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마스터 [The Master] (2012)

giantroot2013. 7. 28. 22:11



마스터 (2013)

The Master 
7.9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호아킨 피닉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아담스, 로라 던, 래미 말렉
정보
드라마 | 미국 | 138 분 | 2013-07-11


(누설이 있습니다.)


확실히 폴 토마스 앤더슨은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로 새로운 분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기 나이트]를 제외하면-아니 [부기 나이트]도 생각해보면 [데어 윌 비 블러드]만큼 올라가지는 않았다.-현대 LA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희노애락을 다뤘던 앤더슨의 영화는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본격적인 시대극의 영역에 들어섰고 음악감독은 존 브라이언에서 라디오헤드의 자니 그린우드로 대체됬다. 역사적 배경은 그 어떤 영화들보다 중요하게 자리잡게 됬고, 개인의 과거와 역사적 배경을 엮는 고리는 더욱 섬세해졌다.


[마스터]는 그 심화를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참전군인들은 사회로 돌아간다. 프레디 퀠도 그중 하나지만 그는 도통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사고를 친 끝에 그는 어느 유람선에 몰래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랭카스터 토드와 그가 이끄는 코즈라는 신흥 종교 단체에 들어서게 된다.


[데어 윌 비 블러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마스터]에서 똑같은 태도로 랭카스터를 다룰거라고 생각할것이다. 하지만 랭카스터 토드는 일라이 선데이와 다른 캐릭터다. 끝없는 병맛과 광신으로 점철되어 있던 일라이와 달리 랭카스터는 그럭저럭 이해할만한 인물이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랭카스터의 입장엔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앤더슨은 랭카스터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 결과 영화는 좀 괴이해지기 시작한다. [마스터]엔 도덕적 단죄나 비판, 심지어 방향 제시마저 없다. 선의에 가득한 사기꾼과 믿음과 불신을 왔다갔다하는 광인의 치유기였다가 어느 순간엔 광인에게 거꾸로 영감을 얻는 철학자의 이야기로 넘어가다가 유사 부자의 이야기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그 모든 것도 아니게 된다. [마스터]의 난해함은 여기서 온다. 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뭐라 정의하려 들지 않기에 관객들은 애먹을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스터]의 프레디와 랭커스터의 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사건들은 분명히 의존적인 구석이 있다. 왜 프레디는 랭커스터에게 의지하게 됬는가? 그 대답은 초반부에서 꼼꼼하게 제시된다. 왜냐하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너무나 많은게 달라졌기 떄문이다. 세상은 전쟁의 상흔을 잊어버리고 풍요로움에 몰두하게 됬고 정상성만이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게 된다. (이런 풍경의 어두운 면들은 [실물보다 큰]이라던가 더글라스 서크 영화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병자인 프레디는 그 풍경에 녹아들지 못한다. 그는 섹스에 집착하며, 근친상간을 범한 유아적 조울증 환자에 도무지 못 먹을 독주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코즈는 바로 그런 1950년대 미국과 정반대되는 비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집단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철학은 영원불멸의 영혼과 윤회설을 주장하는, 지극히 1960년대 히피 스타일의 주장을 펼치는 집단이다. 물론 그 히피 스타일의 주장마저 모두 박살난 시대에 사는 앤더슨 감독은 그 주장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장이 당시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매력이 있었노라고 앤더슨은 말한다. 그리고 코즈의 주장은 어느정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주기도 하는데, 과거 전생을 파악해서 자신을 바꾸는 과정은 프레디가 겪는 심리적 변화하고도 닮아 있다.


그렇다면 왜 앤더슨은 랭카스터의 입장에 끝내 동의하지 않는가? 주장의 바보스러움도 있지만 앤더슨이 보기엔 소위 마스터란 인물인 랭카스터조차 프레디처럼 인간의 한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가 프레디를 만나면서 자기 사상의 단어를 바꾸고 그걸 지적하는 신도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그렇다. 랭카스터와 프레디의 결별은 어찌보면 예정되어 있는걸지도 모른다. 아내인 페기나 다른 사람들은 랭카스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맹렬히 섬기고 프레디를 배척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있는 랭카스터는 의심과 번민을 하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프레디와 공감을 나누며 (프레디의 독주를 멀쩡하게 마시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떠나려는 프레디와 이별을 나눈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모호하고 섬뜩한 구석이 있다. 마스터를 떠나고 첫사랑으로 대표되는 과거하고도 결별하고 혼자 살아가게 된 프레디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마침내 섹스를 나누게 된다. 하지만 프레디는 섹스후 여자에게 마스터가 했던 최면행위를 여자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후 프레디는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편안한 표정으로 기대 잠에 청한다. 결국엔 마스터 없이 살게 된 프레디는 마스터의 행동을 따라하며 그 흔적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 장면을 긍정적으로 생각한걸 보면 이는 결국 해석에 맡길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앤더슨은 이런 과정을 바다 이미지를 끌어서 표현한다. 영화의 시작은 바다다. 이 바다의 이미지는 이야기로 넘어가면서도 끝없이 반복된다. 프레디는 해군 출신이며 랭카스터하고 처음 만나는 곳도 바다 위 유람선이다. 앤더슨은 심지어 어디론가 이동할때 바다에 물보라 치는걸 보여준다. 심지어 그들이 바다에 내려 땅에 오면 수난들을 겪는 걸 보면 앤더슨은 바다의 어머니 같은 포근함과 광폭한 모험성을 영화의 기본 뿌리로 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바다 뿐만이 아니라 해변의 모래사장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처음에 섹스에 집착하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주던 프레디는 마지막에서는 편안한 표정으로 기대 잠든다. 앤더슨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자에 빗대 표현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광폭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지만 [마스터]는 너무 복잡하고 모호하다. 이전까지 앤더슨 영화들은 불친절하긴 해도 어느정도 관객에게 서사적 안전장치를 해줬다. 하지만 [마스터]는 그 서사적 안전장치 없이 관객들을 모호한 파도로 밀어넣어버린다. 하지만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문제다. 심지어 로저 이버트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고 만들었으니 말이다. 인터뷰에서 보면 앤더슨마저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엄청난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스터]는 아직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자장에서 머물면서 좀 더 방만하게 만든 낌새가 강하다.


그러나 모든 영화 감독들이 전작을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퇴보한다면 그건 문제겠지만 아직 앤더슨은 [마스터]를 통해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고 다만 다음 단계에 올라서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장하지도 않으면서도 광인의 모습을 정치하게 그려낸 호아킨 피닉스와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애덤스, 로라 던의 명연과 자니 그린우드의 광폭한 사운드트랙, 65mm라는 다소 괴상하지만 인상적인 필름 포맷으로 찍혀진 완벽한 미장센을 분주히 융합하며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만드는 그의 연출이 그렇다. 그래서 좀 더 관객 친화적이고 '돈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앤더슨의 각오는 반갑다. 토머스 핀천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영화화는 이보다 더 훌륭한 영화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