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giantroot2017. 4. 9. 01:05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