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18 - [Deeper Into Movie/리뷰] -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왜 타티는 성공적이였던 [나의 아저씨] 후속작을 만들지 않고 8년동안 이 영화를 만들며 침묵을 지켜왔는가? 적어도 그가 반복하는걸 싫어했다는건 명백했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은 성공을 믿고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모한 영화다. 타티가 [플레이타임]를 위해 만들려고 했던 장소는 건물 몇 개가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도시였다.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담은 세트로 만든다는 시도는 도무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비물질인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설계해 담아야 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편법이 동원되는데 타티는 그걸 거부한 것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처음부터 실패가 내정되있는 선택이다. 실제로 타티는 영화의 실패로 몰락했고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났다.
대체 뭘 했길래 타티는 그렇게 파산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던가. 영화의 시작을 보자. 재즈 음악과 하늘이다. 처음부터 타티가 왜 그런 세계가 필요했는지 명징하게 설명된다. 재즈 음악의 복잡한 임프로바이제이션과 거대한 70mm 스크린과의 결합. 타티는 복잡하지만 자유롭게 요동치는 에너지를 영화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내린 다음 타티가 시작하는 곳은 공항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 내 세계로 관객이 초청받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영화의 시작은 어떤 대상을 다룰지를 보여주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플레이타임]은 그 전통을 공항과 관광객으로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타임]의 도입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윌로 씨가 아닌, 윌로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장소에 배치된 무수한 사람들이다. 관객은 윌로 씨가 언제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거기 배치된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를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들과 대화들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지문들이다. [플레이타임]은 처음부터 타티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짓이 필요했는지 설명해낸다. [나의 아저씨]에서 팬터마임과 무언극, 무성 코미디 영화의 결과물을 총결산한 타티는 그 총결산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사가 아니라 윌로 씨가 만들어내는 행동이였던걸 생각해보라. [플레이타임]은 그런 행동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업그레이드는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플레이타임]은 정말 아무도 가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는 아름다움에 훌쩍 도달한 영화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미국 관광객이 표면적인 주인공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큰 스크린에서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타티빌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소우주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타티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플레이타임]에 이르면 이야기는 몇 단어로 축소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른다. 윌로 씨가 우연히 만난 바바라에게 여러 소동 끝에 꽃을 준다. 이게 전부다. [플레이타임]은 [윌리를 찾아라]가 그랬듯이 의미도 맥락도 거의 없어진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리듬에 동참하고 발견해야지 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서 서브플롯은 슬그머니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씬스틸러 역할을 한다.
자크 타티는 분명 이 영화에서 장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에서 만들었던 흐름의 영화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로 대표되는 유동적인 카메라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잡아냈다. 타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어이 인물을 삭제하고 도시 속 거대한 흐름에 주목한다. [플레이타임]의 코미디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 엉키는 순간에서 드러난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재해인 윌로 씨가 중심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냈다면, [플레이타임]에서 흐름은 이제 윌로 씨에 머물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정부적 카오스로 넘어간다.
타티는 다양한 도시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 역동적인 에너지와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길을 잃거나 엉뚱한 슬랩스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현대 건축의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가 흡족해할만한) 아르펠 씨의 집이 확장된 타티빌은 그렇게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데다, 타티의 카메라조차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는 약간 짗궃게 '르 코르뷔지에 씨 보고 계신가요....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철근과 유리의 도시에선 인간들이 이렇게 산답니다 (에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타티가 바라보는 관광객과 도시인들은 강박적인 목적을 위해 우스꽝스럽게 바둥바둥거리는 사람들이기에 이 우스꽝스러움은 강해진다.
반대로 바바라와 윌로 씨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다. 바바라는 줄곳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사진에 담을 기회를 노리려고 하고, 윌로 씨는 [나의 아저씨]에서 그랬듯이 어리숙한 표정으로 휩쓸리면서 선의에 가득찬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선의도 하나의 카오스를 일으키는건 자명하다. 그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근대적 산보자로써의 대도시' 파리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근현대인인 윌로 씨와 바바라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과 흐름을 관찰하고 동시에 휩쓸린다. 때문에 이 영화가 [심시티]가 나왔던 시대에 나왔다면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웠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비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도시 문명이나 사람들의 공시성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는 [심시티]나 [심즈]의 비전을 닮았다.
종종 타티는 그런 엄청난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잡아내곤 한다. 윌로 씨가 군대 동기를 만나러 아파트에 들어가는 시퀀스이 그렇다. 여기서 타티는 음향마저 빼버린 채 아파트 하나를 만화 패널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타티는 창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창틀로 구성된 두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무성영화적으로 구성한다. 두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동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인물이 개를 끌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에서 좌석이 되고, 그 앞에서 일어나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흐름이 하나의 프레임에서 움직인다. 타티는 그게 바로 영화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타티의 이런 생각은 고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자의식을 생각했던 현대 영화에 가깝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레스토랑의 재난은 타티빌의 미학을 한번에 압축하고 그걸 뛰어넘는 장면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레스토랑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어오고 밴드는 연주를 하고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종업원의 옷은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대화는 넘쳐나고, 몇몇 사람들은 떠나고.... 타티는 이 시퀀스에서 몇몇 상황을 정한 뒤 그것을 꾸준하게 반복/변주해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유머를 만들어낸다. 그 장관의 몰입도가 엄청나고 길이도 제법 되는지라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적 임프로바이제이션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은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게 한달까. 그렇기에 이 시퀀스 말미에 윌로 씨와 바바라가 거리로 나올때 해방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하지만 그 임프로바이제이션에 관객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타티가 카메라를 윌로 씨와 바바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바바라가 무대에 올라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에 타티는 클로즈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려준다. 그는 도시 문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윌로 씨나 바바라, 미국인 부자 같이 그 카오스를 느긋하고 유머러스하게 즐길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한 괜찮을거라고 말한다. 영화 도중 히피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타티가 히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카오스에서 히피는 자연스럽게 양복 입은 신사숙녀들 사이에서 잘 어울린다. 윌로 씨가 바바라에게 꽃을 건네주고 (그나마도 대신 부탁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지만) 바바라가 행복해하는 결말은 그 점에서 타티의 낙천주의가 발하는 멋진 결말이다.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타티는 적어도 어렵게 살긴 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평생 꿈꿨던 영화를 완성했고 아마 고생은 했어도 만든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윌로 씨의 익살스러움과 반대로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자크 타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에 솔직하고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큰 스크린에서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 성숙하지만 낙천적인 긍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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