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단상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 정리

giantroot2014. 1. 5. 09:48

이 글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 (1995, 한나래)에 실린 토마스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를 과제를 위해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번역투에 어색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토마스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1995년 장 두셰가 조르주 멜리에스와 루이 뤼미에르 간의 논쟁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두셰는 가상 현실로의 변화란 한 종류의 사유에서 다른 종류의 사유로의 변화이고, 인간이 실제적인 것과 맺는 관계를 바꾸고, 교란하고 심지어는 국해하려는 목적을 갖는 변화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바쟁이 옹호했던 뤼미에르주의자이 실천했던 영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앨새서는 두셰의 이런 주장과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끌어온 뤼미에르에 대한 인용을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려면서 지난 100년은 몇몇 뤼미에르 추종자들에게서 뤼미에르를 지키는 과정 아니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앨새서는 이 질문에서 사실 뤼미에르는 다큐멘터리적 측면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앨세서는 영화 탄생에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술적인 더 깊은 이유가 있는지를 들면서 영화의 필연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필연성은 고대 회화나 유희에 비롯된 여러 철학적 과학적 실험들에서 증거를 찾고 있다. 이런 계보는 영화라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있었다는 걸 일깨워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9세기에 속하지만 그것의 사회적 측면, 도시적 삶의 현대성에 관여하는 방식, 기술적으로 추동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면 20세기에 속한다. 즉슨 문화적으로 자신을 정의하고자 하는 특정한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던 것은 전혀 다른 역사를 제공한 동시성과 순간성의 장치에 대한 조급함이였다. 예를 들어 만일 영화를 고전 영화 이론과 영화사의 견해처럼 재현과 의미화 작용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영화를 변형하거나 영화를 생기게끔 한 사회적 공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간 오후나 저녁 때 수천만 번이나 되는 우리의 경험을 1차적인 증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19세기엔 분할, 재결합, 조립 가능한 실체로서의 시간을 경제적으로 탐구하고 관리하려는 압력이 있었는데 영화의 사용 가치는 분절하고, 설계하고 최종적으로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연속 촬영 역시 노동하는 신체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영화사를 설명하는 다양한 도입점은 영화의 기원과 초창기가 영화의 미래를 사고하는데 매우 적합한 경로임을 예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도입점으로 인해 우리는 또한 역사가들이 아마도 반사실적 혹은 가상 역사로 간주하는 것에 의준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이런 반사실적인 개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역사를 고려해보고자 하는 태도다. 그 역사들에는 산 자를 유령들이 가리며 영화와 다르지 않게 죽지 않는 자들로 그 공간을 메운다. 이는 산업에서처럼 우리의 꿈 안에서 영화의 위치를 인식하는 적절한 공간을 영화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거나, 가능한 모든 다른 종류의 역사들과 인류가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고자 했던 대안적인 역사에 실체를 부여하는 영화사의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엄격히 말해서 영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기묘한 존재론적인 위치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영화 선구자들이 경험한 명백한 실패를 통해 영화에 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일들은 그들을 고무시킨 가정, 가치, 그리고 상상된 목표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자료들이였던 것이다. 영화는 인식론적인 단절로 사고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져 있고, 사용되던 것들을 개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앨새서는 영화의 유레카적인순간이 아니라 텔레비전과 인터랙티브 미디어,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영화의 미래의 고고학, 영화가 탄생한 순간에 그것이 직면했던 문제가 무엇이였는지 탐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관점은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먼저 앨새서는 영화의 선구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되려 영화의 미래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머레이는 운동을 분석하기보다는 재구성하려는 사람을 경멸했으며 에디슨 역시 키네토스코프에 관한 특허권을 취득하려 하지 않았다.

루이 뤼미에르는 달랐다. 그는 에디슨이 내치다시피한 크로노포토그래피를 개선해 시스템으로서 개발된 시네마토그래프와 그것으로 만든 영화를 통해 동시대인들에게 마술가로 여기게 하였다. 이런 루이 뤼미에르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반응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한 종류의 재현인 시각과 또 다른 종류의 재현인 시각의 움직임간의 차이를 강조했으며 이는 리얼리스트적이라기 보다는 마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미에르의 영화는 영화사에서 리얼리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앨새서는 두셰와 반대로 뤼미에르 영화가 갖는 극단적인 인위성과 정교함이 갖는 스타일의 의지와 형식적인 구성의 의식적인 원리에 주목하며 이것이 대단히 생산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은 리얼리즘이나 마술적인 이미지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점을 발견한 사람들은 196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아방가르드 작업을 했던 영화 감독들과 비평가들이였다. 그들은 낯설게 하기 전략을 사용해서 비규범적이고 비내러티브적인 연출을 성취했고 대안적인 역사에 도달하는 계보를 창조했는데 이는 뤼미에르 영화를 형식적 일관성과 메타시네마적인 구조의 견지에서 해독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앨새서는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배치를 갖는 뤼미에르의 단일 숏과 단일 장면의 영화는 플롯이 없는혹은 조정, 편집, 손대지 않은 기록이 아니라 연속적인 내러티브가 조심스럽게 취사 선택된 많은 결정들을 반영하는고도로 구조화된 것이라는 도텔바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도텔바움은 뤼미에르 영화의 도입과 결말을 주목하면서 결말이 영화의 도입부와 재결합하거나 도입부를 거꾸로 반영하고, 매우 효과적인 내러티브의 종결을 제공하는 행동과 사건을 기록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구성은 사건 그 자체의 인과적 혹은 기능적인 논리를 전경화하고, 영화의 시작이 행위의 시작과 일치하면서 그것을 보강하도록 한다.

이런 행동의 범위와 지속이 영화 그 자체에서 신호화 되고, 그것이 내러티브 서스펜스와 관객을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는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도텔바움은 뤼미에르 영화에서 매우 복잡한 공간의 구조적인 사용과 주인공, 액션의 반복, 프레임 내의 운동의 이중화와 깊이 있는 배치의 증거를 발견하는데 이는 단순한 내용을 굴곡시키는 미묘한 형식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영화는 또한 몇 가지 수준에서 기본적인 내러티브 구성, 즉 균형, 불균형, 균형의 회복과 같은 3박자라는 최소한의 요구를 존중한다.

그리하여 묘사되는 행동의 본성과 지속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닌 필름의 한정된 길이와 허구적인 사건과 물질적인 대상으로서의 영화가 스펙터클하게 수렴하면서 출연하는 서스펜스가 발생하게 된다. 뤼미에르는 심도와 공간을 활용해 특정한 종류의 공간적 실험을 시도한다. 뤼미에르의 영화 안에 내포된 관객은 헤라클레이토스적인 강의 비가역성에 깊이 몰두하는 전형적인 영화 관객이 된다. 이 영화 관객은 회화나 스틸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 즉 물리적으로 자유롭게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관객과는 다르다. 운동을 포함하고 눈을 집중시키는 프레임과 카메라 배치 기능이 가리기와 겹치기의 유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앨새서는 뤼미에르에게 부여된 다큐멘터리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이 점은 아방가르드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구조적 특징의 역사적인 원리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그리고 루이 뤼미에르에게서 어떻게 이 역사적인 원리의 구체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이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공은 사실 영화 자체와는 무관하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뤼미에르가 상표를 붙인 소프트웨어를 더 폭넓게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새로운 하드웨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뤼미에르 영화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접근이 흥미를 끄는 것은 그들의 분석이 논쟁적으로 반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더 전통적인 영화사적 접근이라면 아방가르드보다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일부분이였다고 주장했겠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계속해서 보여지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닫히면서도 열리는 경험을 보여주기 위해, 그래서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의 순환 필름을 개선하면서 또한 논평하고, 이제 영화가 보드빌의 연속 공연과는 다른 오락적인 공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더 명확한 사회 역사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세잔 큐비즘 인상주의자를 언급하는 것은 영화사 뿐만이 아니다. 예술사 역시 이미지들의 세계를 이끌어낸 사진과 영화의 독특한 보는 방식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몇몇 예술사가들은 새로운 매체가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주목의 형식인 응시를 관찰자에게 부여한다고 강조하며 이미지의 전체적인 일관성을 고려하면서 점차적으로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이미지에 손을 대는 리얼리즘적인 응시와 이미지를 통과하는 꽃으로, 또한 이미지를 분해하고 분석적으로 이미지에 스며들기 위해 누이 시각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쪽으로 더 향해 있는 자연주의적인 응시를 예시로 들었다. 앨새서는 이런 점이 흥미로운 것일지 몰라도 영화 선구자들을 고무시킨 역사적인 상상과 개념적인 전제를 이해하는데에는 부차적이고 성급한 범주화라고 보고 있다.

앨새서는 그러나 다른 역사주의적 관점이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픽한 시각에 관한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전통적 이미지 보기와 관람으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이는 사진적인 시각을 실천하면서 발전했고 그 자체 이미지를 사고하는 방식이자 이미지를 보는 방식이다. 이는 또 시각 예술에서 회화적인 것의 한 세기로부터 차용한 것이자 시각을 소유하는 행위를 함축하는 것이다.

시각을 소유하는 행위는 스테레오스코프에 강화되었는데 이는 1890년대에 독일에서 발명된 물품이다. 24명의 사람이 앉아서 천천히 회전하는 슬라이드 쇼를 교대로 볼 수 있게끔 한 회전식 슬라이드 상자인 스테레오스코프는 뤼미에르에게도 영향을 미쳐 깊이 있는 무대 배치, 화면 밖 공간의 사용, 시선의 각도와 축 모두가 특정한 관람 방식과 결합했다. 즉슨 스테레오스코프는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과 비평가들이 이영화에서 발견한 형식주의적인 강박 관념에 역사 유물론적인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이 스테레오스코픽한 시각이 진부한 것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시각에 대한 연구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테레오스코프를 언급하는 것은 루이 뤼미에르가 평생동안 3차원 관렴뿐만 아니라 컬러 사진, 사운드 계량 장치에 몰두했다는 것을 이해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미심쩍어 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뤼미에르의 관심사를 이미지-재인지, 인공지능 기계, 광학적이고 음향적인 센서를 중요하게 사용하는 현대적인 작업과 연결시키게 해준다. 뤼미에르의 실천이 갖는 스테레오스코픽한 차원이 그를 그의 가장 가까운 후계자들과 구별짓게 하면서 과학적인 선임자와 같은 계보에 놓이게끔 한다. 뤼미에르는 지각을 분리시키고 시각의 차이를 통한 시각을 사용했고, 평면적이면서 동시에 심도감이 있고, 통일되면서도 분할되어 있고, 상이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집중되어 있는 두 층위나 세 층위의 이미지를 눈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눈이 이미지를 스캐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놀랄 만한 것이였다. 우리는 또한 흥미와 매혹의 관점이 증식됨을, 그리고 그것이 단안 원근법에서 벗어나게 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고정되고 정적이던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움직이고 살아나게 한 연습의 결과로서 나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공간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낸 스테레오스코프를 특이하게 개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반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외관상으로는 3차원적인 환영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시각장과 회화적인 경험에 대한 진기한 독해를 위해 구조화된 이 공간이 루이 뤼미에르를 원근법적인 리얼리즘의 미학이나 환영주의의 영향으로 이끌고 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 둘이 영화의 역사를 규정짓게 된 이후론 뤼미에르는 영화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영화에서 환영주의의 승리는 단지 실증주의적 역사의 흔적일 뿐이다. 그 역사 뒤에는 많은 가상 역사가 숨어 있다. 환영주의를 통해 루이 뤼미에르를 그 영화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영화의 첫 번째 우두머리로 상징화는 것은 그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발생시킬 수 있는 환영주의를 통해 가능한 보기를 검토하고 상세함과 정밀함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가 추구한 독특하고 개인적인 의제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뤼미에르가 영화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21세기와 가상적인 것의 패러다임이 초래할 여러 가능성을 위해 그를 보존해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앨새서는 루이 뤼미에르가 만든 이 가상성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뤼미에르는 그것의 선조와 산파자였으며 그렇기에 위대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경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결국 우리 자신(과 영화)를 잘 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