛이 나는 것이다. 무뚝뚝하지만 정직한 태도 때문에 절로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 그들이 행복해지길 바라게 된다.
그리머 감독의 유머 감각도 기억할만하다. 같이 집을 나서면서도 서로에게 말도 안하고 가버리는 형제의 모습을 롱 샷으로 보여주는 장면, 개에게 편지를 물어 보내는 걸로 형제가 최소한의 의사 소통을 하는 장면, 기절한 키디를 구미가 포크레인에다 실어 병원에다가 내려다놓고 가버리는 장면, 지하에다가 양을 키우면서 태연하게 밥을 먹는 구미 같은 소소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유머가 많다. 이 또한 ‘구식’ 연출의 신중함으로 덕을 많이 보는 경향이 크다. [램스]의 유머는 침착한 리듬과 컷 연결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연출하면서 생기는 위화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처럼 그리머 감독은 정직하게 샷을 쌓아올리며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구미와 키디 형제간의 감정/태도 변화를 짚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매개체에 있는 건 양이다. 이 양을 향한 아이슬란드인들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열광적인 애정은, 상기한 유머로도 표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우수 양 선발 대회로 형제간의 질투와 다툼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양을 살리기 위해 두 사람의 관계는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점에서 [램스]는 양이라는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매력을 샷에 우직하게 담아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그리머 감독은 종종 롱 샷으로 양과 인간이 아이슬란드의 삭막하지만 매력적인 자연 풍경을 누비는 걸 보여주기도 하는데, 북유럽 영화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 풍경을 활용해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램스]는 비요크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아이러니라던가 복잡한 느낌 없이 삭막하고 솔직한 영화다. 그 솔직함 때문에 복잡한 걸작이 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램스]의 신선함 역시 거기서 비롯되고 있다. 로컬 시네마로써 가능한 영역 속에서 성실하게 일궈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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