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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저러스 메소드 [A Dangerous Method] (2011)

giantroot2013. 7. 25. 02:00



데인저러스 메소드 (2012)

A Dangerous Method 
7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 비고 모르텐슨, 마이클 패스벤더, 뱅상 카셀, 사라 가돈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영국, 독일, 캐나다, 스위스 | 99 분 | 20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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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전환기라면 [스파이더]를 들곤 한다. [데드 링거]나 [크래쉬], [네이키드 런치]가 비록 드라마로 방향전환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호러 크로넨버그의 기괴한 상상력 (자동차 페티시, 이란성 쌍둥이의 분열적인 자아, 비트 시인의 혼돈스러운 머릿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스파이더]의 놀랍도록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톤의 (하지만 여전히 기괴함이 남아있는) 심리 드라마는 분명 호러 크로넨버그하고는 선을 긋고 있었다. 이후 서부극-느와르-액션의 도구을 빌려 장르 틀과 미국사를 고찰한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거쳐 크로넨버그가 도달한 [데인저러스 메소드]은 놀랍게도 시대극이다.


[캐링턴]으로 유명한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크리스토퍼 햄튼의 연극을 영화화한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한마디로 정신 분석의 시초를 찾아가는 영화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려있는 사비나 슈필라인이 당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정신과 분석의인 융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다. 융은 사비나에게 대화 치유를 이용해 정신병을 치유하려고 하고 이는 곧 중산층 엘리트로 흔들림없이 살아온 융에게 큰 전환점이 되게 된다. 그 와중에 프로이트도 얽혀들어간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평이한 전기물의 형식을 띄고 있다. 물론 크로넨버그가 서사를 꼬거나 과장된 연출 스타일로 유명한 감독은 아니지만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크로넨버그 색채가 전작들에 비해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좀 더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면모로 파고들었다고 할까. 즉물적이면서도 동시에 젠체하지 않는 지성미가 돋보이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연출 감각이 이번에 노리는 부분은 인간의 정신과 사상의 변화라는 부분이다.


그 결과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위대한 사상가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외적인 '육체'의 체험을 거치면서 어떤 식으로 내적인 심리와 사상이 '변이'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물론 이런 변화는 대사에서도 충분히 감지되지만 크로넨버그는 더 나아가 유달리 툭 불거지는 이미지들을 심어놓고 의미망들을 촘촘히 엮어내는 연출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비나가 융과 섹스한 후 처녀혈을 이불에 흘리는 장면 후 등장하는 붉은 돛대를 단 요트라던가, 심리 테스트때 꺼끌꺼끌하게 자국이 남는 가죽 종이라던가. 이런 이미지들은 단아하고 덤덤한 서사에 묘한 틈을 만들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점자를 읽는듯한 오묘한 감각을 느끼는 영화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도 그런 외부의 자극과 경험이 어떻게 내적으로 체화되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려는 융과 사비나의 시도를 높게 사고 독려하지만 묘하게 장벽을 치고 권위적인 "높으신 분"의 모습을 잘 소화해낸 비고 모텐슨이라던가 직접적인 경험에서 한 사상에서 다른 사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정치하게 묘사한 마이클 파스벤더는 이견이 없으니 논쟁적이였던 사비나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보자.


척 보기에 사비나는 덤덤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나이틀리는 혼자서 튀게 거북한 오버액팅을 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서 키이라의 연기 실력이 뽀록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핀트에 어긋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애시당초 이런 연기를 하도록 크로넨버그가 일부러 시켰다, 라고 보는게 맞다. 물론 크로넨버그의 모든 행동이 무조건 옳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가 육체의 경험이 어떻게 내면의 생각과 사상을 변이시키는가라는걸 생각해보면 '정신병자'인 사비나의 광기어린 캐릭터가 융이나 프로이트처럼 똑같이 덤덤한 톤으로 다뤄졌다면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였을것이다.


게다가 나이틀리의 연기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긴 하지만 19세기말의 낭만주의 (라보엠이라던지)처럼 어떻게 극적인 로맨티시즘으로 포장할 용의는 없다고 본다. 그 아름다움은 차라리 분라쿠 인형극이라던가 러브크래프트나 호러 영화의 괴물들처럼 우리가 이해할수 없지만 숨도 쉴 수 없는 기괴한 압도감에 가깝다. 그리고 치유후 보여주는 어딘가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한 모습도 그렇다. 나이틀리는 그 점에서 제대로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세세한 연결망들을 느끼지 않아도 연구서를 모태로 크리스토퍼 햄튼이 써내린 훌륭한 캐릭터들의 우아하고 지적인 대사들을 명백히 영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에도 지극히 크로넨버그의 터치가 묻어나오고 있다. 자기는 처녀여서 성에 대해 무지하니 선생과 섹스를 해야 되겠다는 '육체적 욕망을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비나를 보면서 [데드 링거]의 베벌리 형제를 떠올리지 않는건 불가능하며 인간의 심리와 내면이라는 '안'의 영역에 발을 딛어보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융, 프로이트, 사비나는 분명 크로넨버그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의 노선은 분명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폭력이나 섹스, 호러로 과격하게 그 감각과 사유들을 드러내던 초기 크로넨버그와 달리 2000년대 크로넨버그 영화들은 여전히 평이한 어투를 쓰고 있지만 더욱더 의미망을 파악하는게 어려워졌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도 그 섬세하게 깔아놓은 촉들을 알아보지 못하면 잘못하면 그저그런 역사극으로 인식될 위험성이 있다. 물론 그렇게 봐도 말이 되긴 하지만 온전하게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크로넨버그 미학의 심화는 [코스모폴리스]는 그 극단에 다다르게 되고 호불호로 나뉘게 된다. 하지만 의미망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쾌감은 예전 영화들보다 강해졌다. 그 점에서 아직 공력을 잃지 않은게 눈에 보인다.

여튼 크로넨버그가 융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사상의 변이을 관찰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놀랍게도, 계몽이다. 영화 초반부부터 프로이트에 대해 마뜩찮음을 표현하던 융은 오토 그로스를 만나고 사비나와 관계를 이어가며 자신의 체질을 변화해가는 과정에 왜 그렇게 느꼈는지 답을 찾게 된다. 프로이트가 안전에 치중한 나머지 변화를 원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것에 만족하며, 모든 것을 성에 연결하고 있는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인종적, 지역계급적 텍스트도 있다. 융은 스위스 촌뜨기 비유대인이고 프로이트는 비엔나의 시크한 유대인이다.) 결국 미국 여행 끝에 (이 부분이 쏙 빠져 있어서 아쉬웠다. 너무 늘어져서 뺀 것일까?)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한다. 결국 융은 탐사보다는 계몽을 선택한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비나는 두 거인 간의 통섭을 시도한다. 사비나가 프로이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는 프로이트와 융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만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적인 여인의 풍모가 드러난다. 융과 사비나의 결별은 어쩌면 이 장면에서 예견된걸지도 모른다. 영화 마지막에 사비나를 떠나고서도 여전히 불륜을 저지르며 정신쇠약에 걸린 '변모한' 융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비나에게 하는 대사는 그가 사비나랑 사귀면서 육체적인 경험이 정신과 사상으로 전이되고 변모한 과정과 결과를 모두 감내하고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계몽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선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무척이나 덤덤하지만 묘하게 가슴을 구석이 있다.


[코스모폴리스]를 보고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보고 생각한건데, 두 영화는 새로운 크로넨버그의 양면을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코스모폴리스]가 급진적으로 '안'과 '밖'의 단순화하고 피로할 정도로 대화 중심의 극 구성으로 자본주의의 기괴한 풍경을 드러냈다면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반대로 은밀하게 안과 밖에 새겨둔 감촉들을 관객들이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는 영화다. 새로운 크로넨버그의 시작을 알리는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보니 이제 [맵스 투 더 스타즈]는 어떤 방식을 택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