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Fly/비문학

장 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giantroot2015. 6. 5. 17:12



사유 속의 영화

저자
이윤영 (편역)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4-18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영화, 오로지 영화만이!” 20세기 최고의 지성들이 쓴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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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시작은 프로이토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사진기”의 비유를 들면서 광학적인 비유를 통해 심리 현상 전체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새로운 비유로 넘어갔다. 이처럼 광학적인 비유를 들었던 프로이트의 이런 선택은 지구 중심 세계관의 종말을 불러왔던 광학 장치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계를 맺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광학 장치는 회화 작품을 만들때에는 인위적인 원근법을 도입하는데 쓰였다는 것이다. 보드리가 지적하는 점은, 이 인위적인 원근법이 ‘주체’를 역동적인 중심으로 놓거나 의미의 기원을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광학적 도구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쓰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의문이 ‘중립성’이라는 점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그 중립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어떤 ‘기술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지를 정립해야 한다고 보면서 앞으로 보완되고 검증되고 교정되어야 할 몇몇 지침들을 정립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현실과 기입의 장소인 카메라 사이에서, 기입과 영사 사이에서 일정한 작용들과 결과적으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 끼어든다. 이처럼 영화가 날 것 그대로의 질료하고 단절되고 분리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완성된 작품만 보고서는 중간 변형 단계를 짐작할 수 없는데 이는 카메라가 실제로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매개 정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샷 분할과 몽타주가 아무리 상호 의존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다루는 의미 있는 질료가 차이나기 때문에 샷 분할과 몽타주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며 완성된 작품과 그 소비에도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적 특수성은 하나의 작업, 다시 말해 하나의 변형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며 완성품의 소비가 인식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니면 감춰지는지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니면 그 효과 자체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질문하고도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다.

 영화사는 르네상스식 원근법적인 구성을 모델로 삼으면서 성장했다. 보드리는 그렇기에 영화는 원근법을 파괴한다기 보다는, 기준적 규범으로써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불연속적이며 복수의 시점에 기반을 둔 그리스인들의 원근법과 달리, 중심이 있는 공간을 위주로 발전해왔으며 주체가 반드시 점유해야 하는 지점 자체를 한정하고 있다. 때문에 광학적 구성은 환영적 현실을 창조하는 잠재적 이미지의 영사-반사로 나타나게 되며 이상적인 보기의 지점을 정돈하게 된다. 이는 존재의 완전성과 동질성이라는 형이상학의 감각적 재현이라는 서구식 회화의 비전하고도 연관관계가 있으며 영화가 만들어낸 관념론적 담론하고 연계시켜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영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연속된 이미지를 녹화할수 있다는 점에서 통합적이고 실체화시키는 특성에 대한 교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즉슨 현실에서 이뤄진 순간들의 절단 혹은 채취된 이런 이미지들은 카메라가 움직이기 때문에 ‘주체-눈’의 고정된 위치를 중화시키고 무화시키는 시점의 다양성을 생각해볼수 있기 때문이다. 영사작용은 고정된 연속적 이미지를 움직임의 연속성과 시간적 차원을 복구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불연속적 요소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복구가 문제를 만들어낸다. 즉 관객은 서로 차이가 나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를 지워야지 영화의 연속성을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적 차원에서도 각 이미지들 사이에서 차이 선택의 최소화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의 24프레임 내에서 간극이 있는 반복이 계속 일어나지만 정작 관객은 그 간극을 완벽하게 다른 이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는 꿈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언어에 담긴 어떤 불연속성을 통해 영화의 물질적인 기반을 작용하는걸 파악할수 있을거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영화가 물질적 쓰기의 체계를 숨기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관념론을 내포하는 장치의 기계적 모델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차이를 기입하는 광학 장치와 필름과 최소한의 차이를 선택하고 줄이는 기계 장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움직임과 연속성은 최소한의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지 그 자체는 지워진다. 정리하자면 영화 카메라로 찍힌 어떤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연속성, 움직임, 의미로 변형시키는 영사기를 통해 해방되고 동시에 의미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또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움직임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의 메커니즘은 스스로 움직여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스스로 움직이는 눈이 어떤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데다, 세계는 눈을 위해 구성될 것이다. 움직임은 초월적 주체가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우호적 조건을 실현시킨것 같으며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통해 영화 이미지는 특정한 무언가를 이미지화하기 위해 의미로써 구성한다. 보드리는 절대적 여기와 그것돠 대립된 다양한 인식들이 지각되진 않지만 따라다닌다고 본 후설의 이론을 인용해 연속성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한다. 연속성은 주체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주제의 위치를 제한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연속성은 차이를 부정하는 체계에서 출발한 형식적 연속성과 영화적 공간 속애서 내러티브적 연속성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온다. 그리고 내러티브적 연속성의 추구는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미가 발원하는 지점에 대한 통일성을 어떤 식으로돈 보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묘사한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적 기계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배치가 필요하다. 보드리는 이에 영화 상영관의 조건을 끌고 와 그것의 폐쇄성과 제한된 공간에서만 효과적으로 스크린-거울 이미지가 작동한다고 보고 있다. 영사기와 암실, 스크린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의 배치는 라캉이 묘사한 거울 단계가 작동하는데 필수적 배치를 재구성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두 가지 보완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운동 능력의 미성숙과 시각기관의 조숙한 성숙이다. 현실감의 기원은 여기에 바탕에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즉 영화가 흉내내는 현실은 자아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기 몸의 이미지가 아니기 떄문에 이중적 차원의 동일시를 구분할 수 있다. 이미지 그 자체의 동일시와 초월적 주체의 동일시라는 두 가지 동일시를 놓고 보면 카메라는 후자의 초월적 주체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건데, 관객은 카메라를 통해 스펙터클을 작동시키고 이를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과 동일시한다. 보드리는 카메라를 초월적 자아를 통해 유기적 통일성으로 통합되면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카메라와 주체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며 ‘주체가 카메라를 통해 스스로 구성되고 포착할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미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심적 자리의 환영적 제한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려는 기능이야말로 영화가 수행하려는 특수한 기능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재현의 이데올로기와 초월적인 관찰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일관적인 체계를 구축하는데, 이 때문에 보드리는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규정한 모델에 호응하는 일종의 대체적 심리 장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대체적인 심리 장치를 구성하는 결정적 기본적인 장치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영화의 근본을 뚫을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