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giantroot2014. 9. 21. 22:06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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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존 포드
출연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리 마빈, 베라 마일스,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정보
로맨스/멜로, 서부 | 미국 | 123 분 | -


존 포드의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보통 서부극의 종언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주 꼽히는 작품이다. 물론 포드가 이전에 만든 [아파치 요새]나 [수색자]에서도 서부 세계를 정리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적어도 도로시 M. 존스턴의 단편을 영화화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보면 어떤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나 회고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당장 이 영화의 시작은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정장의 상원의원 부부니깐 말이다. 서부극에서 문명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것부터 이미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의 서부는 문명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는걸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남녀는 '추모'를 하기 위해 서부로 왔다는게 서사에서 제시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플래시백의 형태를 취할수 밖에 없다. 서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플래시백은 처음부터 이 추모가 이상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꿈을 찾으라'는 말이 있었다는 현재 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은 서부에 왔다가 강도떼인 리버티 일당들에게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 된 동부 법조인 랜스다. 이 간단하지만 극명한 대비를 통해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고전 서부극이 그동안 즐겨 다뤄왔던 법이 없는 무법천지인 서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랜스는 자기 상식에 맞춰 신본에 법을 가져오려고 한다. 여기서 랜스는 두 명의 인물을 만나는데, 하나는 그의 아내가 될 할리고 또 하나는 추모의 대상인 톰 도니폰이다. 신본 주민인 이 둘은 둘 다 서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할리가 서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한다면 톰은 서부의 무법자를 상징한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수 있을 것이다. [리버티 벨런스]에는 여기에 교육의 문제를 개입시킨다. 초반에 랜스는 할리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고 이에 할리는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한다. 이에 랜스는 할리에게 사과하며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고 할리는 이를 받아들인다.

글이 필요없다고 말하던 할리가 글 읽는 걸 받아들인다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계몽의 과정이 서부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계몽이 매우 '여성적'이라는 사실도 적시한다. 여성인 할리는 말할것도 없고 랜스는 총실력도 어설프고 앞치마를 두르거나 서부와 어울리지 않는 양복 차림을 나타나 무법자에게 계집아이 같다고 놀림받는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예민한 연기도 한 몫한다.) 그리고 신문사 사장 역시 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서부 남성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 교육이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고 투표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사의 동력원으로 삼으면서 마을의 '계몽'이 동부의 문명과 여성성에서 비롯됬다는걸 보여준다. 그리고 문명과 여성성은 곧 서부의 무법 세계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끌어모으는데, 포드는 이를 미국의 건국 이념을 설명하는 교실에 멕시코인, 흑인, 여자, 아이를 배치함으로써 구체화시킨다.

이 계몽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 둘이 무법자라는건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둘이 왜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지는 다르다. 리버티는 매우 명백하다. 그 자신이 서부의 무법이며 그 무법을 통해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서사 속에서 리버티는 마을 저 너머의 목장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렇기에 마을이 계몽되어 투표를 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렇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랜스와 대적할 수 밖에 없는 아치 에너미가 된다. 리버티 벨런스라는 이름도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말장난이라 볼수도 있다. 발음만 놓고 보면 이 이름은 Liberty Balance와 비슷한데, 각각 '자유'와 '균형'을 의미한다. 자유는 그렇다치고 균형이라니 랜스의 반대쪽에 있기에 '균형'을 이룬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톰은 복잡하다. 톰은 분명 마을 바깥에 사는 무법자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방탕과 악행만이 법이며 그걸 공동체 모두에게 강요하는 리버티와 달리 차라리 방관한다. 그는 랜스와 할리가 뭘 하는 동안 휙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리버티의 악행에 대해서도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톰은 진짜로 공동체에 흥미가 없는게 아니다. 단적으로 톰은 할리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와 결혼해 자신의 세계에 그녀를 편입시키고 (집 옆에 공사중인 창고) 싶어한다. 또 어떻게든 법과 질서를 부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랜스에게도 '이 마을은 자네가 온 동부와는 다르다'고 못박으면서도 은근슬쩍 랜스가 하는 일에 얼굴을 들이민다. (물론 거기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는다.) 그리고 리버티의 악행를 나서서 막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 선을 긋는다. 차라리 그는 보이지 않게 공동체의 균형을 조정하는 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랜스의 계몽이 마침내 그를 신본을 대표하는 자로 선출하자는데까지 나가게 되고 랜스와 리버티 간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결국 랜스와 더불어 지성과 계몽을 대표했던 신문사 사장 호레이스가 리버티 일당의 린치로 사망하고 둘의 갈등은 한 쪽이 없어져야지 진정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다. 참을데까지 참았던 랜스는 리버티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물론 그 도전에서 랜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영화 내내 랜스는 서부의 법으로 대표되는 총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총조차 제대로 손질조차 안 되어 있다. 그렇지만 랜스는 리버티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데 성공하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로 영웅이 된다.

영화는 그 뒤로 랜스가 할리를 마을의 영웅으로 의원직 선출 자리까지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랜스는 여기서 이제 서부는 성실한 근면한 시민들을 위한 땅이 되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리버티를 지원했던 자들은 랜스에게 살인자가 어떻게 마을, 나아가 한 카운티를 대표하는 의원이 될 수 있냐고 힐난한다. 이에 수긍하고 서부를 포기하고 원래 있던 동부로 떠나려는 랜스에게 톰은 충격적인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랜스가 리버티를 쏘는 장면으로 돌아가 톰이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였다는걸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톰의 얼굴과 총 쏘는 장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 배치를 놓고 보면 톰은 랜스와 리버티의 1대1 대치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 서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랜스와 리버티라는 두 개의 점으로 만들어진 선의 구도는 진상이 밝히지면서 톰이 추가되고 면의 구도가 된다. 이 장면이 가지고 있는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강렬한 미장센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왜 서부극의 역사에 남을수 밖에 없는 명작이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랜스와 리버티의 대결은 분명한 조명과 단순한 배치도 아래에서 이뤄지지만 그 톰은 어둠 속에 있다. 그리고 영화는 표면과 이면을 두 번 제시함으로써 그 구도를 관객이 재인식할수 밖에 없게 만든다.

뜻밖에 사실에 어안이벙벙하는 랜스에게 톰은 다시 돌아가라고 말한다. 다시 돌아가 그들이 원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랜스는 그걸 수긍하고 다시 돌아가는데 이때 존 포드는 다시 한번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를 만들어낸다. 랜스는 다시 회장으로 돌아가 자신을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고 톰은 쓸쓸히 떠나간다. 그 자리엔 열렸다 닫히는 문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의 잔상은 단순하지만 이상할정도로 길고 오래 프레임에 남아서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는데, 아마 그 뒤로 이어지는 불타는 로 대표되는 톰의 좌절과 체념하고 연계되어 서부 무법자의 종언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순간으로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서부 (할리)도 문명 (랜스)과 함께 떠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긴장을 이룰 악당 (리버티 벨런스)도 죽은 서부의 공간에서 톰이 있을 자리는 남아있지 않다.

모든 회상이 끝난 뒤, 기자가 기사를 폐기함과 동시에 톰의 죽은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것이다. 존 포드는 무법자의 죽음을 언급하거나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 포드는 그저 거기에 남은 흔적들만 (톰의 장화라던가 홀로 남아 슬퍼하는 흑인 하인이라던가)을 보여주면서 어떤 정서를 환기시킨다. 포드는 죽음을 영화 속에서 감춤으로써 서부의 신화가 문자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 어려있다고 선언한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문명의 후예들은 무법자를 추모하지만 그걸 기록하지 못한 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여러모로 애잔함을 남긴다. 문명의 이기인 열차를 타고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는 랜스와 할리는 신본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는 랜스와 할리의 표정은 영 개운치 않다. 이미 신본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서부가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된 서부에서 남은 자들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원하지만 절대로 돌아갈수 없는 이 풍경이야말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가지고 있는 향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향수는 강력하고 근원적인 슬픔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풍화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현실의 벽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난 뒤 끝없이 이어져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그렇게 마지막 신화가 저물어가는 광경을 정리하는 마지막 만가로써 어울리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