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phone Music/리뷰

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rial] (1994)

giantroot2011. 2. 2. 22:14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중반은 절망적인 감수성이 사랑받았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너바나나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스매싱 펌킨스 등 그런지 카테고리는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그 흐름에서 느지막히 떨어져 있었던 페이브먼트에게도 자조적인 정서가 뿌리 박혀 있는 걸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감수성이 사랑받은 건 1960년대 말 더 후, 롤링 스톤즈, MC5, 더 도어즈 같은 헤비하고 반사회적인 음악이 사랑 받은 것과 비슷한 선상일지도 모릅니다. 저 두 시절엔 세상에 대한 안티 테제적인 생각이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1960년대에 추앙받았던 윌리엄 버로우즈와 잭 케루악이 1990년대에 다시 재발굴-특히 버로우즈-됬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다만 1960년대 말과 달리 1990년대 초반의 절망은 뭔가 비관적인 인식이 강했습니다. '세상 엿먹어라. 나는 내 쪼대로 살거다.'보다 '나는 세상에서 밀려났고, 엿 먹었다' 쪽이라고 할까요.

1990년대의 절망이 1960년대의 절망과 차별되는 중요 요소라면 전자음이 드디어 로큰롤의 영역으로 들어와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일겁니다. 물론 1980년대부터 뉴 오더, 펫 샵 보이즈, 디페치 모드가 활발히 전자음과 록/팝의 중매를 섰다는 걸 빼놓으면 안 될 겁니다. 이 중 디페치 모드는 캔과 크라프트베르크에서 발아해 카바레 볼테르, 아인슈튀르젠데 노이바우텐, 스로빙 그리슬으로 터진 초기 인더스트리얼을 훌륭하게 주류 신스 팝 영토에 이식해내는 시도를 선보이고 (<People Are People>) 한층 더 나아가 록의 비트로 진화하는 모습 ([Violator],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을 보였습니다. 나인 인치 네일즈는 그런 디페치 모드의 성과를 과격한 방식으로 승계한 뮤지션일겁니다.

물론 트렌트 레즈너라 불리는 이 사나이는 디페치 모드 뿐만 아니라, 상술한 초기 인더스트리얼 밴드과 IBM의 원시적이면서도 인간미가 제거된 리듬 (타악기의 운용과 질감, 그리고 리듬과 비트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흥미로운 시도들을 찾아볼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수어사이드의 가차없는 노이즈 피드백 미니멀리즘, 조이 디비전 같은 음울한 포스트 펑크, 헤비 메탈의 비명과 육중한 리프, 불쾌한 상징들(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쇼처럼 보이는 마릴린 맨슨과 달리 나인 인치 네일즈는 그걸 철저히 통제하고 있어서 더 효과적입니다.) 을 핑크 플로이드의 대곡 지향과 분노와 절망에 섞어넣고 있습니다. 배음이 맞지 않는 음계들도 과감히 도입하는 레즈너의 작곡도 빼놓을 수 없겠죠. 올뮤직에서는 이 앨범을 두고 필 스펙터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데, 소리의 확장이라는 면모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굉장히 독한 앨범입니다. 그 독함이 가장 제대로 먹히는 순간은 핑크 플로이드와 비틀즈의 인용이 의심되는 'Piggy' 같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조일락말락하는 제어된 광기가 'Heresy'에서 피치가 올라가다가 'March of the Piggies'와 'Closer'로 연타로 날리는 순간일겁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지는 곡들도 그 독함을 훌륭하게 계속 가열시키고 있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Hurt'는 파괴된 정신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낸 발라드일겁니다. 추잡한 언어들을 동원해 비하하고 공격하다가 어느 순간 일그러진 진심을 표출하는 레즈너의 가사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 앨범으로 나인 인치 네일즈는 곧 수많은 따까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 앨범의 경지에 이른 건 얼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이제 17년차에 들어섰지만, 이 앨범이 내뿜는 기계적인 파열음에서 느껴지는 절망과 분노, 사악함은 독보적입니다. 명반이라는 단서를 달아도 충분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