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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Vous n'avez encore rien vu /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2012)

giantroot2013. 1. 24. 00:20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012)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8.8
감독
알랭 레네
출연
사빈느 아제마, 마티유 아말릭, 안느 콩시니, 랑베르 윌슨, 삐에르 아르디티
정보
드라마 | 프랑스 | 115 분 | 2012-11-22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때 유령을 찍는 요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영화가 그런 오해를 사게 만든 이유는 다른 흐름을 가지고 흘러가는 시공간을 현실의 시공간에 불러들인 첫번째 매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가 누려왔던 매체(활자나 그림)엔 그런 유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시공간을 기록하는 매체'는 '마법'이나 '사후세계'처럼 이성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영화는 이성 너머에 있던 가능성을 실현해버렸고 당대 사람들은 문화 충격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영화와 관련된 여러 소동들은 그 현기증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노스페라투]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같은 무성 공포 영화엔 아직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현기증이 가시지 않았던 당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어떤가? 영화가 처음으로 문을 열어젖힌 다층적인 시공간은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인터넷, 멀티 태스킹, 스마트 폰, PIP... 다른 시간과 공간을 통채로 이 곳으로 가져다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에 우리가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상화된 나머지 외려 '다른 시공간이 이 곳에 불려오면서 갖는 마술적인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어떨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은 그 마술적인 매력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영화적 굿판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는 전작에 비해 그리 복잡하진 않다. 장 이누이가 쓴 희곡 [에우리디스]에 출연한 배우들이 연출가의 죽음을 계기로 모여들고 새로 만들어지는 [에우리디스] 테이프를 보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장 이누이의 연극 두 편에 느슨하게 기대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다.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나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머리를 끙끙 싸매게 했던 난해한 대사들과 느릿한 템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와 [히로시마 내 사랑]처럼 여전히 구조가 중심인 영화다. 다만 그 구조의 중심이 바뀌었다고 할까. 저 두 영화엔 기억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구조 중심엔 재현이 있다.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 테이프를 보는 베테랑 배우들은 자신들의 [에우리디스]를 재현하고 재현을 할수록 그들이 있는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고 변형된다. 저택 문을 열고 나가니 역과 숲이 보이고 인물이 손을 내미니 갑자기 물과 옷이 휙하고 등장하고 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레네판 [아바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CG가 상당히 많이 동원된 영화다. 농담이 아니다. 


그 확장과 변형은 단순히 공간에만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 되면 베테랑 배우들의 재현을 젊은 배우들의 영상이 받아친다! 분명히 시차가 있는 영상이 분명한데도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장면은 경이롭기 그지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레네는 녹화 영상은 다른 감독에게 전권 이양하고 '내가 찍는 영상과 완벽하게 달라져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처럼 스크린과 현실 사이 경계가 무너지는 희귀한 풍경을 연출해낸다.


후반부 [에우리디스]가 끝나고 나오는 전개는 조금 당혹스럽다. 냉큼 망자가 살아돌아오는 희극적인 전환을 제시한 뒤 그것을 다시 뒤집는 비극적인 전환이 또 이어진다. 레네는 그 뒤 새로운 에우리디스 역의 배우와 베테랑 배우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걸 보여주고 새로운 연극이 막을 올리는 걸로 영화를 끝내버린다. 


서사적으로 보면 뜬금없는 전개다. 하지만 아까 '굿판'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실제로 망자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재현의 굿판이 유령을 여기로 불러들였다고 하면 어떨까?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들이 일단 다리를 건너자, 그때 유령들이 다가왔다" (이 대사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자막 인용이다.)라는 자막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현실의 시공간을 떠나서 다른 공간으로 진입하겠다는 선언인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시공간을 떠난 베테랑 배우들은 망자를 추억하고 잠시나마 이 시공간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현실의 시공간을 떠나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며 연기=굿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유령을 다시 '다리 너머로 불러들이는' 굿은 성공했다. 죽었던 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작중 [에우리디스]가 그랬듯이 그 부활은 실패로 돌아간다. (혹은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가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다시 진짜 죽음을 맞이 한다. 그리고 과거의 배우들은 스크린 밖으로 퇴장하고 새로운 연극=삶이 오른다. 그렇게 보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마술은 단순히 시공간을 허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그 경계를 뛰어넘어 불멸을 보장받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술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어떻게 이 전개를 받아들이든 자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마술이 생각 외로 재미있다는건 밝혀야 되겠다. 해석 같은 건 잠시 젖혀두고 약간 으스스하지만 로맨틱한 이 마술에 푹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끝에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ous n'avez encore rien vu는 걸.


P.S. 아까 [아바타] 비유를 들었는데, 카메론 감독은 극도의 하이퍼리얼리즘을 통해 여기와 다른 시공간을 불러냈다면 레네 감독은 이미 있던 것의 다층적인 재현을 통해 여기와 다른 시공간을 불러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