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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낮의 사이버 대재난
호소다 마모루의 2009년 신작 [썸머 워즈]는 서로 안 어울리는 듯한 소재를 공존시키는데에서 시작됩니다. 사이버 세계 오즈가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된 근미래, 짝사랑하는 나츠키 선배의 아르바이트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시골집으로 끌려온 수학 천재 고등학생 겐지는 나츠키 선배의 대가족 앞에서 어떻게 잘 해야 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밤에 문자 메세지로 온 암호를 풀었다가 사이버 대란이 일어나버리고 맙니다. 사실 겐지는 오즈 알바생이였고, 그 때문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위기에 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상 세계의 위기는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대충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안 어울리는 소재들의 정체는 바로 시골 코메디와 사이버 펑크 재난물입니다.
이 공존은 어느정도 현실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극에 등장하는 나가노 현 우에다에 있는 진노우치 가처럼 오골오골거리는 대가족의 풍경이 갑자기 싹 사라질리도 없고(상대적인 수야 줄어들겠죠) 시골 대가족 역시 미국의 아미쉬처럼 기계 문명 발달을 거부하며 살지 않는 이상, 그 기계 문명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겠죠. 게다가 인터넷의 장점이 뭡니까? 언제 어디서나 접속을 할수 있다는 점이죠. 따라서 사이버 대란의 중심이 시골에서 일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썸머 워즈]는 옛 것의 흔적이 남은 소도시와 사이버펑크를 연결시킨 TV 애니메이션 [전뇌 코일]하고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작사도 같군요!)
다만 그 이질적인 소재의 공존이 스토리 전개하고는 온전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썸머 워즈]의 연출과 이야기는 시골 코메디와 사이버펑크 재난물 두 중심축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호소다 감독은 세계 멸망의 위기로 치닫는 오즈의 재난만큼이나 사카에 할머니의 90세 생일을 앞두고 진노우치가에 불어닥친 가족 문제나 겐지와 나츠키의 사랑 이야기 같은 사건들도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이 때문에 오즈의 재난은 종종 그 무게와 긴장감을 잃고 시골 코메디 뒤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막판 식사 씬이 그렇죠. 씬 자체는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계 멸망급의 재난인데 저래도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썸머 워즈]는 박찬욱의 [박쥐]하고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로 소재의 우선 순위가 명확하지 않아서 이야기 구조가 헐거워지는거죠. 그래도 중반부까지 우선 순위를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며, 인물 심리 상태도 다소 알기 힘들었던 [박쥐]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썸머 워즈]는 아무리 왔다갔다 해도 기본적으로 우선 순위가 명확하고(시골 코메디) 결정적으로 캐릭터 이해가 쉽습니다.
여전히 소재들이 이야기하고 온전한 화학적 결합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같지만 [박쥐]가 그랬듯이 [썸머 워즈] 역시 그 헐거운 이야기 구조 속에서 기묘한 재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 재미가 뭔지는 직접 보시면셔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게다가 여러분, [썸머 워즈]는 일본 시골을 배경으로 한 사이버 펑크 재난물입니다. 이런 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이야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무난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봐라. 가족간의 화목하게 지내라. 딱히 이 메세지를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였거든요. 다만 그 주제 부분 묘사가 좀 뭐랄까... 소년 만화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건 사실이더라고요. 솔직히 과한 부분도 있었긴 했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일만 했습니다. 딱히 새롭진 않더라도 관객들을 훈훈하게 한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주제보다 인터넷으로 세계인들이 단결할 수 있다라는 묘사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몇 분들이 군국주의 떡밥을 들고 나오시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건 오버 아닌가 생각합니다. 확실히 진노우치가로 대표되는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고 다가서기 쉽진 않지만, 한국도 선비 정신이라는 비슷한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과거의 선조들의 영광을 늘어놓는 늙은 아저씨들, 한국에도 있습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애니 내에서 정치적인 이념을 실현시킬 의도도 없어보입니다. (시키려고 했더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겠죠.) 그냥 이 애니에서 등장하는 전통에 대한 시선은 우리 전통 정신을 잘 살려보자 이 수준입니다. 아 그래도 마지막 결말에 미국 까는 건 좀 괴상하더라고요. 이치에 맞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읭?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썸머 워즈]가 '오오 세상을 바꿀 위대한 걸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본이 되는 시골 코메디는 개성적인 인물들과 일본의 여름 분위기 같은 성실한 묘사들로 인해 인상적이며, 비록 우선순위에 밀리긴 하지만 사이버펑크 세계도 충분히 눈요기 할 만 합니다. 단점들이 있긴 하지만 즐거웠던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듯 하네요.
P.S.1 오즈 운영자의 이름은 존과 요코.... 존나좋군? (힌트. 레논과 오노)
어디서 본 글인데 오즈 운영자 이름을 조지와 패티로, 러브머신을 에릭으로 했으면 어떻게 됬을까?라는 의견이 있더군요. 그건 좀 워키모이 (...) 참고로 '조지' 해리슨(비틀즈)과 '패티' 보이드는 부부사이였다가 '에릭' 클랩턴(유명 뮤지션)으로 인해 결혼생활 쫑났습니다. (...)
P.S.2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애니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본격 공학생 인생 역전 애니, 본격 고스톱으로 세상 구하는 애니일듯.
P.S.3. 이 애니의 주제가 가수는 야마시타 타츠로지만 아저씨에게 박정한 세상은 그가 한국에 알려질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ORZ 따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P.S.4. 옆에서 떠드는 아새*들은 정말 짜증나더라고요. 다행히 전 한번 집중하면 주변 환경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지라 방해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여튼 평일 아침도 안전하지 않군요. 왕십리 CGV는 좋았습니다. 새 극장다운 깔끔함이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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