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화 2

당나귀 EO [EO] (2022)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EO〉는 번쩍거리는 붉은 조명 아래에 있는 두 피사체에서 시작한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 카산드라이며 엎어져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서커스 당나귀 EO다. 카산드라는 당나귀에서 인공호흡을 하듯 숨을 불어넣는 행동을 하고, 그 순간 EO는 되살아나는 척 연기한다. 붉은 조명이 꺼지고 관중들이 환호한다. 다시 붉은 조명으로 점멸하고, 저속 촬영된 샷에서 카산드라는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춘다. 그다음 샷에서 EO는 가만히 있지만, 카메라는 EO 주변을 회전하고 마침내 EO의 얼굴이 좌우로 반복해 흔들리는 장면을 포착한다. 이 오프닝에서 스콜리모프스키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당나귀라는 동물을 영화적 주체로 삼을 수 있을까? 그저 감독인 자신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영화적 주..

은빛 지구 [Na srebrnym globie / On the Silver Globe] (1988)

한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제작 당시 상황은 영화 속 샷과 시퀀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긴 하다. 현장에서 누가 싸웠다던가, 이 장면은 어떤 과정으로 찍었고 어떤 난항을 겪었는지 같은 정보는 샷과 시퀀스의 의중을 파악할 단서와 더불어 논리의 근거를 더해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제작 당시 상황은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실을 허구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 영화는 메타픽션의 미로가 되버린다. 그럼에도 제작 당시 상황을 영화로 끌고 왔다면 그래야만 했던 사정과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오손 웰즈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웰즈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무자비한 편집 가위와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서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