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 [薮の中の黒猫 / Kuroneko] (1968)

giantroot2013. 1. 3. 19:35



신도 가네토의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설의 고향 풍 동양 공포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초장부터 '안전함'을 기대한 관객들을 한방에 KO시킨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극을 끌고 갔던 [벌거벗은 섬]를 만든 신도 가네토 감독답게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별다른 설명없이 평범한 일본 전국시대 서민 여성에게 들이닥친 잔혹한 비극을 침묵의 미학으로 풀어내 관객의 숨통을 잡아챈다. 이 장면에서 신도 감독은 약한 개인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전쟁의 참혹함, 나아가 당시 일본 봉건 사회의 폭력적인 징후를 짚어낸다.


여자 귀신을 중심으로 삼은 동양 공포 영화들이 그렇듯이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의 요네와 시게는 폭압적인 동아시아 가부장 사회의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들이 한이 절절히 담겨 있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들이 복수를 하는 과정을 유려한 리듬으로 보여주는데 할애한다. 이 와중에 신도 가네토는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영화의 '현실성'에 대한 규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파격적인 연출과 미장센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촬물이나 쿵후물을 연상시키게 하는 기기묘묘한 귀신들의 안무와 강렬한 흑백 대비, 트래킹 기법, 이중인화 기법, 연기와 극단적인 조명이 만드는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표현주의적 특성, 대사를 줄이고 움직임에 방점을 둔 배우의 연기... 그 결과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기묘묘한 분위기를 띄게 된다.


조금씩 두 고부 귀신 캐릭터와 사연이 잡힐 무렵 영화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농부 출신으로 방금 사무라이가 된 주인공 야부 긴토키다. 첫 등장에서 보듯이 그는 사무라이 사회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하고 어리숙한 인물이지만 오로지 성공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악바리에 받쳐 덤벼드는 모습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곧 그 공을 인정받아 자신이 염원하던 사무라이 사회에 들어서게 되지만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럴만도 한게 영화에서 묘사되는 무사 사회는 정말 재수밥탱이이기 때문이다. 가네토 감독은 본줄기를 해치지도 않고도 라이코우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무사들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통해 사무라이의 환상을 풍자하고 해체해버린다.


결국 긴토키는 라이코우의 명령을 받아 귀신 척결에 나서게 되는데 문제는 요네와 시게가 사실은 긴토키의 아내와 어머니라는 점이다. 관객은 물론이고 요네와 시게도 그걸 알지만 문제는 긴토키는 모른다. 그 결과 기묘한 에로티시즘과 아이러니를 동반한 서스펜스가 발생하게 된다. 긴토키는 자신의 아내를 닮았다고 (실은 아내 그 자체인)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걸 그저 바라보는 어머니 요네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귀신의 계율에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영화는 이를 통해 극에 풍성한 긴장감과 감정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게와 긴토키의 섹스 장면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둘의 섹스에는 망자와 산 자의 경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오싹한 기시감과 위태위태함,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에로티시즘이 담겨있다. 정제되지 않은 에로티시즘이라는 점에서 이마무라 쇼헤이하고도 비슷하지만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훨씬 더 애틋하고 산뜻한 편이다. 아마 이런 태도의 차이는 신도 가네토 개인이 겪었던 첫번째 아내의 죽음이라는 아픔하고도 연관이 있을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종종 긴토키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물론 이런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랑의 결말은 파국이다. 시게는 규율을 어긴 죄로 세상에서 말소되고 긴토키는 죄책감으로 점점 망가져가다가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이 파국을 어떤 포스트모던한 해체나 주석 없이 정공법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다소 담백하게 다가올수도 있었던 결말을 씁쓸한 시정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무시못할 공력을 지니고 있다.


다소 구조가 헐겁지 않나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동양적인 예술 공포 영화라는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한 영화다. 훌륭한 공포 영화가 그렇듯이 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가지고 있다. 일본 고전 공포 영화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