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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Naked] (1994)

giantroot2012. 10. 30. 13:20




네이키드 (1994)

Naked 
10
감독
마이크 리
출연
데이빗 튤리스, 레슬리 샤프, 카트린 카틀리지, 그렉 크러트웰, 클레어 스키너
정보
드라마, 코미디 | 영국 | 112 분 | 1994-05-21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는 영화 시작부터 별다른 정보 없이 주인공의 성적인 행동과 뒤이은 도피 장면을 던져주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그리고 리는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도피하다시피 온 주인공을 옛 애인 루이즈와 동거인 소피를 만나게 하면서 그의 이름('자니')과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천천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니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루이즈에게는 정작 냉담하게 대하고 소피를 꼬드겨 섹스를 나눈다. 그 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집 밖을 나서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와중에 루이즈와 소피는 거만하고 이기적인 집주인인 제레미 (혹은 세바스찬)의 난입과 기행에 시달리고 자니는 왕창 다친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네이키드]의 플롯엔 사건은 있지만 그 사건들이 의미있는 굴곡을 만들지는 않는다. 마이크 리는 자니가 겪는 사건들이나 소피의 난처함, 제레미의 기행, 루이즈의 허무함, 산드라의 히스테리를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다룬다. 그 결과 영화의 구조는 기이하기 그지 없다. 제레미는 초반에 묘사되고는 내내 등장도 하지도 않다가 후반에 거의 초현실적인 등장과 행동으로 강렬한 존재를 과시하다가 폭풍퇴장하며 반대로 영화 내내 등장하는 자니는 인물들을 붙잡고 극적 전개와 관계없는 장광설을 풀고 있다. 거기에 루이스와 소피의 짜증섞인 일상에 대한 푸념과 막판에 집에 왔더니 헬게이트 강림으로 폭발 일보 직전인 산드라의 히스테리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묘하게 불균질적이다고 할까.


이런 모든 사건들이 평등한 선상에서 펼쳐지는 스타일은 오즈 야스지로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에릭 로메르를 연상케하지만 리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그들과 다르다. 오즈나 안토니오니, 로메르는 이렇게 냉소적인 유머로 가득찬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 [네이키드]의 조금 지루할수 있는 구조를 채워주고 다른 모더니즘 영화들과 차별시켜주는 요소는 바로 (지극히 영국적인) 냉소적이고 초현실적인 유머들이다. 모든 사건들은 한 톤 이상 과장되어 있으며 유려하지만 살짝 비현실적이고 사변적인 대사들은 그런 과장된 톤의 사건들을 지탱하고 있다.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이빗 튤리스를 위시한 배우들의 연기들이나 런던 밤풍경의 음예함을 살려낸 미장센과 촬영도 훌륭하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현실적이기 보다는 뭔가 붕 뜬 톤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화는 런던을 배경으로 한 또다른 초현실적인 오디세이아인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딥 엔드]를 연상시키게 한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당연 데이빗 튤리스가 훌륭하게 소화해낸 자니다. 영화는 자니의 모험을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즈])를 인용해 고독한 여행처럼 묘사한다. 괴물들은 과장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대체되고,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오디세우스는 거칠고 제멋대로고 방금 사귄 애인에게서 떠나다가 페넬로페=루이즈에게 돌아오는 맨체스터 부랑자 슬랙커로 대체된다. 그 속에서 자니는 1990년대 슬랙커 스타일로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철학에 대해 쉴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제대로 된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 자니의 장광설은 소통을 하기 위한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자기에 함몰되어 있고 주변인들(소피와 루이스 정도 제외하면)도 단순한 관객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니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종종 1인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니의 장광설은 단순한 말이 아닌 캐릭터의 쓸쓸함을 드러내는 장치인것이다. 클라이맥스의 자니의 토로는 그런 장광설 뒤에 있는 연약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 이어지는 루이즈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것도 그런 자니의 토로에 심정적인 공감과 연계되어 있다.


자니의 반대편에 있는 건 역시 제레미다. 제레미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자니와 대조되는데, 그는 비싼 레스토랑을 다니며 자동차와 집을 소유하고 있는 여피이며 장광설 같은건 하지도 않고 간결한 말투로 일관한다. 하지만 그 역시 자니와 다른 의미로 우스꽝스럽다. 섹스에 집착하며 소피를 성적 노예로 삼는 장면이라던가-이 장면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도 한데, 소피와 자니때와 달리 경제적 계급에 기반한 사도 마조히즘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내 소유의 맨션인데 내가 벌고벗고 다니는게 뭐가 이상함??' 식의 태도는 그 역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막판 클라이맥스에 울고 있는 자니, 소피, 루이즈를 한심하다듯이 바라보며 섹스하고 싶은 사람은 내 곁으로 와라라고 말한다. 제레미의 이런 점들은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알고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자니와 대조되며 풍자적인 면모를 만들게된다. 영화는 이를 통해 도시인들의 소통 없음이 만들어내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벌거벗겨(naked) 부조리극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굴곡이 없이 완만하게 흘러가는 영화답게 결말 역시 상당히 독특하다. [네이키드]의 끝은 소피와 루이즈가 집을 떠난 후 남아있던 자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결국엔 거기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맨체스터의 오디세우스는 같이 떠나자고 약속한 페넬로페를 버리고 다른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절뚝절뚝하면서도 계속 집에서 멀어져 나아가는 자니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아무튼 이 묘한 결말엔 무언가 정리되었다, 라는 느낌은 있지만 정말로 거기서 '끝난다'는 느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네이키드]는 영화 뿐만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삶이 엔딩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란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네이키드]는 병렬적으로 놓여진 사건들을 둘러싼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와 '캐릭터들'로 현대인들의 공허한 심리를 포착하는 영화다. 그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이 평범한 영화들과 여러모로 이질적인지라 찬반이 있을듯 하지만 마이크 리가 독자적이고도 강렬한 스타일을 만들어내 현대인들의 절실한 심정을 푹푹 찌르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듯 하다.


P.S.1 런던을 살아가는 젊은 남녀들이 주인공(과 분명한 끝이 없다는)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리가 후에 만든 [해피 고 럭키]하고 대조되는 영화이기도 한데, 밝고 행복하지만 사려깊은 [해피 고 럭키] 쪽이 취향이긴 하지만 [네이키드]의 쓸쓸괴팍한 도시의 시정도 매력적이고 강렬해서 좋았다.

P.S.2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망사 스타킹 포스터와 제목은 뭣모르던 어린 시절의 리비도를 자극하던 포스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