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루멧의 [허공의 질주]의 도입부는 로버트 맥기가 정석적인 시나리오라고 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소년의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한 이 장면은 컷을 넘길수록 정보를 제한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여분의 모호함을 더해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미스터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영화는 재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긴장감과 흥미를 만들어낸다. 평범한 소년의 일상에서 1960년대 신좌익 테러리스트의 후일담과 연결되는 도입부는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터치로 그려지고 있으며 시드니 루멧의 연출 역시 그 시나리오를 무리하게 뛰어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우리가 '미국 영화'를 기대할때 바라는 모범적인 연출론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모범적이고 정석적이라고 해서 맥빠지는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시드니 루멧이 놀라운 점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태동부터 경력을 시작해 1990년대 미국 영화의 새로운 세대들이 경배해 마지 않는 조상이 되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완고한 매서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소위 시드니 루멧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꼽으라면 [네트워크]라던지 [12인의 성난 사람들], [뜨거운 오후], [형사 서피코] 같은 비타협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연한 독기가 어려있는 영화들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루멧은 뉴욕이라는 대도시 출신답게 도회적이고 냉철한 감독이다.
다만 [허공에의 질주]는 [네트워크]에서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패디 체예프스키의 비타협적인 각본을 그대로 밀고가던 독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한 물렁한 군의 루멧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허공에의 질주]의 물렁한 분위기는 각본가인 나오미 포너의 공이 크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나오미가 쓴 다른 유명한 각본들 ([다섯번째 계절]이나 [베리 굿 걸], [모정])을 살펴보면 이 추측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높아보이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자식이 가족 관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전개는 나오미의 다른 각본을 영화화한 [다섯번째 계절]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허공에의 질주]는 진짜 루멧의 걸작이 되기엔 이 멜로드라마적인 물렁한 분위기가 발목을 잡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도 하다. 단적으로 대니의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극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해 넣은 장르적 장치라는 느낌이 매우 강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쉽게 들고 다닐수 없는 악기라는 점도 매우 상징적이다.) 루멧의 냉정한 터치하고는 충돌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루멧은 자신이 장기를 발휘하는 부분이 아닌 물렁하고 감성적인 재료들도 의외로 진솔하게 다뤄내면서 그가 왜 '장인'이라고 불리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허공에의 질주]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인물들이 서 있는 배경과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좁게는 1960년대 히피들이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던 현실부터 시작해 넓게는 사랑과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자들이 변하지 않는 현실과 뜻하지 않은 희생감에서 나오는 죄책감 초라해져버린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반추하고 있다고 할까. 이쁘지 않게 매우 미국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오는 주드 허시와 크리스틴 라티는 그 점에서 매우 적확한 캐스팅이며 연기도 훌륭하다.
그런 반추와 동시에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정치사회적인 관계로 엮여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루멧과 포너는 그토록 불합리한 권력에 반발하며 이상적인 가치관을 내걸었던 좌파 지식인들도 부모자식이라는 권력관계의 주를 차지하고 있다는걸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묘사들은 포프 부부를 향한 거스의 '결국엔 자본주의 체제에 또다른 투항자일뿐'라는 비난과 더불어 좌파 이상론자들이 그렇게 기존 사회에서 분리해 만들고 싶어했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뭐가 다른지에 대한 고뇌로 이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허공에의 질주]는 서부극이나 [보니와 클라이드]를 뒤집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불의 저항해 공동체에 총을 갈기고 떠난 무법자들이 자신들이 만들려고 했던 새로운 공동체가 기실 기존 공동체랑 다른게 무엇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기 떄문이다. 하지만 루멧은 그 기존 공동체에서 탈주한 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주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니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그런데, 한 치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씁쓸해하는 장면이야말로 그런 루멧의 어른스러운 시선을 확인할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식으로 [허공에의 질주]는 캐릭터가 처한 정치사회적인 현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견 장르적이고 인공적으로 보였던 장치들조차 그 속에서 합당한 위치를 찾아가게 된다. 냉정할 정도로 탈출하기 힘겨보이는 현실과 꿈결같이 아름다운 로맨스와 예술에 대한 매료가 충돌하면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절절한 진실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대니의 연애 대상으로 나오는 로나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점에서 상당한 깊이와 계급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대니와 달리 충실한 중상류층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로나는 반대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반대되는 '자유'를 꿈꾼다. 그렇기에 로나는 대니에게서 해방감을 발견하고 대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안정된 삶으로써 로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그 안정된 삶을 파괴할까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양가적인 감정 때문에 [허공에의 질주]에 일견 장르적일수도 있던 로맨스에 계급 텍스트를 부여하면서 영화의 드라마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허공에의 질주]는 대니의 정착으로 결말이 난다. 계속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한 사람의 미래를 방해할수 없기에 가족은 대니가 어른으로써 공동체에 편입되는걸 선택한다. 이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한다고,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영화의 첫 장면과 결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첫 장면이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없는 일자 도로를 질주한다면, 결말에서는 환한 낮에 여러 길로 나눠진 도로에서 가족이 작별을 하고 세 가족를 태운 차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영화 내내 어둑어둑한 길을 해메고 있던 인물들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해방감과 씁쓸함을 느끼는 이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대구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에 대한 멜로 시드니 루멧의 냉철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 시선을 담은 영화라는걸 확인할 수 있다.
'Deeper Into Movie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로우 [It Follows] (2014) (0) | 2015.08.06 |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 (0) | 2015.07.20 |
리바이어던 [Leviathan] (2012) (0) | 2015.03.19 |
인톨러런스 [Intolerance] (1916) (0) | 2015.02.23 |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2014) (0) | 201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