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1956)

giantroot2012. 10. 12. 23:20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은 코티즌 중독과 부작용으로 고생했던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여튼 실화로만 보면 [실물보다 큰]은 휴먼 드라마가 되야할 영화다. 불치병와 정신병과 싸우던 아빠 끝내 일어서다! 이런 식으로. 하지만 결과물로 나온 영화는 실화 근처도 가지 않는다. 외려 실화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사실 실화에 대해서는 딱 피상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자세한 비교는 잘 못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영화가 들려주는 대로 일이 전개되지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터무니없게 극적이고 화려하게 과장되어 있다. 딱 멜로드라마 (단순한 남녀간의 연애 드라마가 아니라, 감정이나 사건 그런게 과잉되어 표현되는 드라마 장르) 스타일으로 말이다. 아무리 에드가 인정받는 교사인데다 1950년대라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벌써 짤렸을것이다. 한마디로 [실물보다 큰]은 사실적인 전개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게 단점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사실주의만이 유일한 미학적인 답이 아니지 않은가. 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가 그랬듯이 [실물보다 큰]은 화려하고 과장된 외양 뒤에 숨어있는 움틀대는 발톱이 중요한 영화다. 근데 솔직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사실 [실물보다 큰]은 멜로 드라마를 넘어섰다. 이건 공포물이다.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화려한 꽃다발 속에 발톱을 숨겼던 더글라스 서크와 달리 니콜라스 레이는 그냥 그 발톱을 화려한 스크린 앞에 꺼내버린다.


그 결과 영화는 굉장해진다. 어떻게 굉장해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에드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둬야 할 점이 있는데 코티즌이 멀쩡한 에드를 미치게 만든게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를 에드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에 할애해 분명하게 에드의 심리와 사상은 미치기 전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노라고 못박아두고 있다. 얼핏보면 에드는 좋은 선생님이자 가장으로 보인다. 세계지도와 나라/도시 이름이 온 집에 붙어 있는 미장센이라던가 (전형적인 미국 마초의 상징인) 미식축구공은 어떠한가. 이를 통해 에드는 관객들에게 '나는 에이버리 가라는 작은 '세계'의 지배자이며, 한땐 훌륭한 미식 축구 선수였던 멋진 아버지이자 싸나이에요. 어때요. 부럽지 않아요?'라고 관객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그는 단조로운 미국 교외를 벗어나지 못한채 몰래 택시 운전수로 벌어먹으며 살며. 그런 에드의 이중성 폭로는 '사실은 유명 선수는커녕 보결 선수인데다 미식 축구공엔 바람 빠져 있었음ㅋ'에서 결정타를 날린다. (덧붙여 에드가 체육 선생인 친구 윌리에 비해 남성성으로도 딸린다는 점도 영화 내내 암시되고 있다. 이런 묘사는 에드의 의처증과 윌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에드는 그런 현실을 절대 인정 못하고 가족들에게 거짓말만 한다. 감독과 각본가들이 에드의 불안한 허세를 이죽거리는게 스크린 밖에서도 들릴 정도다. 이쯤되면 작정했다고 말할 수 밖에.


이렇게 가려져 있었던 위장은 병세와 함께 폭로된다.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가장의 위신은 추락한데다 돈은 부족하다. 막다른 골목길에 몰린 에드는 어떤 방법이든 선택할 기세고 때마침 자신에게 내려온 동앗줄 코티즌을 맹신하게 된다. 이 점에서 [실물보다 큰]의 에드는 비슷하게 허세를 부리다 아무런 탈출구도 없이 무력하게 무너졌던 [도쿄 소나타]의 류헤이와는 완벽하게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에드는 자신의 가부장적인 위신과 철학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정화'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에드의 광기를 뒷받침해주는 철학이 구약이라는 점에서 에드는 [사냥꾼의 밤]의 해리하고도 비교해볼만하다.) 그리고 그렇게 에드는 서서히 미쳐버린 폭군이자 잔혹한 구약의 신이 되어가며 주변인들을 압박한다. 무척이나 화련한 볼거리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에드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게 된다. 에드의 광기는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는 제임슨 메이슨의 연기는 하나의 오페라 수준이다. 영화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그에 보답하듯이 메이슨은 예의바른 신사이자 "좋은" 선생님(이지만 속내는 전전긍긍하는)였던 초반부를 지나 점점 자신감에 가득차고 끝내 미쳐버리는 과정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물론 그런 거대한 시한 폭탄인 메이슨을 받쳐주는 조역들 연기 또한 훌륭하다. 특히 바바라 러쉬는 에드의 아내 루가 겪는 난처한 처지들을 섬세하지만 강렬한 필치로 묘사해내면서 메이슨의 좋은 상대가 되고 있다.


니콜라스 레이가 동원한 2.35:1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는 그런 배우들을 위해 거대하고 화려한 무대를 세팅해주고 있으며 테크니컬러를 동원한 색감은 더글라스 서크 영화스럽게 공격적으로 무대를 채색한다. 조명 설계도 필름 느와르나 표현주의 영화들 수준으로 극단적이다. 리치가 에드에게 보충수업 받는 장면에 등장하는 에드의 그림자를 보아라. 이 장면에서 에드의 그림자는 루와 리치를 잡아먹어버리고 있다. 이런 과장되고 쏘아대는 연출는 마지막 에드가 리치를 죽이려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신경질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극중 텔레비전의 음악과 비틀비틀거리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거기에 오버랩되는 기괴한 붉은 영상들은 무척이나 사이키델릭하다. 너무 앞서 나간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실물보다 큰]은 인상적인 비주얼과 연출로 1950년대 미국 사회 분위기를 포착함과 동시에 사회가 억지로 만든 기준에 적응하기 위해 발악하는 개인의 무서움을 낱낱이 까발리는 걸작 공포 영화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지만 정말이지 아이러니한데다 암담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절대로 되지 않을것이라는 걸 아주 명백하게 못 박은 뒤 그냥 냅다 회복됬으니 경사났네 경사났어 모드로 결론을 내버린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까. 정말이지 소름끼치게 냉소적이고 종말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