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부터 다시...그 첫번째
때론 전설은 그 자리에서 박제화 되버리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설을 만들어 놓고, 그 뒤로 쓸쓸히 사라졌던가. 대신 남은 사람들은 그 전설을 기억하고, 칭송한다. 그것이 박제화인것이다. 좋게 말하면 시간과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이고, 나쁘게 말하면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유물이랄까.
에반게리온 역시 그 길을 걸어갈듯 싶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점점 미소녀물로 도배되어가고, 에반게리온이 던졌던 화두들(비록 설익은 느낌도 있었지만.)은 점점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이 작품을 다시 제작하기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솔직히 전설을 다시 살려내겠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냥 재탕 아니야,하고. 하지만 영상과 스틸 컷이 공개 되면서, 에반게리온을 처음 보던 시절의 설레임이 되살아 났다. 다음 화가 있는 DVD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허탈함과 미국판 DVD이여서 한국어 자막도 없이 구극장판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기억도.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에반게리온: 서는 에반게리온을 전설로 박제화 시키지 않겠다는 안노 감독의 분명한 의지가 돋보인다. 우선 기본적 틀은 살리는 대신, 곁가지나 설정들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겠다는 의도이고, 실제로도 성공했다. 보면서 재탕했다는 느낌은 많이 들지 않았으며, 마지막의 '그' 장면은 속된 말로 에반게리온의 떡밥은 아직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만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 나머지, 괜찮은 장면이 다수 잘려나고,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불친절해졌다는 점은 단점이라 들 수 있다. 만약 원작 TV시리즈을 보지 않은 이들이 있다면, TV시리즈 중 6화까지 보거나 구 극장판인 데스 & 리버스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기존의 멋진 장면들이 파워업 된 부분들도 많다. 조그마한 TV로 보면서 덜덜 떨었던 에바 첫 기동 및 폭주는 신극장판에서는 거의 사람을 쥐었다 폈다하는 수준으로 변했고, 본작의 하이라이트인 야시마 작전은 마지막에 허허하고 웃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화면, 소리 모두 돈 들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아직까지는 안노 히데아키가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다소 불투명한 것 같다. 물론 부분부분 그 단초들은 찾아 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전반적인 분위기의 변화이다. 원래 에반게리온의 분위기는 갑갑함이였다. 물론 이 기조는 신극장판에서도 이어지지만, 그에 따른 등장 인물들의 리액션은 좀더 적극적으로 변했고, 거기다가 미래를 긍정하는 대사와 상황들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가지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이야기 자체가 본궤도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다시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며 만드는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아까도 적었듯이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새 에반게리온은 전설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박제를 깨고 나올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박제가 될 것인지는 마지막 4편에서 밝혀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첫 시작은 상당히 괜찮게 출발했으니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감상일 2008.2.4 강변CGV 5시 30분 (2008년 처음 극장 가서 영화보다.)
덧. 우타다 히카루의 주제가는 좋다. 그러니 엔딩 크레딧은 꼭 놓치지 말고 보시길.(심지어 다음 예고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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