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역진화의 시작
J.G.발라드의 첫 중편 소설인 [물에 잠긴 세계]는 익숙한 디스토피아 설정에서 빌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은 홍수가 난 마냥 모두 잠겨 있으며 기후는 열대로 돌아가 거대한 이구아나와 열대 동식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주인공 로버트 케런즈는 이런 상황에서 호화스럽지만 점점 몰락해가는 삶을 누리고 있는 생존자다. 어느날 릭스 대령이 이끄는 부대에서 불면증을 앓던 하드웍이 사라지고 케런즈와 연인 베아트릭스, 정신과 의사 바드킨은 물에 잠긴 세계에 매혹되어 '역진화'의 여정에 올라서게 된다.
클리쉐라면 클리쉐이지만 J.G.발라드가 이 재난을 묘사하는 방식은 기존 디스토피아 소설하고 거리가 멀다. 케런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꽉꽉 채워 묘사되며 사건보다는 심리의 변화가 우선시된다. 게다가 발라드에게 이 재난은 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길하지만 거부할수 없는 매력과 역진화의 단초를 가진 존재다.
소설은 이를 모든 정신은 물질에 기반에 두고 있다는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바드킨이 '저 물에 잠긴 풍경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재되었던 홍수의 기억을 흔들어 꺼내는 것이라네' 말하는 부분에서 재난의 풍경이라는 가시적인 존재가 어떻게 비가시적인 존재인 정신을 변형시키고 마침내 물질-인간의 신체에게도 역으로 영향을 미쳐 인간을 역진화의 길로 이어지게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는 물과 자궁이라는 매우 프로이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된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후 세계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전파로 점점 크리스탈화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적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됨) 된다는 [크리스탈 세계]와 자동차 충돌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자동차 충돌이 성적인 리비도로 전이됨) 인간군상들을 그려낸 희대의 문제작 [크래쉬]로 이어지는 J.G.발라드가 품고 있는 미학의 단편을 엿볼수 있다. 나로써는 이런 유물론적이며 정신과 현상의 관계를 그려내는 발라드만의 미학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소설에서는 생존자들은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케런즈, 베아트릭스, 바드킨 등 그 재난 속에 매료되면서 역진화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조건으로 나가려는 이들, 그 재난을 거부하고 현재의 이득을 추구하는 스트랭맨과 그것을 방관하는 릭스 대령. 소설은 케런즈 일당에게 손을 들어주면서 물을 빼는 작업을 하는 스트랭맨에게는 지독한 혐오감을 보인다. 발라드의 주장에 따르면 스트랭맨은 가시적인 가치에만 집착하며 위에서 언급한 정신과 물질 간의 피드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다. 이는 릭스 대령도 비슷하다. 소설은 이런 구도를 통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런 시선은 소설 마지막에 케런즈가 도시를 떠나면서 극대화되는데, 소설은 결말을 원시로 돌아간듯한 아득한 이미지들로 형상화하면서 신화적인 얼개로 풀어낸다. 그렇기에 소설의 끝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같은 자멸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낭만으로 넘실거린다. 역진화의 끝은 인류 존재 자체의 소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새로운 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완벽한 소설은 아니다. 스트랭맨 파트는 그 중요성에 비해 좀 길며 베아트릭스 캐릭터는 작가가 그렇게 잘 다룬것 같지 않다. 그리고 기본적인 상상력은 그 즉물적인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 세계]에 비하면 아직 남의 것을 빌려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J.G.발라드라는 이후 영미 SF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발라드리언이라는 사전에도 등록될 정도로 극렬 빠들을 불러모은 작가의 시작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작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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