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phone Music/리뷰

Charlotte Gainsbourg - [IRM] (2009)

giantroot2010. 4. 7. 22:36

뇌의 음악 Musique Cerveau

1. 영화배우로써 그녀

내가 샬롯 갱스부르를 배우로 인지하게 된 것은 [수면의 과학] 때부터였다. 영화는 끝내 보지 않았지만, 스틸 컷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나는 그녀를 샬롯 램플링하고 종종 혼동하고 있었다. 물론 나이 차이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이 프랑스-영국 혼혈 배우는 어딘가 램플링 여사하고 닮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레밍]에서는 같이 출현하기도 했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아임 낫 데어]에서였다. 로비(히스 레저)의 아내를 보면서 누군데 저렇게 이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됬고 곧 샬롯 갱스부르라는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이 갱스부르라는 성이 그 유명한 세르쥬 갱스부르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2. 가수로써 그녀

사실 샬롯 갱스부르는 중견 가수(!)다. 1984년 아직 어렸을때 세르쥬 갱스부르에 손에 이끌려 '레몬 근친상간'이라는 곡을 부르며 데뷔한 이 가수는 2년뒤 첫 앨범 [Charlotte for Ever]를 내놨다. 전설 아닌 레전드인 아버지의 후광 때문인지 그럭저럭 호의적인 평과 센세이션을 몰고 다녔지만, 정작 당시엔 음악엔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지 2집 [5:55]은 20년만에 내놓게 되었다. (피처링이나 그런건 간간히 했다고 한다.) 사실 첫 앨범이 '귀여운 반항아'로써 포지셔닝된 아이돌 샬롯이 담겨 있다면, 두번째 앨범은 뮤지션으로써 자의식을 지닌 샬롯이 만든 앨범이였고, 그 점을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데뷔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에어, 자비스 코커, 닐 해넌, 나이젤 갓리치 등 영불 드림팀을 모아 만든 이 앨범은 솔직히 완성도와는 별개로 듣지 않아도 음악적 지향이 좀 뻔해보였다. 자비스 코커와 닐 해넌이 집에 틀어박혀 열심히 쓸 법한 (영국풍의) 신랄하고도 자극적인 가사로 세르쥬 빠돌이로 유명한 에어의 곡 지원을 받아 만든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지는 안 들어도 SACD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리스펙트로 가득찬 앨범이겠지.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아한다.), 어머니 아버지가 일군 성과를 짚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을거고, 의외로 결과물도 잘 나와 (한 두 곳 제외하면) 평도 좋았지만 샬롯이 가수로 커리어를 이어가려면 이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자명했다. 아버지 어머니 후광만으로는 평생 살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3. IRM

[IRM]은 뮤지션 샬롯의 소포모어 앨범이다. 보도 자료를 읽어보니 샬롯은 2007년 약한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진료를 위해 들어갔던 MRI (IRM은 MRI의 프랑스어 표기법이라고 한다.) 속에서 들었던 기계음에서 이 앨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왠지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를 착안하게 된 계기가 떠오르는 일화다. 그렇다. [IRM]은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작업들처럼 공감각적인 심상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앨범이다.

샬롯 갱스부르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벡Beck이다. 사실 샬롯이 밝히길 1집 때부터 벡하고 작업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5:55]땐 스케줄 때문에 안됬는지 꿩 대신 닭으로 벡 아버지를 현악 편곡으로 불러들였다. 이번엔 다행히 스케줄이 맞았는지 벡은 공동 창작자로 앨범 크레딧을 차지하게 됬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이번에도 현악 편곡으로 활약하고 있다.

벡이 만들어내는 음의 세계는 깊은 공간감이 느껴지면서도 추상적인 심상으로 가득하다. 앨범의 단초가 된 아이디어가 담겨있는 타이틀곡 'IRM'을 들어보자. 공업 로봇처럼 단조로우면서도 추상적인 음과 깊은 아프로 비트가 대뜸 청자를 후벼파며, 그 뒤에 뇌쇄적이지만 시크한 마담 샬롯의 보컬이 턱하고 얹힌다. SF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싸늘함과 차가움을 지닌 이 곡은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다. 'Greenwich Mean Time'에서는 글리치의 영향을 받은듯한 비트가 등장한다.

하지만 벡의 앨범을 한번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그의 또다른 트레이드마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신구의 조화가 이뤄진 온갖 잡탕 스타일이다. 첫 싱글 'Heaven Can Wait'를 피터 비욘 앤 존 스타일의 쿵쾅거리는 비트 속에 전통적인 포크/카바레 팝이 용해되어 있으며, 휘청거리며 청자를 유혹하는 'Trick Pony'에선 로큰롤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벡은 여기서 자기의 실력을 한껏 발휘해 마담 샬롯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단정된,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마담 샬롯은 전작과 달리 아버지 어머니의 유산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선택을 했을까?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분명 이번 앨범의 세계는 세르쥬 갱스부르의 퇴폐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프렌치 팝하고는 거리가 있다. (무척이나 프렌치스럽지만 색다른 'Le Chat du Café des Artistes'는 제외.) 하지만 그녀의 악센트가 깔린 목소리는 여전히 부모의 유전자를 물러받은듯한 퇴폐적이며 탐미적인 매력으로 가득하며, 벡의 비트에 당당히 맞서서 자신의 색깔을 주장한다. 벡과 같이 쓴 가사 역시 섹시하다.

물론 이 앨범은 비요크의 작업들처럼 창작자와 보컬이 강렬하게 대결을 펼쳐지는 스타일의 앨범은 아니다. 어떤 이는 샬롯이 생각보다 강렬하게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너무 매끈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샬롯 갱스부르은 자신이 뭘 잘하고 누구하고 작업해야 하는지 알고, 벡은 소리를 어떻게 뽑야아 힐지 알고 있다. [IRM]은 프렌치 시크를 추종하는 패션 매니아, 까탈스러운 음악 평론가, 힙스터 리스너, 그저 좋은 BGM을 원하는 가게 주인과 일반인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희귀한 앨범이다. 이런 앨범은 흔하지 않다. 적어도 패리스 힐튼보다는 양심적이지 않은가?

P.S. 들으면서 장필순의 [Soony 6]를 떠올렸다. 불혹이 가까워진 여성 가수가 야심만만한 뮤지션 출신 프로듀서가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전자음 속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장필순은 망했고, 샬롯 갱스부르는 성공했다. (샬롯이 이미 전세계구급 명사라는 걸 제외하더라도) 분명 이 나라는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