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레네는 경력의 시작을 몇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다. [밤과 안개]는 그 시절 레네에겐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초창기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중에서 논쟁적이고 도발적으로 역사와 기억을 물었고 그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밤과 안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했는지 얘기해야 할듯 하다. [밤과 안개]는 1955년 프랑스 및 강제수용소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전시 [저항, 해방, 추방] 기획에서 출발했다. 전우회는 영웅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원했지만, 기획 주최자들은 그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였다. 제작자들도 물론이고 당시 갓 다큐멘터리 몇 개로 이름을 알린 레네 자신도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아니였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처음엔 감이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자인 장 카이롤이 이 기획에 참여하고 예상치 못한 폴란드측 기록 자료의 등장으로 [밤과 안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무시무시한 이유는 중심이 되는 두 이미지 사이에 어떤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밤과 안개]는 비극이 이미 끝난 장소에서 시작한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간 아우슈비츠엔 버려진 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사건. 레네와 마르케, 카이롤은 사건이 끝나고 없는, 현실에서 영화를 출발한다. 너무나도 평온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여기가 우리가 봤던/알고 있는 그 끔찍한 아우슈비츠를 맞습니까?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엔 기획 도중 홀로코스트 10주년 기념 행사에 갔다가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두 기획자 올가 보름스-미고와 앙리 미셸의 시선도 담지된다.
이 질문에 이어 세 사람은 폴란드에 운좋게 남아있었던 홀로코스트 자료 화면들을 끌어올린다. 그 자료들은 매우 끔찍하다. 아마 보다가 충격받고 울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자료 화면들은 날 것 그대로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준다. 실제로 카이롤 역시 영화를 만들던 도중 이 영상들을 보고 PTSD가 재발해 괴로워하며 편집실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이미지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연출이나 조작이라는 알리바이 없이 무의미한 죽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도망칠 구멍이 없다. 화면 위에 일어난 죽음은 화면 밖에서 정말로 일어났고, 다시 돌이킬수도 없다. 엔터테인먼트로써 죽음을 한창 넘어서버린, 스너프 필름이나 범죄 현장 사진이나 다름없다. [밤과 안개]는 고통과 무의미로써 폭력과 죽음이 넘쳐난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그 무의미한 죽음을 지시한 사람들의 얼굴과 광기 역시 장르화나 허구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감정적 사도마조히즘이나 포르노로 빠질수 있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레네를 비롯한 제작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미지를 선정하고 배열하는데 앞장섰던 레네는 그 이미지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이다.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하나의 몽타쥬로 구성한다는 것. 영상 구성을 담당한 레네는 이 영상들이 언젠가 사라질까봐 근심하면서 몽타쥬를 짠 게 분명하다. 레네는 [밤과 안개]라는 제목으로 절박하게 자칫하면 사라질뻔한 끔찍하지만 귀중한 이미지를 하나의 영화로써 포섭하고 기록한다. [밤과 안개]는 현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 이미지를 채집한다는 다큐멘터리적 행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홀로코스트를 기록한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등치되고 있다. [밤과 안개]는 아직 전쟁이 잊혀지지 않은 그 시절, 잊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화의 몸에다 자신을 새겨넣고 있다.
레네는 이 이미지들을 평온한 수용소 유적지 촬영 현장과 배치한다. 그 순간 평온한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영화 속 자료 화면 속에서 그 현장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화면이 레네가 가져온 이미지와 겹쳐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한 폭력을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며, 동시에 그 자료 이미지의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남아있는 유적 이미지들은 더욱 끔찍하게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순간을 장식하는 증인이 된다. [밤과 안개]는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사건이 지나간 자리와 사건을 기록한 이미지 간에 만남을 추구하면서 그 이미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밤과 안개]에서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는 장 카이롤과 크리스 마르케의 공이 크다. 이 둘이 참여한 나레이션이 두 이미지를 묶고 있다. 카이롤과 마르케의 나레이션은 상술했던 부재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그 부재의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죽음과 폭력이 있다는걸 주지시킨다. 시적인 언어로 구사된 나레이션은 그 점에서 은폐된 폭력과 공포를 부재하는 공간에서 길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냉정한 시적 언어로 두 이미지 간에 존재하는 '부재'와 '존재'를 채워가며, 그 당시 있었던 상황과 생존자의 기억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시적 언어를 읽는 미셸 부케의 나레이션은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5월], [환송대]나 [태양 없이]로 이어지는 마르케의 이후작에 등장하는 기억과 이미지, 장소 간의 사유는 이미 [밤과 안개]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말은 알랭 레네에게도 적용된다.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해 마리앵바드] 등에서 찾고자 했던 '기억'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그걸 영화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이 냉정하게 쓰여진 시는 동시에 불의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격렬한 고통, 더 이상은 이런 비극은 안 된다는 절박한 꿈틀거림을 품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선언이다. 당신들은 정말로 이 비극이 없었다고, 비극 전날처럼 살아갈 것인가? 그 없음을 비극 이전의 없음처럼 기만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뭐가 되는가? [밤과 안개]는 어떻게든 과거를 잊은 척 살고자 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통렬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밤과 안개]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는 이들이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 ("독일의 노동자, 뷔르거 암스테르담의 유태계 학생 슈테른 크라코우의 상인, 슈믈스키 보르도의 여학생 아네트 등은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천 마일 거리에 그들을 수용할 곳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라는건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피해자들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분노, 고통에 대한 이해와 연대, 반복하지 말자는 결기가 [밤과 안개]를 위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인류는 [밤과 안개]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고,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고 울 수 있다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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