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L'Annee Derniere A Marienbad / Last Year At Marienbad] (1961)

giantroot2009. 8. 19. 13:17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감독 알랭 레네 (1961 / 프랑스, 이탈리아)
출연 델피네 세이릭, 사스차 피토프, 조르지오 알베르타찌, 프랑수아즈 베르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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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의 그대

알랭 레네의 영화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의 각본가는 알랭 로브그리예다. 그는 누보 로망 계열 작가로도 유명한데, 예전에 한국에 번역된 [질투]라는 소설을 읽다가 학을 뗀 적이 있었다. 아마도 편집증적이다 싶을 정도로 세세한 배경 묘사와 자신조차 물화시켜버리는 화자의 어투, 그리고 명확한 구조 없이 아내의 불륜에 질투심을 느끼는 남자의 심리를 밑도끝도 없이 파내려가는 점들이 학을 떼게 한 것 같다. 

위에서 알수 있듯이 그가 각본을 맡은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역시 명확한 이야기라는게 없다. 이 영화에 있는 것은 행동과 기억(혹은 환상?), 그리고 분위기 뿐이다. 어느 익명의 휴양지 호텔, 남자 A는 여자를 보고 작년에 우리가 만났다고 주장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부정한다. A는 여자의 부정을 부수기 위해 사진과 세세한 기억들을 계속 제시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또 부정한다. 그 와중에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이 흘러나온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는 꽤 많은 부분에서 호러 영화의 연출들을 빌려오고 있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호텔은 [샤이닝]처럼 살아있는 공간이 아니다. 주연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마리오네트처럼 거의 움직이질 않으며, 간간히 나누는 말 역시 공허하기 그지 없다.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지나치게 깔끔한 호텔 내부 장식도 그렇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호텔과 호텔 투숙객 모두 생기가 없는, 인형과 인형집에 불과하다.

이런 배경 묘사보다 더 노골적인 호러 장르 연출도 종종 보인다. 서랍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진들이나 불쾌한 환상 같은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들은 분명 미스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심리적인 압박을 주거나 대답을 만들어내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런 요소들은 초현실적인 분위기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 쯤 되면 남자 A가 여자에게 끝없이 작년에 만난 기억을 상기시키려고 하는 이유도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A는 이 호텔의 죽은 듯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은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만난 여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보였고, A는 그녀와 함께 여기를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제안에 대해 애매하게 반응하며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아니 지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A는 끈질기게 여자의 생기를 깨우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계속 부정한다. 이런 추궁(혹은 설득)과 부정의 과정은 계속 반복되다가 결국 마지막에 남자의 설득이 이뤄진 것인지 그들은 호텔을 떠난다. 하지만 호텔을 떠나는 행위 조차도 또다른 미궁을 암시하는듯한 나레이션을 남기며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두 알랭 역시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가지고 반복, 재현, 긍정, 부정 등을 이용해 영화 내내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기억의 모호함에 대한 시를 써내려간다. 로브그리예의 공은 위에서 언급한 [질투]하고 비슷하다. 그는 연설조의 장황한 대사와 정밀하지만 인간미는 전혀 없는 묘사들을 가지고 거대한 미로의 설계도를 만들어냈다. 다행히 로브그리예의 장황함은 [질투]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편인데, 이는 알랭 레네 감독이 정교하게 짜여진 미장센과 유연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멋들어진 영상을. 이처럼 꽉 짜여진 연출로 진행하지만, 종종 레네는 이 꽉 짜여진 연출을 부수기도 하는데, 이런 부수기는 묘한 충격을 가져오기도 한다.


[지난 해 마리 앙바드]는 일일히 머리로 모든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영화다. 이 영화의 매력은 흑백 필름의 질감과 정교하게 구축된 연출과 편집, [샤이닝] 같은 호러 영화에 영향을 준 듯한 인공적인 호텔, 고전적인 매력을 지닌 배우들의 연기들에 있다. 그리고 그 매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내용이 이해가 가는 신비한 구석이 있는 영화다. 물론 그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정신 노동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P.S. 몸 컨디션이 안 좋아서 리뷰 작성하는게 꽤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