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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악마들
단언컨데 미카엘 하네케는 유럽 영화계의 사디스트이다.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그는 관객을 괴롭히는데 맛들여왔다. 비디오와 인질극, 사이코 살인마, 리모컨을 가지고 관객을 농락하거나, 한 여인의 변태성욕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유럽 문명을 모조리 멸망시키고 주인공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짓을 태연히 저지른 사람이다. 이게 사디스트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현실의 냉혹함과 역사의 어두운 면, 도덕의 타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다. 그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빛을 본 라스 폰 트리에하고는 일정한 선을 긋는다. (하네케는 그에 대해 극찬을 했지만.) 선악이 불분명한, 불경한 신성모독에 가까운 트리에의 사디즘과 달리, 하네케의 사디즘은 철저히 도덕주의자의 그것에 가깝다. 그는 불의와 부정, 거짓, 위선에 비수를 꽃는다.
솔직히 [퍼니 게임]은 지나치게 쇼크효과의 의존한 영화였다. 의도는 알겠는데, 쇼크 효과가 너무 강렬했다는게 문제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감독은 점점 위대한 영화 감독들처럼 쇼크 효과 이상의 본질을 꿰뚫기 시작했다. [히든]은 쇼크 효과 외에도 미디어와 지식인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하얀 리본]은 하네케의 사디즘이 마침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1913년 독일 북부 지방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평범한 시골 마을인 어느 마을에 이상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아이가 구타당하고, 의사는 넘어지고, 창고는 불에 탄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사건들은 의심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공포를 만들어낸다. 중심 인물인 학교 선생은 비밀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그리고 거기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는 집단을 중요한 화두로 제시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집단은 지독할 정도로 타락과 몰이해, 그리고 광기로 가득차 있다. 그 집단 속의 집단인 가족 역시 마찬가지로, 타락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 중 영화가 중심으로 삼는 가족인 목사 가족을 보자. 하얀 리본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청교도적 질서를 가족과 지역 사회에 강요하며, 군림하는 아버지와 그를 거의 신처럼 모시는 (영화 속 목사 아이들의 FATHER 발음은 지독히도 기독교의 그 분을 떠오르게 한다.) 나머지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순결의 하얀 리본을 강요하지만, 자식들은 복종하는 척 하며 가위를 이용해 십자가 형식으로 아끼던 새를 죽여버린다. 영화는 이처럼 폭력적인 가부장, 그리고 거기에 암묵적인 연대 의식을 가지고 반항하는 아이들을 통해, 당시 시대의 변화를 짚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아이들은 보통 비슷한 대결 구도를 다룬 영화들처럼 정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소름끼치는 폭력을 행사한다. (정박아의 눈을 도려낸 장면은 정말 끔찍하기 그지 없다.) 영화는 사실 그들의 연대 의식과 반항이 가부장 권력의 모방과 학습이라는 걸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들은 약한 생물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어른들처럼 사회적인 관습으로 치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마지막, 가부장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결국 묵인해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와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가족의 사회적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무리 짓는다. 이 장면엔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한방에 압축되어 있다. 이 주제를 이해하고 싶다면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나레이션이 모두 한 가지 목표를 고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렇다. [하얀 리본]은 파시즘의 역사적/사회적 근원을 찾는 동시에, 도래를 알리는 영화이다.
하네케는 미디어라는 소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비디오 이미지 조작과 역사 조작을 등가시키는 [히든]이나, 폭력적인 영상물의 재현과 그것을 원하는 관객들의 욕망을 농락했던 [퍼니 게임], [베니의 비디오], 포르노 잡지와 영화, 자동차 영화관이 중요한 소재로 제시되는 [피아니스트] 등이 그렇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하얀 리본]은 미디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전히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미디어는 바로 목사의 설교다. 이 영화의 설교는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여 대량의 정보 및 시사내용, 당대의 이슈 등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매체'라는 틀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목사의 말에 귀기울이고, 그 말을 따르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불신을 부추긴다. 이쯤되면 하네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자명하다.
이 영화는 흑백 영화다. 흑백의 선택은 적절했는데, 솔직히 이 영화의 엄격함을 컬러로 했더라면 많이 죽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한 컷 한 컷 구도들은 숨막히게 꽉 짜여져 있으며, 그 프레임 속에서 영화의 폭력과 타락은 진액처럼 끈적하게 배어나온다. 그 결과 관객들은 단아하게 짜여진 한 컷 한 컷에 담긴 독일의 시골 마을 속에 꽉 갇혀서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와 더러운 모욕, 광기를 맛보게 된다. 의사가 불륜 상대인 부인을 말로 모욕하는 장면은 그 절정이다. 더 불쾌한 것은 이 컷들과 테이크, 나아가 시퀀스들이 때때로 이해할수 없는 엄격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는 점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은 게르만적 엄격함으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광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공포 영화다. 이 엄격함과 파괴력은 베리만이 보여줬던 종교적 엄숙함과 맞먹는다. 이제 하네케는 이미지 조작 혹은 광폭한 이미지 이외에도, 응축된 이미지 그 자체로도 폭력을 표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의 영화를 추종했던 사람이라면 무조건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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