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은빛 지구 [Na srebrnym globie / On the Silver Globe] (1988)

giantroot2018. 2. 22. 01:41

한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제작 당시 상황은 영화 속 샷과 시퀀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긴 하다. 현장에서 누가 싸웠다던가, 이 장면은 어떤 과정으로 찍었고 어떤 난항을 겪었는지 같은 정보는 샷과 시퀀스의 의중을 파악할 단서와 더불어 논리의 근거를 더해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제작 당시 상황은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실을 허구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 영화는 메타픽션의 미로가 되버린다. 그럼에도 제작 당시 상황을 영화로 끌고 왔다면 그래야만 했던 사정과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오손 웰즈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웰즈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무자비한 편집 가위와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서 투쟁해야 했던 웰즈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안제이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도 이 부류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줄랍스키는 말한다.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고, 지금에서야 이런 형태로 내놓을 수 밖에 없다고. 이 변명이 펼쳐지는 쇼트들은 1988년의 폴란드다. 사실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에 찍었다. 프랑스에서 만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로 폴란드 영화계에서 다시 기회를 잡은 줄랍스키는 할아버지 예지 줄랍스키의 SF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 독재 정권 치하에서 [은빛 지구]는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다른 폴란드 영화인 리샤르드 부가이스키의 [신문] 역시 80년대 초에 촬영했다가 90년대 들어서야 공개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은 중단되었고, 줄랍스키는 폴란드를 떠나 근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인서트 샷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외계인 안제 줄랍스키의 한탄이다. 줄랍스키는 말한다: 1/5이 날아간 영화를 완성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은빛 지구]는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행성 개척 대서사시라고 부를만한 SF 영화다. 일련의 우주인들이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내린다. 하지만 고된 여정 끝에 우주인 일부가 사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사는 해변가에 정착한다. 그들의 2세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지만 지구의 문명을 전혀 알지 못하고 토착민들과 함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원초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남은 우주인들은 전부 죽고, 그들의 신호를 받아 우주인 마렉이 착륙한다. 정착민들은 그를 신화에 등장하는 구원자로 떠받든다. 마렉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운명은 마렉을 구원자의 길로 이끈다.

하지만 [은빛 지구]를 보고 난 뒤 서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사는 절반 이상이 미친 전도사의 방언이나 다름없고, 인과 관계는 숭숭 빠져있다. [은빛 지구]의 서사는 강렬한 상징과 인물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끌려가지만, 정작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설명해줄것 같은 부분들은 날아가버렸다. 사실 대사나 장면 설계들을 보면, 이 영화에서 어떤 정합성을 기대하면 안된다는걸 알게 될것이다. [은빛 지구]는 표면상 SF를 표방하고 있지만, 장르를 다루는 태도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처럼 상징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지구가 배경이었다면 불가능한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구 한 구석에서 촬영한) 비주얼과 설정 뿐이다. 애시당초 걸작이 될 수 없었던 무모한 영화였지만, 검열로 더욱 기괴해져버렸다.

의외로 주제를 파악하는건 어렵진 않다. [은빛 지구]는 노골적인 예수 이야기다. 줄랍스키는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마렉을 향한 구원자 운운이라던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십자가 상징에서 예수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일종의 제의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제의를 다루는 줄랍스키의 태도는 반종교적이다. [은빛 지구]의 세계는 주류 종교가 내세우는 성인의 헌신과 신성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류 종교가 들추고 싶지 않았던 샤머니즘과 원시적인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꼬챙이에 사람을 앉혀놓는 장면, 기괴한 원시 부족, 방언을 내뱉는 무녀의 존재, 악마를 상징하는 기괴한 생물... 요컨데 줄랍스키는 종교적 믿음이나 논리 자체를 매우 폭력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다.

원작이 되는 예르지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예스러운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걸 고려해보면, 영화 [은빛 지구]의 그로테스크함은 안제이 줄랍스키만의 폭력적인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괴물이라 할 수 있겠다. 군무와도 같은 부족의 춤, 대체 어떻게 발견하고 만든건지 궁금한 풍광과 의상 및 세트 디자인, 오버액팅을 불사하는 인물들의 열정적인 연기는 [은빛 지구]의 그로스테크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초 만들었던 [퍼제션]의 간음하는 촉수괴물에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줄랍스키는 순수한 사랑을 꺼낸다. 하지만 줄랍스키의 사랑은 순수하되 무지와 두려움에 맞서듯이 미쳐있다. 이처럼 줄랍스키는 세상이 극단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그 극단에서 인물은 중간을 택할 수 없다. 사악해지거나 순수함에 미쳐버리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은빛 지구]는 줄랍스키의 극단과 광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줄랍스키는 폴란드 독재 정권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망명 폴란드 감독들의 영화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이 대표적일 것이다.)이 그렇듯이, [은빛 지구]에도 폴란드 지식인의 분노와 체념의 정서가 녹아 있다. 먼저 영화에서 지구를 떠난 것은 지도자나 노동자도 아닌 지식인이다. 이 우주인들에게서는 어떤 탈출이나 도피 욕망이 느껴진다. 이 우주인들은 사랑을 이룰수 없는 지구를 떠나 지구와 동떨어진 행성에서 사랑을 찾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주인의 후손들은 지구를 잊어버린채 광기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그들의 기원을 알고 있는 또다른 지식인 마렉이다. 마렉은 그들을 이끌고 바다 너머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한다. 줄랍스키는 실패로 점철된 신화에서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뤄질수 밖에 없는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물음에 줄랍스키는 답하지 못한다. 줄랍스키가 결말로 생각한 마렉의 동료가 죽는 장면은 오로지 나레이션 음성으로만 진술될 뿐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았어야 할 영상의 부재는, [은빛 지구]에 아로새겨진 폴란드 역사의 비극을 상기케 한다.

이제 메타 영화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일단 [은빛 지구]는 카메라의 시선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종종 카메라를 전달하거나 소유권에 대해 얘기한다. 초중반부 줄랍스키는 카메라를 든 캐릭터의 성격을 카메라의 움직임에다 반영하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문명의 관찰자에서 원시 부족의 본능으로 변모해간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이전의 영화임에도, 무모할 정도로 막나가는 카메라 스턴트에 캐릭터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경탄스럽다.

여기다 줄랍스키는 자의식 똘똘 뭉치는 점프 컷을 활용하거나 의미없는 쇼트를 끼어넣는 것으로 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런 관점들은 영화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충돌하면서도 묘한 영역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중반부 마렉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관점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오직 줄랍스키의 자의식만 남아있다는 점은 아쉽다. [은빛 지구]의 카메라 움직임은 대담하고 고심을 담긴 했지만 온전한 결과물가 되기엔 부족하다.

그 다음엔 영화 외적인 상황과 잘려나간 서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폴란드 변사 나레이션의 전통을 빌려 전개된다.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권에서는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남자 해설자가 모든 대사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줄랍스키가 맡은 나레이션은 그런 점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일단 이 나레이션은 조국을 떠나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해야 했던 줄랍스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동안 타자로써 살아야했던 그는 고국 영화의 전통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폴란드인이라는걸 적극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레이션 전통이 외국 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폴란드에서 버림받은 [은빛 지구]의 운명과 묘하게 연계되는 구석이 있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스틸 사진을 넣어서 만들수 있었음에도 줄랍스키는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영상을 기어이 쓴다. 이 선택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처연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안제이 줄랍스키는 [은빛 지구]가 끝내 '폴란드 영화가 될 수 없었던 영화'라 생각하고 있다. 결국엔 날아간 필름 1/5는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찍더라도 기존 분량과 어색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줄랍스키는 그 깨달음을 1988년 폴란드라는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드러낸다. 마치 제3자마냥 사라진 영화의 서사를 얘기하는 줄랍스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린다면, 이 영화가 맞이해야 할 운명을 예감해서 아니였을까 싶다. 줄랍스키는 영화를 마무리짓고 쇼윈도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고 선언한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처럼. 물론 새로운 삶은 순탄치 않았고, 줄랍스키는 2015년 타계했다.

[은빛 지구]가 정상적인 제작 과정을 거쳐 공개되었더라도, 걸작이 되진 않았을것이다. 남아있는 필름엔 줄랍스키 개인의 자의식과 감정이 통제없이 넘쳐나고, 거대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빠지는 단순화의 함정들도 보인다. 마지막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는 다짐도 왠지 느끼하게 들리다면, 객관적 성찰과 자아도취의 경계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은빛 지구] 역시 다른 줄랍스키 영화들이 그랬듯이  천생 컬트 영화로 낙인찍혔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빛 지구]는 제1세계 컬트 영화들과 달리, 그런걸 허용할 수 없는 국가에서 태어났고 창작자는 처참하게 남겨진 필름을 수습해야 했다. 완성도와 무관하게 [은빛 지구]가 이상하게 슬프게 다가온다면, 어쩔수 없이 폴란드사의 부조리와 싸웠지만 끝내 패배한 개인이 보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패배는 폴란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