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솔라리스 [Солярис / Solaris] (1972)

giantroot2014. 10. 23. 01:34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물에 흔들리는 풀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인상적인 이미지야말로 [솔라리스]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가 곧 수면에 분명하게 비치지만 다가갈수 없는 이미지에 현혹되는 과정을 다룰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의 얼굴은 초췌해 보인다. 크리스는 곧 연못을 지나쳐 집에 가려다가 잠시 연못에 들러 손을 씻으며 곧 수면에 잔잔한 파장이 퍼진다. '집으로 향하던 도중' 수면에 분명하게 있는 이미지에 접촉하지 못하고 그저 적시기만하는 이 장면에서 [솔라리스]가 집과 물이라는 두 이미지가 섞이고 밀어내는 과정을 주 갈등 소재로 다룰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도입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크리스가 연못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갈때 타르코프스키는 불쑥 말을 등장시킨다. 영화 흐름상 이 말의 등장은 어떤 개연성을 가지고 등장하는게 아니다. 정말 뜬금없을 정도로 불쑥 등장하는 이 말은 당혹감과 동시에 뭔가 모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경외심에 대한 힌트를 솔라리스의 이현상과 크리스의 캐릭터를 설명한 다음 장면에 집어넣는다. 여자와 아이가 말을 보러가던 도중 아이는 '저 안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게 뭐냐'고 하면서 두려워한다. 여자는 이에 아이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을 보며 순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아이와 여자는 마굿간에서 완전히 다가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채 그 말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분명 구체적인 복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후로도 저 말이 실은 솔라리스의 근원이였다 같은 전개는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전개와 상관없이 등장하는 이 말이야말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참고로 렘의 [솔라리스]가 아니다.)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것인가에 대한 복선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말이 인간과 종이 다른 동물이라는 사실을 주지해보면, 여자와 아이가 말을 보러 가는 과정 자체가 솔라리스로 가는 크리스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가 앞으로 만날 미지의 존재 솔라리스는 분명 두려울지 몰라도 위험한 존재는 아니며 일종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진정한 소통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응시'와 '관찰'로 끝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렘의 [솔라리스]에서도 비롯된 거긴 하지만 논리적인 대화나 설명이 아닌 (물론 영화도 렘이 제공한 정보를 읊긴 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그렇게까지 그 정보엔 흥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시적인 이미지와 상징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소설과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정립한다.

그렇기에 크리스가 솔라리스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솔라리스]는 호러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기억을 복사해 방문객을 보내는 솔라리스라는 존재는 말과 달리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핏 스쳐지나가는 미지의 존재, 으스스한 우주 정거장....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처럼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몽유병 환자처럼 흐느적거리며 기억을 모사하는 유령들이다. 심지어 인간들조차도 그 몽유병 속에 푹 잠겨 있다. 이런 몽유병 속을 해메다 자살해버린 기바리안이 물리학자라는 사실이 재미있는데 물리라는 분명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타자의 영역이기에 미쳐버렸다는 추론을 해볼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타르코프스키가 묘사하는 솔라리스의 "방문객"은 SF의 논리보다는 호러 영화의 논리에 가깝다. 물론 렘의 원작에서 탄탄하게 세워진 솔라리스의 현상에 대한 설명 때문에 여전히 SF의 영역에 몸을 담그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타자로써 유령'의 정점은 크리스의 죽은 아내 하리다. 하리가 등장하면서 이제 솔라리스라는 존재가 가져오는 경외와 두려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분명한 육체적인 존재감을 지닌 대상으로 물화된다. 당연히 크리스는 하리를 두려워 내친다. 솔라리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오던 일을 한 것이지만, 크리스의 입장에서 하리는 죽음과 상실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슬픔를 환기시키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크리스는 하리가 등장한 이후로 한동안 심하게 앓는다. [솔라리스]가 가져오는 몽유병적인 트랜스에 크리스도 서서히 잠식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솔라리스가 물의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는 것도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연못과 수면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물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를 가져와 영화의 감성을 푹 잠기게 한다. 이런 축축히 젖어들어가는 감성은 하리 역시 그런데 크리스가 하리를 받아들인 이후 영화의 슬픔은 하리 그 자체로 전이되어간다. 처음엔 단순하게 크리스의 기억에 있는 하리의 기억과 감정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리, 아니 하리를 흉내내고 있는 솔라리스의 정신은 괴리감에 빠진다. 자신이 정말로 느끼는 것이 하리의 감정인지, 아니면 그 기억에 있는 순간을 흉내내는 것인지. 반대로 크리스는 그런 흉내조차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후반부에는 모종의 이유로 죽어가고 있는 하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크리스와 하리의 이런 위치 변화는 기억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괴리를 담고 있다. 영화는 그런 철학적인 사유와 문제들를 장황할 정도로 느린 템포의 화면에 담아낸다.

결국 영화는 그 대답을 유보한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하리는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솔라리스는 인간의 뇌 엑스레이를 통해 인간의 정신 구조를 알아차리면서 더 이상 방문객을 보내지 않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셈이다. 하지만 이 봉합은 완벽한 해결이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유보로, 그동안 솔라리스가 남긴 감정의 진폭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구로 돌아와서도 슬픔과 유약한 늪에 빠져 있던 크리스는 여전히 환영을 본다. 지구로 돌아가기 직전 크리스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데, 여기서 크리스는 자신의 손을 어머니가 씻어주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결말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장면인데,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매우 이상하게 처리한다. 마치 솔라리스 속에 그 집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가지 가족에 대한 이미지는 [솔라리스]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로잡힌 두 개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여성이 서사와 무관한 순간에 정화의 이미지로 등장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아버지는 반사와 고립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영화의 주인공이 남성이여서 그런것일까? 어머니는 현재 시간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필름으로 물화된 세계에 존재하지만 아버지는 현재 시간에 분명한 이미지로 등장하면서도 갇힌것처럼 묘사된다. 이 두 이미지의 대립은 생명의 역사에서 두 성이 어떻게 무의식을 지배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합일점은 보이지 않고 남성 주체는 그 속에서 우울하게 헤맬 뿐이다. 그 점에서 [솔라리스]는 하드한 SF의 세계로 풀어내는 사고의 세계가 아닌 타르코프스키의 특유의 모성을 향한 멜랑콜리로 뒤덮이게 된다. 이미 없고 돌아갈수도 없지만 영원히 갈구하는 대상을 향한 오싹한 연가라고 할까. 물론 이 연가의 기반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이나 [신곡]과 같은 서양 고전들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렘의 비전이 강하게 남아있기에 [솔라리스]는 냉철한 논리 위에 세워진 시에 가까워진다. 그 논리가 영화 내에서 강하게 와닿지 않다는 점에서 타협의 흔적이 있지만 분명한 자기 논리를 가지고 흘러가는데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분명 타르코프스키는 SF라는 장르의 논리성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그 장르를 아예 해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였기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 진걸지도 모른다. 물론 렘의 원작 자체가 냉정하긴 해도 그의 작품치고 로맨틱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벽증적으로 당대 SF 유행인 번쩍거리는 묘사를 따르지 않고 낡은 고건물을 연상케하는 비주얼을 만들어낸 미술팀의 공로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그 점에서 훌륭한 논리를 지닌 SF라고 하기엔 갸웃거리긴 해도 인상적인 SF 영화라는데는 이견이 없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